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慶州李氏) 벽오공파(碧梧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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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주이씨(慶州李氏) 벽오공파(碧梧公派)

은송정(쌍림면 가곡길 49-1)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기원전 117년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 6년에,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하늘에서 경주 동북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한다. 신라 6촌(村) 중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村長)을 알평(謁平)이라 하며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首長)으로서 국사(國事)의 결정을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정하는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시행하였다. 유리왕(儒理王) 9년(32년) 이씨(李氏)를 사성(賜姓)받았다. 사후 법흥왕 23년(535년) 시호를 문선공(文宣公)이라 하였고, 태종 무열왕 3년(656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2) 경주이씨(慶州李氏) 중시조(中始祖) 이거명(李居明)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문충(諡文忠) 이공묘지명(李公墓誌銘)에 의하면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 신라 말에 들어와 소판(蘇判) 벼슬을 한 진골(眞骨) 출신 이거명(李居明) 이전까지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거명(李居明)은 시조(始祖) 이후 기록이 전하는 최초(最初)의 선조(先祖)가 되었으므로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기세조(起世祖) 즉 족보상의 1세조로 삼고 있다.


(3) 경주이씨(慶州李氏) 분적종(分籍宗)
원래 관향(貫鄕)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운 관향(貫鄕) 또는 본관(本貫)을 창설하는 것을 분적(分籍)이라 하는데 1987년도 간행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나와 새로운 본관(本貫)을 창설한 분적종(分籍宗)은 아래 7개 종문(宗門)으로 파악된다. 


① 합천이씨(陜川李氏) ② 차성이씨(車成李氏) ③ 우계이씨(羽溪李氏) ④ 아산이씨(牙山李氏) ⑤ 재령이씨(載寧李氏) ⑥ 진주이씨(晋州李氏) ⑦ 장수이씨(長水李氏)


(4) 경주이씨(慶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경주이씨(慶州李氏)는 299가구, 96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월파공(月坡公) 이재(李栽)의 후손은 다산면 호촌리와 평리리에,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의 후손은 개진면 오사1리에, 소경공(小卿公) 이지회(李之會)의 후손은 쌍림면 고곡1, 2리에,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의 후손은 쌍림면 합가2리와 대가야읍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高麗時代)
① 이금서(李金書)
신라 말에 현재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금현(金現)의 아들로 태어나 중원태수(中原太守)와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냈다.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였다.
② 이진(李瑱)
초명은 이방연(李芳衍)이고 자는 온고(溫古)이며 호는 동암(東菴)이다. 평리(評理) 핵(翮)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고종 31년(1244년) 태어났다. 원종 5년(1264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을 하고 충렬왕 5년(1279년) 문과에 급제를 하였으며 충렬왕 6년(1280년) 문신친시방(文臣親試榜)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안동부사(安東府使)·군부총랑(軍部摠郎)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23년(1297년)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大司成)·밀직승지(密直承旨)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一掃)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상의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로 승진되었다. 충숙왕 1년(1313년)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다. 충숙왕 8년(1321년) 졸(卒)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동암집(東庵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③ 이제현(李齊賢)
초명은 이지공(李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진(瑱)의 아들로 충렬왕 13년(1287년) 태어났다. 백이정(白頤正)의 문인이었다. 충렬왕 27년(1301년) 진사시(進士試)와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충렬왕 34년(1308년)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시작하여 사헌규정(司憲糾正)·성균악정(成均樂正)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내부시부령(內府寺副令)·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을 역임하였다. 충숙왕 1년(1314년) 상왕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면서 조맹부(趙孟頫), 원명선(元明善), 장양호(張養浩), 우집(虞集), 탕병룡(湯炳龍), 주덕윤(朱德潤) 등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충숙왕 11년(1324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하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轉任)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4회(四回)나 정승(政丞)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공민왕 2년(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었고 공민왕 5년(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反元運動)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공민왕 16년(1367년) 졸(卒)하였다.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이 세상에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④ 이달존(李達尊)
 자는 천각(天覺)이며 호는 운와(雲窩)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아들로 충선왕 5년(1313년) 태어났다. 충혜왕 즉위년(1330) 문과에 급제한 후 사보(思補)를 거쳐 헌납(獻納)·감찰장령(監察掌令)·전의부령(典儀副令)을 역임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에 갈 때 부자가 함께 충혜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왕이 복위(復位)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제수받았다. 고려로 귀국하던 길에 1340년 졸(卒)하였다.


(2) 조선시대(朝鮮時代)
① 이윤인(李尹仁)
자는 임지(任之)이며 낙안군사(樂安郡事) 계번(繼蕃)의 아들로 태종 15년(1415년) 태어났다. 세종 29년(1447년)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한 후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거쳐 단종 2년(1454년)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세조 1년(1455년) 좌랑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策錄)되고, 1461년 수사헌장령(守司憲掌令)에 올랐으며, 사복시(司僕寺) 소윤(小尹)·병조지사(兵曹知事)·행대호군(行大護軍)·행상호군(行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11년(1466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1년(1470년)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면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에 올랐다가 임지에서 성종 2년(1471년) 졸(卒)하였다.
② 이공린(李公麟)
자는 정수(禎叟)이며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 윤인(尹仁)의 아들로 세종 19년(1437년) 태어났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몇 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성종 13년(1482년) 무과에 급제하여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가 되고,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興德縣監)·함열현감(咸悅縣監)·창평현감(昌平縣監) 등을 역임하면서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중종 4년(1509년) 졸(卒)하였다. 공은 여덟 명의 아들을 두게 되고 이름을 모두 자라별(鼈) 자에 해당하는 글자를 넣어 지었는데 모두 현달(顯達)하여 조선조 중엽 ‘8문장’으로 꼽히었다.
③ 이원(李黿)
자는 낭옹(浪翁)이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창평현감(昌平縣監) 공린(公麟)과 형조판서(刑曹判書) 박팽년(朴彭年)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 14년(1483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성종 20년(1489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그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봉상시(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이로 인하여 곽산에 유배(流配)되었다가 4년만에 다시 나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는『금강록(金剛錄)』·『재사당집( 再思堂集)』 등이 있다.
④ 이시발(李時發)
자는 양구(養久)이며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이다. 진사(進士) 대건(大建)과 부사직(副司直) 김도(金燾)의 따님인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선조 2년(1569년) 태어났다. 선조 22년(1589년)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를 접대하였고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으로도 활동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 유격장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해 정탐(偵探)하였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충청도순안어사(忠淸道巡按御史)로서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였다. 종전 후 성주목사(星州牧使)·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함경도(咸境道) 관찰사(觀察使), 예조(禮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참판(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廢妃論)을 반대하여 낙향하였다. 광해군 11년(1619년) 특명으로 5도(五道) 찬획사(贊劃使)를 맡아 평안도의 민폐(民弊)를 해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부체찰사(副體察使)로 진압군을 지휘하였고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정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졸(卒)하였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 《벽오유고(碧梧遺稿)》가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월파공(月坡公) 이재(李栽)의 후손은 이극명(李克明)이 명종 19년(1564년) 칠곡 황학(黃鶴)에서 다산면 호촌리로 입향하였다.
(2)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의 후손은 이인호(李仁鎬)가 선조 33년(1600년)경 한양(漢陽)에서 개진면 옥산2리 장정골에 입향한 후 증손자 이재호(李載浩)가 개진면 오사1리로 이거(移居)하였다.
(3) 소경공(小卿公) 이지회(李之會)의 후손은 이성호(李聖昊)가 선조 33년(1600년)경 청도군 이서면에서 쌍림면 고곡리로 입향하였다.
(4) 벽오공(碧梧公) 이시발(李時發)의 후손은 처사(處士) 이준곤(李埈坤)이 숙종 4년(1678년) 경기도 용인에서 처향(妻鄕)인 개진면 양전리로 입향하였고 그후 장증손(長曾孫) 진사(進士) 이회근(李晦根)이 정조 2년(1788년) 개진면 직리로 이거(移居)하였고 7대손 이영우(李英雨)가 1906년 쌍림면 합가2리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朝鮮時代)
① 이성일(李聖一)
자는 일지(一之)이고 호는 죽창(竹窓)이다. 처사(處士) 준곤(俊坤)과 호군(護軍) 정중(鼎重)의 따님인 고령김씨(高靈金氏)사이에서 숙종 6년(1680년)  태어났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선생과 함께 공부하였다. 향시(鄕試)에 3번 장원하고 영조 5년(1729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과거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며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가 극찬(極讚)하였다. 죽창문집(竹窓文集)이 전한다. 영조 28년(1752년) 졸(卒)하였다.
② 이사유(李思游)
자는 백심(伯深)이고 호는 돈와(遯窩)이다. 성균진사(成均進士) 성일(聖一)와 진사(進士) 선영(善韺)의 따님인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에서 숙종 27년(1701년) 태어났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의 문인이며 20세의 어린 나이에 일찍 문명(文名)이 세상에 알려졌고 일찍이 서울에 갔을 때 일가의 대부(大父)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 공이 지은 다수의 시문(詩文)을 보고 우리 문중에 이렇게 박학(博學)함은 드문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향시에 6번 합격하고 초시(初試)에 2번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영조 35년(1759년) 졸(卒)하였다. 저서로 돈와유고(遯窩遺稿) 2권이 전한다.
③ 이회근(李晦根)
자는 현보(顯甫)이며 호는 수백당(守白堂)이다. 사유(思游)의 장남으로 영조 4년(1728년) 태어났다. 일찍이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장을 일찌감치 깨쳤다. 영조(英祖) 30년(1754)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영조 48년(1772년)에 한방윤(韓邦胤)이 고령김씨 문중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에서 김면(金沔)의 시문(詩文)과 일기를 발견, 이를 최재억(崔載億)과 공이『제선생유집급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하여 후손들이 정조 9년(1785년) 이를 보충하여 송암실기(松庵實紀)를 편집, 간행하였다. 고령 유생(儒生) 대표로 고령향교(高靈鄕校) 이전(移轉) 정문(呈文)을 지었다. 향리(鄕里) 직동(直洞)의 직양재(直養齋)와 고령읍치(高靈邑治)내 미산서당(眉山書堂)에서 많은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저서로 수백당유고(守白堂遺稿) 2권이 전한다. 순조 9년(1809년) 졸(卒)하였다.
④ 이영우(李英雨)
자는 문칙(文則)이고 호는 은송(隱松)이다. 처사(處士) 종기(鍾基)와 치관(致寬)의 따님인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철종 4년(1853년) 태어났다. 조선 말 나라의 정국이 혼미(昏迷)하자 안산 계곡에 산정(山亭)을 짓고 주역(周易)·천문학(天文學) 등의 연구에 침잠(沈潛)하였다. 은송실기(隱松實記) 1권이 세상에 전한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동희(李東熙) : 대구시청 사무관
② 이재순(李在淳) : 국세청 과장
③ 이의호(李義鎬) : 해군 대령 예편
④ 이정웅(李政雄) : 해운항만청 해무감독관
⑤ 이재백(李在伯) : kt&g(전 한국담배인삼공사) 지점장
⑥ 이재판(李在判) : 국방부 사무관
⑦ 이재근(李在根) : 농협중앙회 고령군지부장
⑧ 이문호(李文鎬) : 영남대 교수, 공학박사
⑨ 이재형(李在亨) : 고령군 서기관, 대가야읍 읍장
⑩ 이삼호(李三鎬) :  KB국민은행 본부장, 준법감시인
⑪ 이재원(李在源) : KT(전 한국통신공사) 지사장
⑫ 이재록(李在祿) : (주) 포스코(POSCO) 부장
⑬ 이태호(李太鎬) : 경영학박사, 기업체 이사
⑭ 이길호(李吉鎬) : 육군 소령 예편
⑮ 이금호(李錦鎬) : 미국변호사
⑯ 이선호(李先鎬) : (주) 한화 재경부장
⑰ 이현호(李炫鎬) : 한의원 원장
⑱ 이봉호(李鳳鎬) : 공학박사. 포항공대 책임연구원
⑲ 이열호(李列鎬) : 공학박사, 삼성기술연구소 연구원
⑳ 이규호(李圭鎬) : 의학박사,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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