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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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덕천서원(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 조식 선생 봉향 서원) 

 

4.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1) 고려말 14세기 후반에서 조선 초 15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한 학자들에 의한 초창기 성리학(性理學)은 ‘학파(學派)’를 이룰 만큼 다수의 학자들 사이에 이론적‧관념적 통일성이 뚜렷이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령지역에도 유학의 학맥(學脈)이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운 성리학’이 학파(學派)로서 의미있게 등장한 것은 15세기 후반 내지 16세기 초반이었다.

(註釋) 성리학(性理學)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운행(運行)법칙, 인간의 심성(心性)과 본질(本質)과 도의(道義)를 규명하는 학문을  말하며 송학(宋學),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2) 16세기 중엽 고령 유학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합천과 산청에 지역적 연고가 있고 매부(妹夫)인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이 고령 대가야읍 월기에 살아 고령에 내왕(來往)이 잦았고 학곡(鶴谷) 최원(崔源), 낙천(洛川) 배신(裵紳), 죽연(竹淵) 박윤(朴潤), 송암(松菴) 김면(金沔) 등 다수의 문인(門人)이 고령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남명학파(南冥學派)에 경도(傾倒 : 기울어짐)되어 있었다.


(3) 17세기 초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수제자(首弟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지역 문인들이 광해군 15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과 광해군복위음모사건(光海君復位陰謀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겪으면서 남명학파(南冥學派)가 쇠퇴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중심으로 하는 한려학파(寒旅學派)가 고령 유학의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하였다.


(4) 17세기 후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8세기 중 · 후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청천(青泉) 신유한(申維翰) 학맥(學脈)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지역 출신 나학순(羅學洵)과 성주 출신 이지원(李志完) 등이 주도하여 숙종 38년(1712년) 노론계 서원인 노강서원(老江書院)을 창건하여 영남 내 자파세력인 노론(老論)세력을 부식(扶植)하여 다양(多樣)한 학맥이 고령 지역에 공존(共存)하고 있었다.


(5) 19세기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간재(艮齋)  전우(田愚),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등 노론(老論) 계열의 학맥이 있었으나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정재학파(定齋學派),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문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등의 한주학파(寒洲學派)와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의 만구학파(晩求學派),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사미헌학파(四未軒學派),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성재학파(性齋學派) 등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가 지역 학맥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도(門徒)가 지역 유림(儒林)의 주축(主軸)을 이루었다.

5. 시대별(時代別) 대표적(代表的) 유학자(儒學者)

(1) 고려시대
① 중기
학문을 중시하는 분위기인 문풍(文風)과 관련하여 특기(特記)할만한 인물은 인종(仁宗) 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청렴(淸廉)·충직(忠直)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신숙(申淑)과 고종 39년(125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 감찰대부(監察大夫) 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七言詩)와 오언시(五言詩)로 엮은 서사시(敍事詩)인『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고 가리이씨(加里李氏)의 시조(始祖)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등이 있다.


② 말기
주자학(朱子學 :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의 제자인 백이정(白正)에게서 일찍이 수학해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우왕 때 충정왕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던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을 들 수 있다. 공은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이포(李褒)의 장남으로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에서 출생하였다.

(2) 조선시대

① 15세기 유학자

▶ 죽계(竹溪) 이신문(李信文 : 여주, 1403년∼1460년)

방촌(厖村) 황희(黃喜)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당대(當代)에 드러났다.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죽계정사(竹溪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講論)하였으니 이웃 고을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책을 끼고 옷섶을 추스르고 배우러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사후(死後) 세조 9년(1464년) 문인(門人)들이 문수산(文壽山) 아래 장자골 입구 계곡옆에 ‘죽계사(竹溪祠)’란 사당(祠堂)을 세우고 매년 봄, 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여러 차례의 병화(兵禍)를 겪어 죽계사(竹溪祠) 사당(祠堂)은 소실(燒失)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죽계사(竹溪祠)가 있었던 곳을 ‘사당터’로 부르고 있다. 후손들이 2015년 4월 18일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황곡(黃谷) 입구에 ‘여주이씨(驪州李氏) 황곡(黃谷)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그러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 송오(松塢) 이사징(李士澄 : 성산, 1418년∼1454년)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의 문인(門人)으로 정명당(正明堂) 정복주(鄭復周)와 도의(道義)로서 사귀었다. 정공(鄭公)의 시 한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청원(淸遠)하고 소산(蕭散 : 한가하고 자유로움)하여 과구(窠臼 : 기존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찬(撰) 육현(六賢) 유허비(遺墟碑) 비문에서 “고령의 인사(人士)가 종장(宗匠)으로 추대하고 고령에 문헌(文獻)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공(公)으로부터 열려진 것이다(靈之人士推爲宗匠靈之以文獻稱寔自公)”라고 기록하였다. 공은 성주 정곡(鼎谷)에서 고령 관동(舘洞)에 옮겨 살았던 성산이씨(星山李氏)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② 16세기 유학자

▶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 : 진양, 1508년∼1555년)

처남(妻男)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중종 24년(1529년)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월담공(月潭公)의 효행(孝行), 학문(學問), 언행(言行) 등의 소문을 듣고 누이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곧 정열부인(貞烈夫人) 조씨(曺氏)로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언형(彦亨)의 넷째 따님이다. 그후 7살 위 처남(妻男)인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門下)에 드나들며 덕성(德性)을 교화(敎化)하고 훈육(訓育)하며 처가곳인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아래 탄동(炭洞)에 있는 산해정(山海亭)에서 박재현(朴齋賢), 문익형(文益亨), 문익성(文益成), 정구(鄭逑), 이희안(李希顔), 조목(趙穆), 황준량(黃俊良) 등 당대의 거유(巨儒)와 종유(從遊)하며 후학(後學)을 기르고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 명종 3년(1548년) 남명(南冥) 선생께서 김해에서 합천 삼가 토동(兎洞)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강학(講學)하자 이곳에 출입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월천(月川) 조목(趙穆),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등과 도의교류(道義交流)하였다. 공은 격천(格天 : 하늘에 다다름)의 효행(孝行)과 높은 학덕(學德)으로 환로(宦路)의 출사(出仕)를 권유받았음에도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밝혀 사양하고 당대의 거유(鉅儒)들과 종유(從遊)하며 음유(吟遊)와 유학(儒學)에 침잠(沈潛)한 징사(徵士)로서 남명(南冥) 선생의 학문인 주경과의(主敬果義)를 실천한 도학자(道學者)이다. 숙종 37년(1711년) 신묘년에 향촌의 인사들이 영연서원(靈淵書院)을 세우고 공을 배향(配享)하였다.

(註釋1) 징사(徵士)
조선조에 재야(在野) 사림(士林) 중에 학문과 도덕, 명망이 높은 탁행지사(卓行之士)를 등용함에 있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불러 벼슬을 주었는데 이런 임금의 부름을 사양하고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밝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지조(志操)높은 선비를 징사(徵士)라 존칭(尊稱)한다
(註釋2) 주경과의(主敬果義)
배운 지식이 능력과 정신으로 승화(昇華)되어 의로운 행동을 통해 실천되어야 한다는 남명의 교육철학을 말한다.

▶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 : 경주, 1513년∼1559년)

가학(家學)으로 중종(中宗) 31년(1536) 병신(丙申)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성리학을 강구(講究)하였다. 예안현감(禮安縣監),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내고 명종 1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餘波)로 가을 벼슬에서 물러나 합천의 숭산(崇山)에 들어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여 지동암(志同岩) 밑에 허물어진 두 선생의 강학지소(講學之所)를 중수(重修)하고 삼수정(三樹亭)이라는 학당을 짓고 경서(經書)을 가르침에 부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문풍(文風)이 진작(振作)되었다. 명종 3년(1548년) 고향으로 돌아와 향림정(香林亭)을 창건(建)하여 강학지소(講學之所)로 삼아 재주에 따라 가르쳤다. 공은 고령지역 최초로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의 4가지 덕목(德目) 중 실천가능한 10조를 엄선(嚴選)하여 향약(鄕約)으로 계(稧)를 만들어 규약(規約)을 세우고 향풍(鄕風)을 교화(敎化)시켰다. 지방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 공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영조 12년(1787년) 우곡면 사촌리에 소재한 영연서원(靈淵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 낙천(洛川) 배신(裵紳 : 성산, 1520년∼1573년)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20년(1565년)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에 대한 천거(薦擧)인 관천(館薦)으로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후 선조 4년(1571년) 조정에서 재능이 없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도태(淘汰)하고 특별히 명유(名儒)를 가려 맡길 것을 명하였는데 이조(吏曹)와 예조(禮曹)가 배신(裵紳)과 조목(趙穆)을 맨 먼저 천거하여 낙점(落點)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조명(朝命 : 조정의 명령)으로『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여하여 큰공을 세운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공은 낙동강 위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일컫기를 ‘낙천 선생(洛川先生)’이라 하였으며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과는 도의교분(道義交分)하였고 당대의 뛰어난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덕계(德溪) 오건(吳健)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 성산, 1541년∼1597년)

가학(家學)을 전수받아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였다.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당세명현(當世名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선조 22년(1589년) 5월 개진면 개산포(開山浦)에서 성산면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을 뱃놀이를 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7자(七字)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으니 이들을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 불렀으며 이들 중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무런 벼슬도 없이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영에 참여하여 부시(賦詩)를 짓는데 힘썼다. 만년에 장재(張載)의 기철학(氣哲學)을 연구하였다.

▶ 송암(松菴) 김면(金沔 : 고령, 1541년∼1593년)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양문(兩門)에서 수학하고 『명륜지(明倫誌)』,『역리지(易理誌)』,『삼강략(三綱略)』,『봉선록(奉先錄)』 등을 저술(著述)하였으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죽리헌(竹裏軒) 나경(羅璟),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5월에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낙강칠현(洛江七賢)과 함께 낙동강을 선유(船遊)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의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일곱자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다. ‘경(敬)’과 ‘의(義)’의 요체(要諦 : 중요한 깨달음)를 익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 무계전투(茂溪戰鬪), 두곡(豆谷) 역전(驛前) 전투, 지례(知禮) 전투, 성주(星州) 전투, 사랑암(沙郞巖) 전투, 방해현(防害峴) 전투 등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조 26년(1593년) 정월 4일에 경상도 의병도대장(慶尙道 義兵都大將)의 특명(特命)을 받아 한 도(道)의 군(軍)을 통솔(統率)하게 되었다. 선조 40년(1607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정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使)로 추서(追敍)되었으며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칠등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배향되었다.

▶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 순천, 1547년∼1622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선조 19년(15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89년 43세 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1591년)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주자서(朱子書)와 주역(周易)을 강독하여 ‘독서참봉(讀書參奉)’이라 일컬어 졌으며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량의 보급과 유랑민(流浪民) 구휼(救恤)에 최선을 다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과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하여 그 맥락(脈絡)을 이었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만년에 향리에 돌아와 강학지소(講學之所)인 모덕와(慕德窩)를 지어 강회(講會)를 개최하였고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 광산, 1535년∼1594년)

장형(長兄) 용재(容齋) 홍기(弘器), 육일헌(六一軒) 홍량(弘量)과 더불어 형제효우(兄弟孝友)가 지극한 유학자(儒學者)로서 선행(善行)이 세상에 드러나자 세상사람들이 “영남의 삼용(三容)”으로 불렀다. 평소 학덕(學德)으로 중형(仲兄)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에서 숭앙(崇仰)을 받았다.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공의 매부(妹夫)이며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탁남(濁南)의 영수(領袖)가 된 묵재(默齋) 허적(許積)은 공의 손서(孫壻)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성주지역의 모병관(募兵官)으로 널리 충의지사(忠義志士)를 모으는 한편 공의 일군(一軍)은 이부산(伊傅山 : 현재 의봉산)에 본거지(本據地)를 두고 수차례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와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 봉양원사(鳳陽院祠)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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