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반운리(盤雲里) 문중(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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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반운리(盤雲里) 문중(門中)

운천재(개진면 반운1길19-5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성산이씨(星山李氏) 시조(始祖) 이능일(李能一)

① 신라가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고울부(高鬱府 : 현재 영천시 임고면 일대)에 장군으로 파견되었다가 경애왕 2년, 고려 태조 8년(925년) 고려와 후백제가 조물성(曹物城 : 의성으로 추측)에서 크게 접전(接戰)하고 있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지원하여 신라와 고려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였으며 고려 태조 18년(935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후삼국(後三國 : 신라, 후백제, 태봉) 통일을 이룩한 고려 태조가 공신(功臣)들에게 대상(大賞)을 내릴 때 시조공(始祖公)의 업적을 높여 휘(諱) 능(能)에 일자(一字)를 더하여 능일(能一)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賜名) 정일품 벼슬인 사공(司空)으로 높혔다.


② 고려 태조 23년(940년) 전국의 주(州)•군(郡) 제도를 설치할 때에 가리현(加利縣 : 현재 고령군 성산면), 수동현(壽同縣 : 현재 구미시 인의동), 계자현(谿子縣 : 현재 칠곡군 약목면), 신안현(新安縣 : 현재 성주군 성주읍), 도산현(都山縣 : 현재 성주군 가천면) 등 오현(五縣)을 통합하여 경산부(京山府)로 승격시키고 공에게 성산군(星山君)의 작호(爵號)를 내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정일품의 문관(文官) 품계(品階)인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을 내렸다.


③ 시조(始祖)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부마(駙馬)로 고려 최고 작위(爵位)인 벽상삼한삼중대광사공성산군(壁上三韓三重大匡司空星山君)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나 각종 문헌 및 활동상(活動相)을 고찰하면 서기 900년 ∼서기 980년으로 추정된다. 시조(始祖)의 배위는 고려 태조의 딸인 정순대장궁주(淨順大長宮主)로 호국개경부인(護國介景夫人)에 봉하여 졌다. 묘는 성주읍 남쪽에 있었으나 병화(兵火)로 실묘(失墓)하고 조선 고종 26년(1900년) 후손들이 옛 사창(司倉 : 조선시대 지방의 촌락에 설치됐던 곡물 대여기관)터에 설단(設壇 : 단을 세움)하여 단향(壇享)을 해오다 1978년 경원사(景源祠)를 지어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한식일(寒食日)과 음력 10월 1일에 춘추향(春秋享)을 지낸다.


④ 시조(始祖)와 관련된 유적지(遺蹟地)
2016년 3월 19일 성산재(星山齋)에서 성산서원(星山書院)으로 승호(昇號 : 이름이 올라감)된 성산서원(星山書院)의 원래 이름은 성산재(星山齋)로 조선 숙종 5년(1679년) 성주목사(星州牧使) 신학(申㶅)이 꿈에 현몽(現夢)을 얻어 시조공(始祖公)의 옛 집터에 남아 있던 우물을 준정(浚井 : 우물을 깨끗하게 쳐냄)하고 ‘이공신정(李公神井 : 시조 이능일이 음용하던 하늘이 내려준 정갈한 우물)’이라 이름하고 그 옆에 작은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2) 성산이씨(星山李氏) 관향(貫鄕) 사용

신라말부터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성주지역에 거주했던 호족(豪族)으로 성향(姓鄕 : 관향)을 성산(星山)으로 사용하여 왔으나 조선 정조 때 조령(朝令 : 조정의 명령)으로 「모든 공적(公的) 기록(記錄)에는 일체(一切) 구호관향(舊號貫鄕)을 쓰지 못 한다.」는 국령(國令)이 내리고 보니, 성산(星山), 성주(星州), 벽진(碧珍), 경산(京山), 광평(廣平), 가리(加利) 등 성주지역육이씨(星州地域六李氏)는 한때 관향(貫鄕)을 통일하여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사용하였으나 1914년 대종회의(大宗會議)에서 “관향(貫鄕)은 시조(始祖)의 성향(姓鄕)으로 한다”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신라 때의 지명(地名)인 성산(星山)으로 그 근원(根源)을 찾아 성산이씨(星山李氏)로 호칭(呼稱)하기 시작하였다.

(3) 성산이씨(星山李氏) 분파(分派)

지인주사(知仁州事) 이여충(李汝忠)을 파조(派祖)로 하는 인주공파(仁州公派), 지김산군사(知金山郡事) 이여신(李汝信)을 파조로 하는 김산공파(金山公派), 좌정언(左正言) 이여량(李汝良)을 파조로 하는 정언공파(正言公派), 봉익대부(奉翊大夫)을 역임한 이문성(李文成)을 파조로 하는 봉익공파(奉翊公派), 호가 기국(杞菊)인 이중화(李重華)를 파조로 하는 기국공파(杞菊公派) 등 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성산이씨(星山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산이씨(星山李氏)는 293가구 73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인주공파(仁州公派) 송오공(松塢公) 이사징(李士澄)의 후손은 대가야읍 본관리 관동, 내곡리, 덕곡면 예리, 성산면 어곡리에, 정언공파(正言公派) 이춘형(李春亨)의 후손은 개진면 반운리에, 기국공파(杞菊公派) 후예(後裔)는 다산면 노곡리, 벌지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견수(李堅守)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정신(正臣)의 아들로 관작(官爵)이 대경(大卿)에 올랐다. 고려중기 경산부(京山府)가 영남 지방의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잡인(雜人)들이 득실거리는 시항(市巷 : 저잣거리.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거리)으로 변하자 세거지(世居地)를 성주(星州) 서쪽 명암(明岩 : 현재 벽진면) 정곡촌(鼎谷村 : 일명 솟질 현재 봉계리)로 옮겼다. 광(匡), 직(直) 등 아들을 포함하여 부자삼인(父子三人)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마을 뒤편에 정자가 있었던 터에 다음과 같은 시(詩)가 전하며 후인들은 아직도 그 터를 대경정(大卿亭)이라고 부른다.

晨昏巷口三軺幷(신혼항구삼초병)
새벽 저녁 마을 입구에 세 수레가 같이하고
歌舞筵中四袖聯(가무연중사수련)
춤추고 노래하는 자리에는 네 소매가 이어지네

② 이우당(李宇唐)
양온서(良醞署)의 양온령(良醞令)을 지낸 양인(陽仁)의 아들로 봉익대부(奉翊大夫)를 지내고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③ 이문광(李文廣)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義判書)를 지낸 배(培)의 아들로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을 지냈다. 


④ 이여량(李汝良)
호는 퇴경(退耕)이다.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 문광(文廣)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천성(天成)의 따님 광산탁씨(光山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왕 6년(1380년) 경신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하였고 같은 해 경신방(庚申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무좌랑(禮務佐郞)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우왕 10년(1384년) 예무좌랑(禮務佐郞) 재직시 우왕이 궐 밖 노영수(盧英壽)의 집으로 놀러 가려 하자 이여량(李汝良) 등이 왕의 안전을 염려하여 호위하려 /50하였고, 우왕은 호종(扈從 : 임금의 행차 때에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 관리(官吏)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왕 10년(1383년)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을 지냈고, 강원도안렴부사(江原道按廉副使)를 역임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서하고 구미시 선산읍 봉남리 <개령(開寧)> 대조동(大鳥洞)으로 물러나 일생을 마쳤다.

(2) 조선시대

① 이우(李友)
강원도안렴부사(江原道按廉副使) 여량(汝良)과 판서(判書)를 지낸 극회(克誨)의 따님 성산여씨(星山呂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재(將材)로 천거(薦擧)돠어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京畿左道水軍僉節度使) 지초토영전사(知招討營田事)를 거쳐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의 성산이씨 입향조(入鄕祖)이다.


② 이유구(李悠久)
진주목사(晋州牧使) 우(友)와 숙부인(淑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오품(正五品) 서반 무관직인 사직(司直)을 지냈다.


③ 이의인(李宜仁)
사직(司直) 의인(宜仁)과 종수(宗秀)의 따님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④ 이운(李雲)
자는 여우(汝雨)이고 호는 삼계(三溪)이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희관(希寬)과 훈도(訓導) 연(璉)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사이에 태어났다. 대암(大菴) 박성(朴惺),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 등 당대의 명현(名賢)과 도의(道義)로 사귀었고 학행(學行)으로 세상에서 추중(推重)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동생 춘형(春亨), 수(需), 4촌 아우 영(霙), 아들 조카 등 12종숙질(從叔姪)이 임란창의(壬亂倡義)에 동참하여 가동(家僮 : 집안의 사내종) 100여명을 이끌고 무계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연안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합천 임란 창의사(彰義祠)와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고령 입향조 이춘형(李春亨)은 1541년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 자질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선조 24년(1591년) 훈도(訓導) 연(璉)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어머니 친정(親庭)이자 공(公)의 외가(外家)가 있는 개진면 반운리와 양전리 경계구역에 입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 마을인 고령군 대가야읍 수곡(藪谷) 현재 내곡 3리 속칭 시실로 가족을 피난시키고 전란(戰亂)이 종식(終熄)되자 개진면 양전리(良田里)에 정착하였다가 그후 농막(農幕)을 따라 인근 개진면 반운리(盤雲里)로 이거(移居)하여 이곳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반운리(盤雲里) 문중의 420여 년간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춘형(李春亨)
자는 여상(汝常)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직(贈職)받은 희관(希寬)과 훈도(訓導) 연(璉)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중종 36년(1541년)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비롯한 형 운(雲), 동생 수(需)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 영남 3대 의병장 진중(陣中)에서 계획을 돕고(贊劃) 군사(軍事) 상(上)의 기밀(機密)을 여러번 세웠으며 무계(茂溪), 성주(星州), 지례(知禮), 개령(開寧) 등 전투에 공의 아들 영숙(永淑)과 권솔(眷率)들이 종군(從軍)하여 왜적을 격퇴시킨 전공(戰功)이 지대하였다. 난리가 이미 평정(平靖)되고 공이 전장(戰場 : 싸움터)에서 돌아와서 초옥(草屋)에 누워 거문고와 글로써 스스로 즐기며 입으로만 임진왜란 때의 수고하였음을 말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통덕랑(通德郞)을 제수(除授)받았다. 선조33년(1600년) 졸(卒)하였다.


② 이영숙(李永淑)
초명(初名)은 영준(永濬)이며 자는 도숙(導叔)이고 호는 우재(尤齋) 또는 송천(松川)이다. 통덕랑(通德郞) 춘형(春亨)과  진사(進士) 의제(義濟)의 따님인 공인(恭人) 화순최씨(和順崔氏) 사이에서 명종 19년(1564년) 태어났다. 선조 22년(1589년) 2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경향(京鄕)에서 모여든 잠신(簪紳 : 벼슬아치)들과 깊이 교류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백부 운(雲)을 비롯한 삼형제와 공을 포함한 아들과 조카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임난창의(壬亂倡義)에 선창(先唱)하였다. 공은 아버지 춘형(春亨)을 따라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 영남 3대 의병장 진중(陣中)에서 무계(茂溪), 성주(星州), 지례(知禮), 개령(開寧) 등 전투에 종군(從軍)하여 세운 전공(戰功)으로 전란(戰亂) 중 실시된 무과별시(武科別試)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수의부위(修義副尉)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냈다. 인조 8년(1630년) 졸(卒)하였다.


③ 이정웅(李廷熊)
자는 덕수(德叟)이고 호는 동주(東州)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영숙(永淑)의 아들로 선조 27년(1594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청백(淸白)하고 시서(詩書)에 능하여 구군훈도(九郡訓導)를 역임하면서 많은 선비를 가르쳤는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산성이 무너지고 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울분을 못이겨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자 세상사람들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불렀으며 현종 3년(1662년) 3월 9일 향년 69세로 조용히 자결(自決)을 했는데 세상사람들이 ‘절의사(節義士)’라 칭하였다.

(註釋) 숭정처사(崇禎處士)

숭정(崇禎)이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年號)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를 거부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백이숙제(伯夷叔齊)처럼 살겠다는 의로운 선비 즉 청절지사(淸節之士)들을 일컬어 ‘승정처사(崇禎處士)’라 했다.

④ 이원영(李元英)
자는 형백(亨伯)이고 호는 송고(松皐)이다. 9군(郡) 훈도(訓導)를 지낸 정웅(廷熊)과 석주(錫疇)의 따님인 유인(孺人)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인조 4년(1626년)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 우애가 있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넓어 추천을 받아 7군(郡)의 훈도(訓導)를 지냈다. 숙종 8년(1682년) 졸(卒)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용석(李龍錫) : 법무사
② 이중석(李仲錫) : 한문학자
③ 이등현(李燈鉉) : 고양유계 도청(都廳)
④ 이기준(李基駿) : 대구매일신문 편집위원
⑤ 이동원(李東源) : 대구여고 교장
⑥ 이명모(李明模) : 울산 길천초등학교 교장
⑦ 이정현(李鼎鉉) : 화가 겸 시인
⑧ 이당만(李唐萬) : 부산구덕고등하교 교장
⑨ 이승모(李承模) : 김천 양각초등학교 교장
⑩ 이순천(李淳川) : 계명대 체육학과 교수
⑪ 이수만(李洙萬) : 두산상사 대표
⑫ 이근환(李根桓) : 한국씨티은행 지역본부장
⑬ 이창환(李昌桓) : (주) 하이넷 대표이사
⑭ 이원모(李源模) : 공주성모안과원장
⑮ 이상동(李相東) : 치과원장
⑯ 이수철(李洙哲) : 쌍용양회 중역
⑰ 이경환(李京桓) : 공학박사, 위덕대 경찰정보보안학과 교수
⑱ 이형동(李炯東) : 공군대령
⑲ 이덕환(李德桓) :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판사.
⑳ 이진환(李振桓) : 대학교수

자료제공 : 후손 이등현(李燈鉉), 이기호(李基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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