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서원(道巖書院) 하편(下篇)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도암서원(道巖書院) 하편(下篇)

수의재(쌍림면 칠등길 138)

 

5. 도암서당기(道巖書堂記)

 고령(高靈) 현내(縣內)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이 있었으니 곧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과 옥산(玉山) 이기춘(李基春) 선생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라.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 즉 현종 7년(1666년)에 세운 것이다. 그 후에 향인(鄕人)이 다시 시장 가까이 있어서 여타 사물에 의해 옮겨지고 빼앗기는 것이 많으므로 치소(治所) 남쪽으로 십리가 되는 김선생 묘 아래의 칠동(七洞) 양지 바른 곳에 이건(移建)하였는데 매양 조정(朝廷)의 선액(宣額)할 날을 바랐더니 불행히 무진년(戊辰年) 즉 고종 5년(1868년)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뒤섞여 포함되는 바람에 훼철(毁撤)되어 학문을 익히면서 글을 읽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작년 임인년(1902년) 송암(松菴) 선생 집안의 후손인 울산의 상규(相珪), 상철(相澈)과 청도의 희주(喜珠)와 성주의 선익(善益) 등이 이를 크게 안타깝게 여기다가 마침내 함께 논의해 물력(物力)을 내어 거칠고 황폐(荒廢)함을 씻어내고 서당 여섯 간을 세워서 선생을 추모하며 학문을 닦는 터전으로 삼았다. 상규는 또한 우리 도산(陶山)과 백세(百世)의 연원(淵源)이 있기로 그의 아들 성도(聲燾)를 보내어 그 유래를 말하기에 만도(晩燾) 또한 그 시조(施措)의 한 두가지를 들려주었는데 첨현(僉賢)들도 불가(不可)하다 아니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리석고 고루(固陋)한 내가 감당할 바가 아니라고 여러 번 사양을하였으나 성도(聲燾)가 다시 와서 독촉함이니 어찌 거절하겠는가? 아! 슬프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임금으로부터 창의대장(倡義大將)의 호(號)를 받았다. 적을 토벌하고 복수한 공(功)과 충성스러운 절개는 바로 제법(祭法)에서 말한 “법이 백성에게 시행되었으면 제사 지내 주고, 죽음으로 일에 봉사하였으면 제사 지내 주며, 힘써서 나라를 안정시켰으면 제사 지내 주고, 큰 재앙을 막았으면 제사 지내 주며, 큰 환란을 막았으면 제사 지내 준다.”라는 경우에 해당한다.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여 감히 지금 아니라고 할소냐! 듣건대 선생께서는 한가로이 거처하며 독서할 때 지엽적인 장구(章句)에 힘쓰지 않고 성현의 대의(大義)를 묵묵히 연구하였으며 더욱이 이정전서(二程全書) 읽기를 좋아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여기에서 힘을 얻는다면 큰 허물이 없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향인(鄕人)들이 공의 덕에 감화(感化)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송암(松菴) 선생이 아실까 두렵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공훈(功勳)과 절의(節義)가 모두 학문 안에서 나온 것이다. 옥산(玉山) 이기춘(李基春) 선생은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과 함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여 지극한 행실이 사람을 감복시켰고 청렴한 절의가 세속(世俗)에 모범이 되었으니 그 학문은 바로 송암(松菴) 선생의 학문과 같았다. 후대에 선생의 공훈(功勳)과 절의(節義)를 흠모(欽慕)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선생의 학문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정(二程) 선생의 글을 배워야 하고 또 한 번 생각하는 순간에 혹 불선(不善)함이 있으면 선생이 알까 두려워하기를 또한 옛날 선생의 마을 사람처럼 한다면 어찌 단지 한 고을의 선사(善士)가 될 뿐이겠는가? 옛말에 “제자들은 학문에 힘쓰도록 하라. 밝은 하늘은 반드시 회복된다.”라고 한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광무(光武) 계묘(癸卯 : 1903년) 춘분절(春分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진성(眞城) 이만도(李萬燾) 삼가 적다.

(註釋1)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註釋2) 선액(宣額)
임금이 사우(祠宇)나 서원(書院) 따위에 이름을 지어 줌.
(註釋3) 도산(陶山)과 백세(百世)의 연원(淵源)이 있기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오랜 세대에 걸쳐 전수받은 집안의 인연이 있음을 강조함.
(註釋4) 시조(施措)
어떤 일을 시행하고 조치를 취함

(註釋5) 첨현(僉賢)
모든 점잖은 분들
(註釋6) 이정전서(二程全書)
중국 송(宋) 나라의 학자인 정호(程顥)ㆍ정이(程) 형제의 글을 총괄하여 편집한 책.
(註釋7) 한 고을의 선사(善士 : 선행이 있는 인사)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여야 이에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선(善)이 한 고을을 모두 덮을 수 있어야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는 뜻이다.
(註釋8) 제자들은 …… 회복된다
《초사(楚辭)》 〈초사후어(楚辭後語) 궤시(詩)〉에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도다. 천추에 반드시 되돌아오리니 옛 떳떳한 도리이다. 제자들은 학문에 힘쓰라. 하늘이 잊지 않을 것이다.[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한 순자(荀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6. 도암서당(道巖書堂) 중수(重修) 상량문(上樑文)

 대저(大抵) 동우(棟宇)를 짓고 중수(重修)함은 이에 장수(藏修)할 곳을 얻고자 함이니 사림(士林)이 경모(景慕)함이 간절하니 어찌 제사(祭社)의 규모를 높이지 않으리오. 중수(重修)하려는 계획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며칠 걸리지 아니하는 동안에 낙성(落成)을 알리게 되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은 도학(道學)이 심오(深奧)하고 덕업(德業)이 세상에 높이 드러났다. 맑게 흐르는 강(江)의 갈매기나 기러기 같이 빠르게 도달하다가도 정자진(鄭子眞)과 같이 물러나 산림으로 돌아가 묵수(默守)하며 수도(修道)하였고 권문세가(權門勢家)의 호화로움을 부러워하지 않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며 전원생활(田園生活)을 즐기셨도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음에 벼슬을 하찮게 여기고 늦게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교유(交遊)하여 시서(詩書)를 연마(硏磨)하였다. 마침내 덕행(德行)이 높고 깊어서 향당(鄕黨)의 훈습(薰習)을 이루었다. 관북(關北) 천리(千里)를 달려가 분상(奔喪)하여 반츤(返櫬)함은 효행(孝行)이 특이(特異)하였음이로다. 한 시대 영남 학문의 빛이 크게 나타남은 자기 자신을 다스림에 있었다. 추로(鄒魯)의 고을에서 공부함에 정주(程朱)에서 전래(傳來)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많은 선비들의 모범(模範)이 되고 사수(泗洙)의 심법(心法)을 이어 전하니 이로서 낙동강 상류지역의 함장(函丈)이 되었고 영남의 사종(師宗)이 되었다. 한 번도 청산(靑山)에 나가지 않음은 백란(伯鸞)같은 아량(雅量)에서 스스로 얻었음이고 두 번이나 벼슬을 사양함은 가히 계응(季鷹)의 높은 뜻을 기약함이로다. 좋은 풍속을 기르고 바로 잡음은 선비의 모범이로다. 학문을 깊게 하여 사람을 가르치고 깨우쳐 정맥(正脈)의 연원(淵源)을 바로잡게 하였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날뛰어 여러 고을이 잇달아서 모두 무너져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분격(憤激)하였다. 난리로 위급할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왜적의 시체가 강물에 뒤섞였다. 행재소(行在所)에 큰 공로를 아뢰어 충렬(忠烈)이 포상(褒賞)되니 이는 뛰어난 신절(臣節)이로다. 외람(猥濫)되게 대장(大將)의 칭호를 내렸고 왕의 말씀에 특별히 정경(正卿)의 벼슬을 제수(除授)받았다. 지금 옛 묘우(廟宇)가 퇴폐함에 후학(後學)들이 탄식하여 중론(衆論)을 모아 같은 마음으로 모덕(慕德)의 예(禮)가 이미 갖추어졌다. 중수(重修)에 있는 힘을 다하여 더욱 희현(希賢)의 정성을 다하였다. 위치는 동남(東南)의 요충지(要衝地)요 큰 내가 둘러싸여 기세(氣勢)가 옛 모습 그대로이고 좌우의 기이한 산봉우리가 서로 읍(揖)하듯이 황홀한 경관(景觀)이로다. 옛 묘우(廟宇)가 장차 새로워짐에 정령(精靈)이 이에 있으리라. 도포(道袍) 입은 많은 선비들이 이에 작은 정성으로 사우(祠宇)를 우러러 본다. 글 읽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니 심성(心性)의 전수(傳受)를 남몰래 생각하리라. 길이길이 흠모(欽慕)함에 육위(六衛)를 다함께 부르자. 어기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져 뜨는 해 맞이하니 마음도 붉어진다. 성현(聖賢)의 가르침이 옛만 못해도 따뜻한 봄바람은 불어 오는데 곧은 지조(志操) 높은 공(功)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 어기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산을 돌아서 물이 휘감아 석양빛이 아득하다. 이속에 남은 향기 어제 같은데 높으신 의형(儀形)은 고금(古今)에 다름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네. 어기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산색(山色)은 멀리 아지랑이 속에 감추었고 화유산(火維山) 우뚝 솟아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있어 세월이 태평함은 성화(聖化)의 미침이로다. 어기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뭇별이 우러러 북극성에 안기고 사양(泗陽)의 정맥(正脈)이 이제 다시 새로워 선비들이 본보기 됨을 다투노라. 어기영차 들보를 위로 던지니 멀리서 가야산이 한없이 높게 버티어서 도맥(道脈)과 문풍(文風)이 크게 성하여 대현(大賢)의 영혼도 여기 계시리. 어기영차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어느 덧 이 아침에 큰 집이 이루어지니 강습(講習)도 이에 모두 의지함이라. 연작(燕雀)도 빙빙 돌아날면서 서로 축하하노라.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한 후에 땅에서 그 싹을 기르고 상서롭지 못함을 꾸짓고 옛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정령(精靈)의 오르내리심을 들을 것이며 이제 옛보다 선비의 본보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고을에 좋은 풍속이 있음은 어찌 후학(後學)만의 모범이 되고 백세(百世)에 사종(師宗)이 되지 않으리오. 마땅히 세찬 물결의 지주(砥柱)가 세워지니 도맥(道脈)이 성대하게 부쩍 일어나고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며 간절하게 선현(先賢)의 유업(遺業) 흠모하는 장구지소(杖屨之所)가 되리라. 
 후학(後學) 포산(苞山) 곽수강(郭壽岡) 삼가 지음
(註釋1) 동우(棟宇)
집의 마룻대와 추녀끝
(註釋2) 장수(藏修)
항상 학문에 뜻을 품고서 중지하지 않고 배워서 익히는 것을 말한다.
(註釋3) 제사(祭社)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한다.
(註釋4) 덕업(德業)
어질고 착한 업적이나 사업.
 (註釋5) 정자진(鄭子眞)
서한(西漢) 말엽에 고사(高士)인 정자진(鄭子眞)이 지조를 굽히지 않고 곡구(谷口)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 이름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다.
(註釋6) 묵수(默守)
묵적(墨翟)이 성을 지켰다는 말로,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끝까지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註釋7)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온 뒤에, 돌아오게 된 배경과 당시의 심경, 깨달음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서술한 글이다.
(註釋8) 훈습(薰習)
덕으로 사람에게 감화를 받아 배움.
(註釋9) 분상(奔喪)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 부모의 상을 당해 부음을 전해 듣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행하는 상례의식을 말한다.
(註釋10) 반츤(返櫬)
타향에서 사망한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와 장례하는 것을 이른다. 선고(先考) 김세문(金世文)이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 겸(兼) 경원진병마절도사(慶源鎭兵馬節度使)로 함경북도 경원(慶源) 임소(任所)에서 졸(卒)하자 수천리(數千里) 먼길에서 향리로 반구(返柩)하여 안장(安葬)하였던 사실을 말한다.
(註釋11) 추로(鄒魯)의 고을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를 말하며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하나 본문에서는 안동(安東)을 뜻한다. 
(註釋12) 정주(程朱)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兄弟)와 주희(朱熹)를 일컬음
(註釋13) 사수(泗洙)
노(魯)나라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孔子)가 이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공자의 학문(學問) 곧 유교(儒敎)를 가리키는 말임.
(註釋14) 심법(心法)
마음을 다스리는 법
(註釋15) 함장(函丈)
스승, 선생이나 장자(長者)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함연(函筵)이라고도 한다. 제자는 스승의 자리와 한 발〔一丈〕의 거리를 둔 데서 유래하였다.
(註釋16) 사종(師宗)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尊敬)하는 사람.
(註釋17) 백란(伯鸞)
양홍(梁鴻)은 동한(東漢) 때 사람인데 자(字)는 백란(伯鸞)이다. 집은 가난하나 절의를 숭상하고 모든 책을 박람하여 정통하였으며 도량(度量)이 있었다.
(註釋18) 계응(季鷹)의 높은 뜻
진(晉)나라 때 오중(吳中) 출신 장한(張翰)은 자가 계응(季鷹)인데,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 강동(江東) 오중의 순챗국[蓴羹]과 송강(松江)의 농어회[鱸鱠]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은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타관에서 벼슬에 얽매여 명성과 작위를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乎?]” 하고는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고사에 근거해 한 말이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註釋19) 분격(憤激)
몹시 분(憤)하여 성냄
(註釋21)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
(註釋22) 신절(臣節)
신하가 지켜야 할 절개. 
(註釋23) 정경(正卿)
조선시대 정2품의 벼슬아치
(註釋24) 희현(希賢)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註釋25) 요충지(要衝地)
지세(地勢)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
(註釋26) 의형(儀形)
몸을 가지는 태도(態度), 예의(禮儀)에 맞는 차림새
(註釋27) 성화(聖化)
성스러운 교화(敎化)
(註釋28) 사양(泗陽)의 정맥(正脈)
사수(泗水)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만년에 짓고 거처하였던 사양정사(泗陽精舍) 앞을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금호강(琴湖江) 하류이다. 본문에서 사양(泗陽)의 정맥(正脈)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학맥(學脈)을 뜻한다.
(註釋29) 도맥(道脈)과 문풍(文風)
도맥(道脈)은 성리학(性理學)의 학맥(學脈)을 뜻하고 문풍(文風)은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말한다.
(註釋30) 지주(砥柱)
격류(激流) 속에도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중국 황허강(黃河江)의 돌기둥. 어려운 시기에도 지조를 굳세게 지키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註釋31) 장구지소(杖屨之所)
원래의 뜻은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벗었던 곳을 말하나 본문에서는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여 높이 받들며 추모(追慕)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자료제공 :  각종 문헌 참고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