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全州李氏) 의평군파(義平君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전주이씨(全州李氏) 의평군파(義平君派)

안강재(개진면 신안길 4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


① 『선원계보(璿源系譜)』·『태조실록(太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 의하면,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 : 뒤에 《목조(穆祖)》로 추존)-행리(行里 : 뒤에 《익조(翼祖)》로 추존)-춘(椿 : 뒤에 《도조(度祖)》로 추존)-자춘(子春 : 뒤에 《환조(桓祖)》로 추존)-성계(成桂)로 이어졌다. 이한(李翰)의 선대(先代)가 언제부터 전주(全州)에 세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한(李翰) 이후 전주(全州)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② 광무 3년(1899년) 5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조경단(肇慶壇)을 쌓고,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를 세우고 시조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10일 시조(始祖) 사공공(司空公) 휘 한(翰)과 시조비(始祖妣)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③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던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각 본관(本貫)의 시조(始祖) 또는 파조(派祖)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始祖)로 한다는 사실이다.


④ 시조(始祖)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純宗皇帝)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 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⑤ 옛날 전주(全州)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完山)은 원래 전주(全州)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全州府)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2) 전주이씨(全州李氏) 분파(分派)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 번창했다.


(3) 전주이씨(全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전주이씨(全州李氏)는 413가구 1,1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후손은 개진면 신안리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은 쌍림면 귀원리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은 우곡면 연동, 덕곡면 백리, 운천군(雲川君) 이인(李寅)의 후손은 쌍림면 평지리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은 개진면 생리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양(李穰)의 후손은 쌍림면 송림리에, 담양군(潭陽君) 이거(李) 후손은 대가야읍 내곡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목조대왕(穆祖大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고조(高祖)가 되시며 17세 양무공(陽茂公)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이다. 여러 대를 전주(全州)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에서 살았으며 전주산성별감(全州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서 큰 시비가 벌어지자 전주지주(全州知州)가 목조(穆祖)를 잡으려 하자 전주 백성 170호를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 활기동(活耆洞)으로 이거하고 다시 함경도 덕원 용주리(湧珠里)로 이거하였다가 경흥(慶興) 바로 아래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오동(斡東)까지 북상(北上)하여 구역 내 수천호(首千戶 : 여러 천호 가운데의 우두머리)를 다스리는 원나라 관직 다루카치(達魯花赤)를 겸하였다. 원종 15년(1274년) 3월 10일에 승하(昇遐)하였다. 태조 3년(1394년)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追尊 :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尊號 : 임금이 살아있는 동안에 부르는 칭호이다)를 더 올렸다.


② 익조대왕(翼祖大王)
18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제4남으로 이름은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昇遐)하였다. 태조 3년(1394년)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 이성계)가 익왕(翼王)으로 추존(追尊)하고 그 뒤 태종대왕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尊號)를 더 올렸다.


③ 도조대왕(度祖大王)
19세 익조대왕(翼祖大王)의 제4남으로 이름은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고려 충혜왕 복위 3(1342년) 7월 24일에 승하(昇遐)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追贈)하였다. 태조 3년(1394년)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追尊)되고 후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이 공의성탁(恭毅聖度)이라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④ 환조대왕(桓祖大王)
20세 도조대왕(度祖大王)의 제2남으로 이름은 자춘(子春)인데 자(字)도 자춘(子春)이다. 고려 충숙왕 2년(1315년)에 탄생하고 고려 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昇遐)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追尊)되고 태종대왕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尊號)를 더 올렸다.


(2) 조선시대


① 이원생(李元生)
자는 회원(晦源) 또는 서하재(棲霞齋)이며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정종대왕(定宗大王)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윤(奫)의 따님인 성빈(誠嬪) 충주지씨(忠州池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7년(1417년) 가정(嘉靖) 의평군(義平君)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세종 때 좌명일등공신(佐命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를 증직(贈職)받았다. 성장하면서 지조(志操)와 행실이 탁월하고 재능과 기예가 민첩하였다. 또 석학(碩學)의 강마(講磨)로 문장에 통달하여 진실한 왕자의 기풍선도(氣風先導)를 겸비하였다. 자손들에게 “명리를 구하지 말고(勿求名利 : 물구명리) 시골전장에 퇴거하여(退去鄕莊 : 퇴거향장) 공손하고 겸손하게 분수를 지키라(恭儉自守 : 공검자수)”는 유훈(遺訓)을 내렸다. 세조 7년(1461년) 졸(卒)하다.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② 이효영(李孝榮)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과 금천감무(衿川監務) 치숭(致崇)의 따님인 군부인(郡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종친(宗親)에게 주었던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관계(官階)인 창선대부(彰善大夫)와 종친부(宗親府) 종3품(從三品)의 벼슬인 아인부정(阿仁副正)을 제수(除授)받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어줄 때 왕실(王室)이 온당치 않아 선대의 유명(遺命 : 남긴 명령)에 따라 충남 예산의 고향집에 은둔하여 틈을 내어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다가 졸(卒)하였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석손(李錫孫)
아인부정(阿仁副正) 효영(孝榮)과 선략장군(宣略將軍) 호익시위(虎翼侍衛) 수경(守敬)의 따님인 신부인(愼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종친(宗親)에게 주었던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관계(官階)인 창선대부(彰善大夫)를 제수(除授)받았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영순(李永順)
호는 고령공(高靈公)이다. 직산부령(稷山副令) 효순(孝純)과 생원(生員) 찬(璨)의 따님인 신부인(愼夫人) 상산박씨(尙山朴氏) 사이에서 중종 13년(1518년) 태어났다. 부사과(副司果)를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증직(贈職)받았다.


⑤ 이수양(李守讓)
부사과(副司果) 영순(永順)과 병절교위(秉節校尉) 원(瑗)의 따님인 가평이씨(加平李氏) 사이에서 인조 1년(1623년) 태어났다. 조선 시대 문관(文官) 종6품 하(下)의 품계명(品階名)인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숙종 10년(1684년) 졸(卒)하였다.


⑥ 이우(李偶)
선무랑(宣務郞) 수양(守讓)과 부사직(副司直) 신남(信南)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서 인조 24년(1646년) 태어났다. 성격(性格)과 도량(度量)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나며 지조와 절개가 고상하고 덕을 닦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4년(1728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의평군(義平君) 휘 이원생(李元生)의 7대손인 이시식(李時植), 이말식(李末植) 형제가 경종 즉위년(1720년)경 노론과 소론의 시론(時論 : 한 시대의 여론)이 어지럽게 자꾸 일어나고 국정(國政)에 대한 시비(是非)에 자기 자신을 잊고 한양(漢陽)을 거쳐 직산(稷山)에 머물고 있다가 개진면 신안리로 입향(入鄕)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시식(李時植)
호는 둔와(遯窩)이다. 우(偶)와 유측(由則)의 따님인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현종 13년(1672년) 태어났다. 학문이 능통하여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다. 숙종 34년(1708년) 덕망이 뛰어나 음사(蔭仕)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아우 말식(末植)과 더불어 충남 직산, 예산 등지로 이거(移居)하였다가 다시 고령군 개진면 신안동에 옮겨 살면서 덕을 감추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숙종 46년(1720년) 졸(卒)하였다.


② 이말식(李末植)
호는 일재(逸齋)이다. 우(偶)와 유측(由則)의 따님인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숙종 2년(1676년) 태어났다. 타고난 기품이 남보다 뛰어나게 영리하고 슬기로워 기개와 도량이 뛰어나며 겨우 8,9세에 문장을 짓는데 능하였다.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글자를 벽에 걸어놓고 엄하게 경계하고 아이들에게 감히 어그러지지 않도록 타일러 행실이 무례하지 않도록 하니 아이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20세에 경서(經書), 사기(史記), 문장(文章)에 널리 통달하였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깊이 몰입하여 연구하고 성현(聖賢)을 사모하여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농사를 짓는 밭에 자취를 감추고 서실(書室)에서 도(道)를 강의하고 설명하니 배우는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많았고 향리(鄕里)에서 의지하고 우러러 보았다. 경종 1년(1721년) 졸(卒)하였다. 


③ 이병진(李炳震)
자는 치백(致伯)이고 호는 위재(偉齋)이다. 경암(警菴) 민위(敏位)와 사인(士人 : 벼슬하지 않는 선비) 치량(致良)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순조 29년(1829년) 태어났다.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남보다 뛰어나고 명석(明晳)하였으며 마음과 뜻을 넓게 헤아리고 의로운 일을 보면 용감하게 달려가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곧 깨달았으며 효우목인(孝友睦婣)하는 덕을 겸하여 사람을 대함에 관대하고 몸가짐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궁핍한 이웃의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선(善)을 좋아하고 예(禮)를 아꼈다. 이러한 사실은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증직(贈職)받았다. 고종 31년(1894년) 졸(卒)하였다.

(註釋) 효우목인(孝友睦婣)
효우(孝友)는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와 형제에 대(對)한 우애(友愛)를 말하고 목인(睦婣)은 내외척(內外戚)끼리 친하고 도탑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④ 이정근(李正根)
초휘(初諱)는 순근(淳根)이며 자는 성언(成彦)이고 호는 미헌(薇軒)이다. 증(贈)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병진(炳震)과 사인(士人) 심기(心冀) 사이에서 철종 4년(1853년) 태어났다. 강직하고 명철하며 깨끗하고 맑은 성품을 지녔고 임천(林泉)에 즐거움을 두고 명성이 드날림을 구하지 않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세상을 만나 산에 올라 통곡하고 돌아오면서 아래와 같이 1편의 시를 지어 국권피탈(國權被奪)에 대한 소회(所懷 :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를 밝혀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五百年如夢(오백년여몽) 오백년이 마치 꿈같고
三千里已非(삼천리이비) 삼천리가 이미 글렀네
恨突東海水(한돌동해수) 한(恨)이 동해물처럼 깊으니
欲採西山薇(욕채서산미) 서산에 고사리나 캐려하네”

(註釋)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게 국권(國權 : 주권과 통치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을 이른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진기(李鎭基) : 고령향교 26대 전교
② 이맹기(李孟基) : 해군참모총장, 재향군인회 회장, 대한해운공사 회장
③ 이석룡(李錫龍) : 육군 소령
④ 이석건(李錫健) : 알리안츠생명(주) 영남본부장
⑤ 이봉원(李奉源) : 고등학교 교장
⑥ 이주홍(李柱弘) : 이비인후과병원 원장
⑦ 이정욱(李政昱) : 행정학 박사, 연세대학교 교수
⑧ 이도원(李道源) : 고령향교 제41대 전교, 경북도향교재단이사
⑨ 이진방(李鎭芳) : 대한해운공사 회장
⑩ 이상훈(李尙勳) : 경희대 의대 교수
⑪ 이석형(李錫亨) : 한의사, 한의원 원장
⑫ 이정기(李廷基) : 대한무역진흥공사 페루지사장
⑬ 이형원(李亨源) : 해군 중령
⑭ 이정원(李貞源) : 한의학박사, 한의원 원장
⑮ 이치원(李治源) : 동아제약동아위생 대표이사
⑯ 이승원(李承源) : STX펜오션 중국법인장
⑰ 이지은(李知恩) : 한의사
⑱ 이영아(李英娥) : 미국 오하이요 주립대 교수
⑲ 이동원(李東源) : 폴리켄코리아 사장, 공학박사


자료제공 : 후손 석안(錫安), 석채(錫彩)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