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昌寧成氏) 회곡공파(檜谷公派), 정절공파(貞節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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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창녕성씨(昌寧成氏) 회곡공파(檜谷公派), 정절공파(貞節公派)

영암재(성산면 강정길 31-9)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


①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중윤(戶長中尹) 지낸 성인보(成仁輔)이다. 호장 중윤(戶長中尹)은 고려시대 향직(鄕職)의 품계(品階) 중 9품에 속하는 관직(官職)으로 16등급이다.
② 성인보(成仁輔)의 아버지는 성숙생(成叔生)이고, 신라 대관(大官) 성저(成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씨약사(成氏略史)』에는 시조 성인보(成仁輔)가 고려 고종 때 성씨(成氏)라는 성(姓)을 사용하기 시작(創成)하였다고 한다.
③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상계(上系)는 창녕(昌寧) 지방에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가지고 고을을 다스렸던 호족(豪族)으로 추정된다.


(2) 충절(忠節)과 효행(孝行)을 대표하는 가문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킨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 단종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死六臣)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생육신(生六臣)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등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忠臣)을 배출하여 충절(忠節)과 효행(孝行)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3) 분파(分派)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의 손자 판도판서(版圖判書) 성공필(成公弼), 도첨의문하찬성사(都僉議門下贊成事) 성한필(成漢弼) 형제 대에서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의 두 계통으로 갈라졌다. 길을 가운데 두고 윗, 아래 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지며 그후 6세에서 13개로 분파(分派)되었다.
① 성공필(成公弼)의 후손은 판서공파(判書公派)·독곡공파(獨谷公派)·회곡공파(檜谷公派)·상곡공파(桑谷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정절공파(貞節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좌랑공파(佐郞公派)의 10개 파로 분파되었고,
② 성한필(成漢弼)의 후손은 평리공파(評理公派)·검교공파(檢校公派)·지사공파(知事公派)의 3개 파로 분파되었다.
(4) 창녕성씨(昌寧成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창녕성씨(昌寧成氏)는 57가구 1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의 후손들은 다산면 나정리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회곡(檜谷) 성석용(成石瑢)의 후손들은 성산면 강정리에,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의 후손들은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玉山)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성송국(成松國)
•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고 하나 공의 현손인 총부상서(摠部尙書) 성준득(成準得)의 호구(戶口)에는 군기감(軍器監)으로 기록되어 있어 실직(實職)은 군기감(軍器監)이다.
• 성인보(成仁輔)는 매년 정초(正初) 지방관리의 임무로서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히 여기어 경건하게 절하는 행위인 예궐숙배차(詣闕肅拜次) 정조사(正朝使)로 송경(松京 : 개성)에 갔다가 병을 얻어 아들 성송국(成松國)이 엄동설한(嚴冬雪寒) 중에 시신(屍身)을 업고 현풍현에 이르렀을 때 대설(大雪)이 내려 청산원(靑山院)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오니 눈 위에 호랑이 발자취가 보이므로 이를 따라 창녕에서 10리 떨어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麥山)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장례(葬禮)하였다고 한다. 공(公) 이후에 가문(家門)이 대창(大昌)하였는바 세인(世人)들은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孝感所致)이라고 한다.
② 성공필(成公弼)
품계는 봉선대부(奉善大夫)이고 실직(實職)은 고려 후기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잔치를 맡아보던 관아(官衙)인 전객시(典客寺)에 딸린 정4품 관직인 전객부령(典客副令)을 지낸 것으로 공의 손자 총부상서(摠部尙書) 성준득(成準得)의 장적(帳籍 :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③ 성군미(成君美)
품계는 봉상대부(奉常大夫)이고 실직(實職)은 고려 후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인 판도사(版圖司)에 속한 정4품 관직인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냈다.
④ 성여완(成汝完)
초휘(初諱)는 한생(漢生)이며 다른 책에는 한국(漢匡)으로 되어 있으며 호는  이헌(怡軒)이며 별호(別號)는 송창(松窓)이다. 판도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와 삼사우윤(三司右尹) 천()의 따님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 사이에서 충선왕 1년(1309년) 태어났다. 충숙왕 복위 5년(13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춘추관검열(藝文館春秋館檢閱)에 제수(除授)되고 여러번 전직(轉職)하여 군부정랑(軍簿正郞)과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공민왕 20년(1371년) 민부상서(民部尙書)로 있을 때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 당류(黨類)로 지목되어 유배(流配)되었다가 우왕 4년(1378년)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다시 발탁되었다.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하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抱川)의 왕방산(王方山) 계류촌(溪流村)에 은둔(隱遁)하면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니 왕씨(王氏)가 있던 곳을 연모(戀慕)한다는 뜻이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시중(檢校 門下侍中)에 임명,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이 되었다. 태조 6년(1397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과 해남의 금성사(琴城祠), 진안의 옥천사(玉川祠)에 제향(祭享)되고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에 부조묘(不祧廟)인 문현사(文顯祠)가 있다.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성석린(成石璘)은 영의정(領議政), 성석용(成石瑢)은 개성유후(開城留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戶曹判書)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⑤ 성사제(成思齊)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정승(左政丞) 유득(有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훤재(不諼齋) 신현(申賢)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여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다하고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낭장(郎將) 향(嚮)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부인과 헤어지면서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 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는 시를 읊조리고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 성두(成杜)를 데리고 창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동지들과 함께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고려왕조에 절의(節義)를 지키니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으로 추앙(推仰)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과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되고 고종 8년(1871년) 정절(貞節)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2) 조선시대
① 성석용(成石瑢)
자는 자옥(自玉)이고, 호는 회곡(檜谷)이다.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여완(汝完)과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천부(天富)의 따님 경안택주(慶安宅主) 금성나씨(錦城羅氏) 사이에서 공민왕 1년(1352년) 태어났다.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의 증조부이다. 우왕(禑王) 2년(1376년)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 공양왕 때 대언(代言)·지신사(知申事)·밀직부사(密直副使)·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대사헌(大司憲)·개성유후(開城留後)·예문각(藝文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지냈다. 태조 7년(1398년)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오승포(五升布 : 한 폭에 날실 4백 가닥을 넣어 짠 베)가 무거워서 운반하기가 어려우므로 촘촘히 짠 10척(尺)을 1필로 삼도록 왕에게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글씨를 잘 썼으며, 말수가 적고 직책에 성실하였다. 태종 3년(1403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② 성개(成槪)
자는 평중(平仲)이고 호는 수헌(睡軒)이다. 예문각(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성석용(成石瑢)과 사온승(司醞丞) 성리(成利)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종 16년(1416년) 병신(丙申)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한 후 세종 1년(1418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경연(經筵)의 시강관(侍講官)이 되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이어서 예조참의(禮曹參議)·호조참의(戶曹參議)·이조참의(吏曹參議)·황해감사(黃海監司), 동지총제(同知摠制)·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세종 10년(1428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어 표전사은사(表箋謝恩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후 공조우참판(工曹右參判)·경기도관찰출척사(京畿道觀察黜陟使)로 임명되었다. 세종 22년(1440년) 졸(卒)하였다.
③ 성희(成熺)
자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인재(仁齋)이다. 병조참판(兵曹參判) 성개(成槪)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가실(朴可實)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식과 덕망으로 천거되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에 제수되었다. 문종 1년(1450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가 되었다. 문종 2년(1452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고 이어 단종 2년(1454년)에는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세조 2년(1456년) 당질(堂姪)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상왕(上王)인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처형당할 때 연루(連累)되어 10여 차례나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뒤에 풀려나 공주(公州) 달전(達田)으로 돌아왔으나 비분(悲憤)한 마음에 병이 되어 세조 4년(1458년) 졸(卒)하였다. 손자 성몽정(成夢井)이 귀(貴)하게 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집(仁齋集)』이 있다.
④ 성담로(成聃老)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성희(成熺)와 참찬(參贊) 안성공(安成公) 견기(堅基)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하나인 충좌위(忠佐衛)에 딸린 군대(軍隊)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자제(子弟)로 편성(編成)되었던 충찬위(忠贊衛)를 지냈다. 생육신(生六臣)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의 친동생이며 사육신(死六臣)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의 6촌 동생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후손들이 1979년 공의 행적(行蹟)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 영암산 기슭에 소재한 ‘영암재(迎巖齋)’ 경내(境內)에 ‘유적비(遺蹟碑)’를 세웠다.
⑤ 성철(成轍)
판관(判官) 근례(近禮)의 아들로 태어났다. 벼슬은 조선 시대에 군수품(軍需品)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인 군자감(軍資監)의 종5품 관직인 판관(判官)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삼형제와 누이 한 분과 함께 맥산(麥山)에 살았는데 공의 장례를 치르기 전에 두 중(僧)이 여기를 지나면서 아무 곳에 선인(善人 : 선량한 사람)을 위하여 아끼고 감추어 둔 땅이 있다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나무꾼이 엿듣고 귀가하여 고하자 마침내 거기에 안장(安葬)했다는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독곡공파(獨谷公派) 성풍세(成豊世)가 선조 25년(1592년) 성주에서 다산면 나정리(羅亭里)에 입향하였다.
(2) 회곡공파(檜谷公派) 참봉(參奉) 성억(成億)이 임진왜란(1592년) 전후(前後) 성주에서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江亭里)에 입향하였다.
(3) 정절공파(貞節公派)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事) 성록(成祿)이 1600년도 초기 선향지(先鄕地) 현풍(玄風)에서 고령(高靈)으로 입향하여 개진면 구곡리에 시거(始居)하다가 현손(玄孫) 남해현령(南海縣令) 성몽룡(成夢龍)이 정조 14년(1790년)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玉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성희례(成希禮)
자는 성의(聖義)이고 참봉(參奉) 억(億)과 광주이씨(光州李氏) 사이에서 명종 19년(1564년) 태어났다.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을 지냈다. 인조 3년(1625년) 졸(卒)하였다.
② 성희수(成希壽)
참봉(參奉) 담(淡)과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선조 2년(1569년) 태어나 참봉(參奉)을 지냈다. 인조 7년(1629년) 졸(卒)하였다.
③ 성계조(成繼祖)
자는 여휘(汝輝)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난(蘭)과 신령박씨(新寧朴氏) 사이에서 인조 3년(1625년) 태어났다.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숙종 25년(1699년) 졸(卒)하였다.
④ 성하윤(成夏胤)
자는 술보(述甫)이며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계조(繼祖)와 경민(敬民)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효종 2년(1651년) 태어났다. 숙종 2년(167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숙종 36년(1710년) 졸(卒)하였다.
⑤ 성몽룡(成夢龍)
자는 내서(來瑞)이고 증(贈) 공조참판(工曹參判) 태봉(泰封)과 영천최씨(永川崔氏) 사이에서 영조 8년(1732년) 태어났다. 영조 47년(1771년) 식년(式年)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부사용(副司勇)·별순초관(別巡哨官)·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 등을 거쳐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정조의 생부(生父)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의 이장(移葬)에 지관(地官)으로 참여하는 등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았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⑥ 성한봉(成漢鳳)
자는 국로(國老)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지풍(之豊)과 시정(寺正) 진해(震海)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정조 8년(1784년) 태어났다. 순조 11년(1811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관력(官歷)은 미상(未詳)이다. 순조 20년(1820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성낙계(成洛癸 1931년) : 농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동 대학원장
② 성정용(成政鏞 1942년) : 인천광역시 세무사
③ 성기술(成耆述 1945년) : 육군 중령, 육군본부 감찰부
④ 성목용(成木鏞 1946년) : 제5대 후반기 고령군 군의회 회장
⑤ 성덕모(成德模 1948년) : 검찰청 수사관, 법무사
⑥ 성낙수(成洛洙 1952년) : 농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⑦ 성낙권(成樂權 1952년) : 대구시청 사무관, 상중이동장
⑧ 성헌모(成憲模 1954년) : 육사졸, 육군 소령
⑨ 성원환(成元煥 1957년) : 대가야읍발전협의회 회장, 제8대 고령군의원 
⑩ 성창모(成昌模 1958년) : 국제대학교 교수
⑪ 성형모(成亨模 1958년) : 삼성증권 서대구지점장
⑫ 성중모(成仲模 1962년) : 육군대학졸, 육군 소령
⑬ 성기종(成耆宗 1965년) : CJ제일제당 부장, ㈜엘케이물류 상무
⑭ 성기열(成耆洌 1967년) : 공학박사,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⑮ 성애경(成愛慶 1968년) : 수원지법 사법보좌관
⑯ 성애영(成愛榮 1969년) : 공인회계사
⑰ 성승락(成承洛 1972년) : 변호사
⑱ 성훈석(成訓錫 1992년) : 부천성모병원 정형외과 의사

자료제공 : 후손 성낙동(成洛東), 성기은(成耆殷)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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