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 고령유씨(高靈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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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 고령유씨(高靈兪氏)

경송정(대가야읍 장기리 37-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始祖) 유삼재(兪三宰)


① 신라조(新羅朝)에 아찬(阿)을 역임했던 유삼재(兪三宰)이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을사보(乙巳譜)에 보면 자(字)와 호(號)는 전하지 않고, 세차(歲次) 역시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② 아찬(阿)은 신라 관계(官階) 중 6등위로 6두품(六頭品)은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한계(限界) 관계(官階 : 벼슬의 등급)를 말한다. 신라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를 구성한 신분이다. 골품제(骨品制)는 왕족 및 고위 귀족으로 이루어진 성골(聖骨), 진골(眞骨)과 하급 귀족인 두품(頭品) 층(層)으로 구분되었다.

 
(2)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유의신(兪義臣)이 신라의 운명이 다한 날을 당하여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머리를 조아려 항복(降伏)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전조(前朝 : 바로 전대의 왕조)의 세신(世臣 : 대대로 왕가를 섬기는 신하)으로서 유독 고려에 불복하자 그를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으로 신분을 강등(降等)시켰고 상계(上系) 선조들이 기계현(杞溪縣)에서 주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3) 절의(節義)를 숭상한 청족(淸族)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역사를 훑어보면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깨끗하지 못한 일로 더럽힌 이름인 추명(醜名)을 남긴 이가 더물다. 매사에 중용(中庸)을 취하여 조촐한 선비의 법도를 넘지 않았던 것이 시조 이래 가문의 전통이었다.


(4) 기계유씨(杞溪兪氏)와 고령유씨(高靈兪氏) 세계(世系)


① 1965년 기계유씨(杞溪兪氏) 을사보(乙巳譜) 간행시 세계표(世系表)를 보면  고령유씨(高靈兪氏)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에 편입되었다.
②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始祖) 유삼재(兪三宰)에서 고령유씨(高靈兪氏) 시조(始祖) 유보(兪甫)의 고조부 유진적(兪晋迪)까지는 ……으로 표시하여 대수(代數)의 계산이 불가능하고 계보(系譜)가 연속되지 않는 것으로 기록하여 상계(上系)가 불확실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③ 따라서 기계유씨(杞溪兪氏)와 고령유씨(高靈兪氏)는 세계(世系)가 다르며 문무과 시험 합격자의 명단인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에도 본관(本貫)이 달리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고령유씨(高靈兪氏)는 충효(忠孝), 시문(詩文), 필력(筆力)이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극찬한 유호인(兪好仁)과 동생 유호례(兪好禮) 등 2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문과방목(文科榜目)에 본관(本貫)이 고령(高靈)으로 기재되어 있다.


(5)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입보(入譜) 경위


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 1454년 편찬)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530년 편찬)의 고령현(高靈縣) 성씨(姓氏)편을 살펴보면 “신(申)·박(朴)·이(李)·유(兪)·김(金)·백(白)·정(鄭)”이 조선 시대(時代) 초기(初期)에 고령현(高靈縣)의 토착성(土着姓)인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중엽까지 기계유씨(杞溪兪氏)가 고령지역에 세거한 기록은 없고 다만 고령유씨(高靈兪氏)가 토성(土姓)으로 세거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② 조종운(趙從耘)이 17세기 중반까지 조선에 존재하던 538개 성관(姓貫)과 해당 성관(姓貫)이 배출한 인물들을 계대별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성씨 관련 문헌 인《씨족원류(氏族源流)》의 기계유씨(杞溪兪氏) 편을 보면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의 파조(派祖)인 유득주(兪得珠)는 자손이 없어 무후(无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③ 뇌계(溪) 유호인(兪好仁)의 아버지 유음(兪蔭)의 묘지명을 찬(撰)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유처사묘지명(兪處士墓誌銘)”에 의하면 유보(兪甫) 는 고령유씨(高靈兪氏) 시조(始祖)로서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올라 최초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어 고령(高靈)을 떠나 장남 유견백(兪堅伯) 이후 경파(京派)로 개경에 거주하였으나 그후 후손들은 장수(長水), 함양(咸陽) 등지로 이거(移居)하였다.
④ 장남 유견백(兪堅伯)의 동생으로 고령지방 세거 차자계열(次子系列) 중백(仲伯), 계백(季伯) 등 향파(鄕派) 후손들은 세대가 아득히 멀고 상계(上系) 연원에 관한 보계(譜系)를 실전(失傳)하여 1914년 유씨(兪氏)의 대종(大宗)을 이루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서 고려시대 주부(主簿) 벼슬을 하고 자손이 무후(无後)한 유득주(兪得珠)의 후예로 입보(入譜)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에 속하게 되었다.
⑤ 그러나 최근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문중에서는 실전(失傳) 되었던 보계(譜系)를 찾아 함양의 고령유씨(高靈兪氏) 뇌계(溪) 유호인(兪好仁) 집안이 장자계열(長子系列)이고 본 문중은 그 차자계열(次子系列)임을 알고 기계유씨(杞溪兪氏) 대동보(大同譜 : 2017년)를 수보(修譜 : 족보를 다시 수정함)할 때 고령유씨(高靈兪氏) 뇌계(溪) 유호인(兪好仁)의 상계(上系)를 수록하였고 차후 고령유씨(高靈兪氏) 수보(修譜)시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혈족(血族)으로 원적(原籍)을 찾아 고령유씨(高靈兪氏) 족보에 동참(同參)할 예정이다.
⑥ 따라서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문중이 고령유씨(高靈兪氏) 차자계열(次子系列)로 보계(譜系)가 확인됨에 따라 이하에서는 고령유씨(高靈兪氏) 세계(世系)를 준용(準用)하여 인물을 기록하기로 한다. 


(6)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고령군 관내에 기계유씨(杞溪兪氏) 주부공파(主簿公派)는 현재 약 60가구 150여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주부공파(主簿公派) 후손들은 대가야읍 내곡3리 속칭(俗稱) 시실, 쌍림면 월막리 속칭 산막골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으며 대가야읍 연조2리 속칭 봉두(鳳頭)골, 고아1리 등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고령유씨(高靈兪氏) 시조(始祖) 유보(兪甫) 이전 상계(上系)
▶ 원조(遠祖) 유적진(兪迪珎)은 고령 지방의 호장(戶長)를 지냈다.
고려시대 호장(戶長)은 수령(守令)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에서는 그곳의  입법, 사법, 행정을 전담하였던 실질적인 지배층이었다.
▶ 아들 유진적(兪晋迪), 손자 유송기(兪松奇)는 모두 동정(同正)을 지냈다.
• 동정(同正)은 서리(署理), 대리(代理), 섭정(攝政)과 같은 말로 고려시대 녹봉(祿俸)이 지급되지 않고 문반(文班)은 6품 이하, 무반(武班)은 5품 이하에게 제수(除授)되었던 실직(實職)이 아닌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 고려시대 ‘삼정일호(三丁一戶)’는 일가(一家)에서 향리(鄕吏)에 복무(服務)하는 자 3명 중에 한 아들은 향리(鄕吏)로 복무(服務)하는 임무(任務)를 면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 유진적(兪晋迪)의 아들 유송기(兪松奇)가 ‘삼정일호(三丁一戶)’에 의하여 향리의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유진적(兪晋迪)에게 세 사람의 장정(壯丁) 즉 아들이 3명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 것이다. 유송기(兪松奇)만 향리(鄕吏)에서 벗어나 동정(同正)을 지내고 경파(京派)로 분파(分派)되었으며 나머지 두 아들은 관향지(貫鄕地) 고령(高靈)에서 호장(戶長)을 세습하면서 향파(鄕派)로 남아 세거하였다.
▶증손자 유정수(兪定守)는 관직이 없고 현손 유세연(兪世連)은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냈다.
② 유보(兪甫)
직장동정(直長同正) 유세연(兪世連)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이 최초로 상경종사(上京從仕)하여 고려 때 조회(朝會)와 의례(儀禮)를 맡아보던 관아인 통례문(通禮門)의 지후(祗候)란 벼슬에 올라 고령유씨(高靈兪氏) 최초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었으며 시조(始祖)가 되었다.
③ 유견백(兪堅伯)
통례문(通禮門) 지후(祗候) 유보(兪甫)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때 무기의 제조를 관장하던 군기시(軍器寺) 소감(少監)을 지냈다.
④ 유신(兪信)
군기시(軍器寺) 소감(少監) 유견백(兪堅伯)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시대 군제(軍制)인 6위(六衛)의 하나로 도성문(都城門)을 경비하는 역할을 하였던 감문위(監門衛)의 무관직인 낭장(郎將)을 지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효우리 소재 강성우(姜聖遇)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만성보(萬姓譜)’에 의하면 고령유씨(高靈兪氏) 시조(始祖) 유보(兪甫)의 6대조 유연(兪淵)이 고려 중엽 ‘고령현리호장(高靈縣吏戶長)’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령유씨(高靈兪氏)의 고령 입향은 고려 중엽인 1220년경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유탄(兪)
여말(麗末)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나 고려조의 세신(世臣)으로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혁명을 일으킬 때 항거하고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급을 낮추어 고령현(高靈縣)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1941년 후손들이 대가야읍 장기리 37-2번지에 경송정(景松亭)을 세워 절의(節義)를 기리고 있다.
② 유경해(兪景海)
군자감정(軍資監正) 의(義)와 니산유씨(尼山劉氏) 사이에서 연산군 7년(1501년) 태어났다. 14세 때 그의 아버지 등창을 앓자 입으로 빨아내어 병이 차도(差度)가 있었으며 부모상을 당하여 2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3년간 여묘살이를 할 때 사나운 호랑이도 길들여졌다. 선조 22년(1589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1961년 ‘삼효자(三孝子) 세적비(世蹟碑)’를 세워 효행을 기리고 있다.
③ 유대신(兪大新)
사재감(司宰監) 참봉(參奉) 경민(景敏)과 출천지효(出天之孝) 광영(光榮)의 따님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사이에서 선조 2년(1569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제용감(濟用監) 첨정(僉正)을 지냈다. 졸(卒)년은 미상(未詳)이다.
④ 유세훈(兪世薰)
초휘는 세명(世蓂)이고 자는 훈혜(薰兮)이다. 처사 애신(愛新)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선조 16년(158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학질(瘧疾 : 말라리아)에 걸려 갑자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두껍게 언 얼음을 두드리며 통곡하자 물새가 날아와 물고기를 떨어뜨려 주었고 어머니가 두풍(頭風)을 앓고 있는데 비둘기가 약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목 놓아 큰 소리로 울자 매가 날아와 비둘기 한 마리를 떨어뜨려 주는 일이 있었다. 효행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인조 27년(1649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1961년 ‘삼효자(三孝子) 세적비(世蹟碑)’를 세워 효행을 기리고 있다.
⑤ 유정환(兪鼎煥)
자는 여경(汝慶)이며 처사 우주(宇柱)와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숙종 42년(1716년)에 태어났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께서 지병(持病)이 있으시니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시게 하였으며 여묘살이를 3년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1961년 ‘삼효자(三孝子) 세적비(世蹟碑)’를 세워 효행을 기리고 있다.
⑥ 유치순(兪致珣)
자는 관여(寬汝)이며 승지(承旨)를 증직(贈職)받은 계환(啓煥)과 시문(時文)의 따님인 거창신씨(居昌愼氏) 사이에서 순조 1년(1801년) 태어났다. 아들 진두(鎭斗)가 정3품 상주진(尙州鎭) 좌영장(左營將) 겸(兼) 토포사(討捕使)를 지내 귀(貴)하게 되었으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고종 10년(1873년) 졸(卒)하였다.
⑦ 유치황(兪致璜)
초휘는 황주(璜柱)이고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 서환(書煥)과 고령이씨(高靈李氏) 사이에서 정조 18년(1794년) 태어났다. 손자 봉준(鳳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주진(慶州鎭) 우영장(右營將)을 지내 귀(貴)하게 되어 사후(死後)에 좌승지(左承旨)를 증직(贈職) 받았다. 헌종 10년(1844년) 졸(卒)하였다.
⑧ 유진교(兪鎭敎)
초휘(初諱)는 교환(敎煥)이고 자는 문효(文孝)이다. 좌승지(左承旨)를 증직(贈職)받은 치황(致璜)과 혁방(爀邦)의 따님인 야성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순조 21년(1821년) 태어났다. 아들 봉준(鳳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경주진(慶州鎭) 우영장(右營將)을 지내 귀(貴)하게 되어 사후(死後)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고종 6년(1869년) 졸(卒)하였다.
⑨ 유진두(兪鎭斗)
자는 방언(邦彦)이며 호는 관남(觀南)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받은 치순(致珣)의 장남으로 헌종 5년(1839년)에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상주진(尙州鎭) 좌영장(左營將) 겸(兼) 토포사(討捕使)를 지냈다. 고종 29년(1892년) 졸(卒)하였다.
⑩ 유봉준(兪鳳濬)
초휘(初諱)는 치봉(致鳳)이고 자는 성일(聖一)이다. 유생(幼生) 진교(鎭敎)와 영모(永模)의 따님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헌종 8년(1842년) 태어났다. 고종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경주진(慶州鎭) 우영장(右營將)을 지냈다. 광무 7년(1903년) 졸(卒)하였다.
⑪ 유경순(兪擎淳)
자는 경욱(敬旭)이며 호는 긍포(肯圃)이다. 유생(幼生) 진규(鎭奎)와 유준(有駿)의 따님인 팔계정씨(八溪鄭氏) 사이에서 철종 11년(1860년) 태어났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중추부(中樞府) 의관(議官)을 지내고 고성군수(固城郡守)를 지냈다. 1932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인물
① 유강식(兪壃植, 1885년) : 초대 고령면장
② 유우식(兪佑植, 1890년) : 신간회 고령지회 집행위원장, 계몽운동가
③ 유민식(兪敏植, 1903년) : 고령 향교 제17대 전교(典校)
④ 유상호(兪尙浩, 1915년) : 경상북도 초대 도의원, 대구서중고 재단이사장
⑤ 유병석(兪炳奭, 1917년) : 계명대 교수, 시인
⑥ 유옥식(兪玉植, 1926년) : 고령군청 산업과장
⑦ 유병훈(兪炳壎, 1930년) : 육군소장, 군장회사(軍裝會社) 사장
⑧ 유병태(兪炳台, 1930년) : 신라금융투자 대표이사
⑨ 유병규(兪炳圭, 1942년) : 고령문화원 원장, 고령새마을금고 이사장
⑩ 유윤철(兪允喆, 1947년) : 에이치설퍼 회장, 한국중소기업경영자협회 회장
⑪ 유윤재(兪允在, 1951년) : 치과의사
⑫ 유윤재(兪閏在, 1952년) : 경북대 사대 수학과 교수
⑬ 유홍재(兪弘在, 1952년) : 정형외과 전문의
⑭ 유흥재(兪興在, 1954년) : 대구시 건축사회 제17대 회장
⑮ 유영아(兪英雅, 1954년) : 대구대 간호학과 교수, 대구 남구보건소장 
⑯ 유형재(兪亨在, 1955년) : 산부인과 전문의
⑰ 유경재(兪俓在, 1957년) : 정형외과 전문의
⑱ 유병훈(兪炳勳, 1964년) : 안동대 사대 수학과 교수
⑲ 유오재(兪五在, 1966년) : 총경, 성주 및 달성 경찰서장
⑳ 유인재(兪仁在, 1968년) : 영남이공대 교수,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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