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강서원(老江書院) 상편(上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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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노강서원(老江書院) 상편(上偏)

노강서원(다산면 다산로 92)

 

1. 노강서원(老江書院) 명호(名號) 유래(由來)

(1) 속칭 ‘하로다 마을’에서 ‘상로다 마을’로 향하는 좌측 강변도로측 낙동강 강변의 야산 경사진 곳인 고령군 다산면 다산로 92(송곡리 945번지)에 위치한 노강서원(老江書院)은 지역 신출(新出) 노론(老論)이 주도(主導)하고 중앙 노론(老論)과 관권(官權)의 협조하에  숙종 38년(1712년) 영당(影堂)으로 건립된 다음, 영조 16년(1740년) 노강서원(老江書院)으로 승격됨으로써 서원 기반 구축이 이루어졌다. 노강서원(老江書院)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노론계(老論系) 핵심인물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등을 배향(配享)한 서원이며 고령지역에서는 현종 7년(1666년) 세워진 도암서원(道巖書院), 숙종 33년(1707년) 세워진 매림서원(梅林書院)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註釋) 주벽(主壁)
사당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 중에서 주장되는 위패를 뜻한다
 
(2) 숙종 1년(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숙종 6년(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은 사건인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같은 해 6월 거제도(巨濟島)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기 위하여 돌아올 때 현재 다산면 송곡리 인근 낙동강 가에 도달하였는데 이 지역의 노인들이 선생을 환영하여 경의를 표(表)하러 온 사람이 많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인들이 많은 동네” 즉 노다촌(老多村)라고 한 것과 낙동강(洛東江) 변(邊)에 위치하기 때문에 ‘노강(老江)’이란 명호(名號)를 취한 것에 연유(緣由)하여 노강서원(老江書院)이라고 칭한다.

(註釋)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숙종 6년(1680년) 남인(南人)의 영수(領袖 :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의 집에 조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치가 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숙종이 잔치에 쓰게 하려고 유악(油幄 : 기름 먹인 천막으로, 임금만 사용하던 것)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가져가서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君權)을 서인에게 넘기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도 한다.

2. 설립배경 및 건립 주체세력


(1) 설립배경
노론(老論)이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확립 후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점(據點) 중 하나이었던 성주(星州)지역 내 자파세력(自派勢力)의 부식(扶植)과 향내(鄕內) 남인계(南人系) 사족(士族)과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감(存在感)과 향권(鄕權) 문제 등을 매개로 향촌사회(鄕村社會)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던 서원(書院) 설립을 통해 그러한 정치적(政治的) 목적을 관철(貫徹)하고자 노강서원(老江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註釋) 전제정치(專制政治)
국가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여 민의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실시하는 정치를 말하며 민주주의(民主主義)·입헌주의(立憲主義)·공화제(共和制)의 반대개념이다

(2) 건립 주체세력
성주 벽진이씨(碧珍李氏) 가문의 청간당(聽澗堂) 이지완(李志完)과 고령 다산 곽촌리 거주 수성나씨(壽城羅氏) 가문의 송오(松塢) 나학순(羅學洵)을 비롯하여 고령 다산면 벌지리의 파평윤씨(坡平尹氏), 성주 수륜면 오천리 「오산(午山)」의 순천박씨(順天朴氏), 성주 가천면 창천리 「천평(泉坪)」의 성주이씨(星州李氏), 성주 가천면 화죽리 「죽곡(竹谷)」의 성산이씨(星山李氏), 성주군 대가면 대천2리 「장전(長田)」의 밀양박씨(密陽朴氏),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 「비곡(非谷)」의 동래정씨(東萊鄭氏), 성주군 대가면 대천1리 「후동(後洞)」의 의성김씨(義城金氏) 등 10개 가문이 연대하였다. 

(註釋) 「」는 노강서원 건립 주체세력이 그 당시 살았던 마을 이름을 표시한 것이다.


3. 연혁

(1) 숙종 28년(1702년) 화순현감(和順縣監)을 지낸 벽진이씨(碧珍李氏) 가문의 이지완(李志完)과 수성나씨(壽城羅氏) 가문의 석유(碩儒) 송오(松塢) 나학순(羅學洵) 등이 건립추진 세력이 되어 서원(書院) 건립을 발의(發議)하였다.
(2) 그 당시 서원(書院)의 남설(濫設)이 행해지자 조정에서는 첩설금령(疊設禁令)을 내려 이미 제향 된 인물들을 다시 중첩(重疊)으로 제향(祭享)하는 것을 금지하자 이를 회피(回避)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서원 건립추진 발의 10년 만인 숙종 38년(1712년) 2월 ‘노강영당(老江影堂)’으로 건립하였다.

(註釋) 첩설금령(疊設禁令)
특정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여러 군데 설립하지 못하도록 조정에서 규제 조치를 취해 이를 어길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음.(3) 영조 16년(1740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익하(鄭益河)의 지원으로 노강영당(老江影堂)이 노강서원(老江書院)으로 승격(昇格)하였다.
(4) 고종 5년(1868년)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서원은 훼철(毁撤)되고 기존 건물에 ‘산앙재(山仰齋)’란 편액(扁額)을 걸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5) 1927년 7월 노강서원(老江書院)을 복원하였으나 6.25 전쟁 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그후에 복원하였다.

4. 건축형태 및 현황


(1) 입구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가운데 1칸은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보인다. 온돌방은 ‘ㄷ’자형으로 꾸몄고 가운데 2칸은 대청을 놓았다.
(2) 서원 내에는 4칸의 강당(講堂)인 산앙재(山仰齋)만 남아 있으며 사당(祠堂)은 없다. 이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儒林)의 화합(和合) 및 학문(學問) 강론(講論)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3) 노강서원(老江書院)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은 강당 안쪽 정면의 ‘노강서당(老江書堂)’, 정문의 ‘경행문(景行門)’, 강당 앞면 정면에 ‘산앙재(山仰齋)’, 파평(坡平) 윤병억(尹炳億)의 ‘노강서당기(老江書堂記)’, 성산(星山) 이철희(李哲熙)의 ‘노강서당상량문(老江書堂上樑文)’ 등이 있다.
(4) 대구의 백이방(白吏房)이 훼철(毁撤)된 노강서원(老江書院) 자리에 묘를 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담장 바깥쪽에 세운 ‘우암송선생타령유허비(尤菴宋先生妥靈遺墟碑)’가 있다.

(註釋) 타령(妥靈)
신주(神主)를 사당에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받듦

5. 노강서원 규약(規約)


(1) 회원
본 서원의 회원은 경상북도 성주군, 고령군 양 지역 24개 문중(당초 노강서원 시대)의 선조 후예자로 한다.
(2) 임원
원장(院長) 1명, 도청(都廳) 2명 정도, 내감(內監) 1명, 감사(監事) 2명을 둔다.
(3) 향사(享祀) 봉행(奉行)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로 한다.

6. 배향인물(配享人物)
(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아명(兒名)은 성뢰(聖賚)이며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갑조(甲祚)와 봉사(奉事) 곽자방(郭自防)의 따님인 선산곽씨(善山郭氏) 사이에서 선조 40년(1607년) 외가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伊院面) 용방리(龍防里) 구룡촌(九龍村)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동문수학(同門受學)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이다. 인조 11년(1633년) 계유(癸酉)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인조 15년(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禮法)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落鄕)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田野)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인조 27년(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진선(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공이 올린「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長文)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力說)한 것이 효종의 북벌(北伐)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北伐計劃)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金自點)의 무리들이 청나라에 효종이 북벌을 꾀하려 한다고 밀고(密告)를 하자 산당파(山黨派)의 우두머리이었던 공은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충주목사(忠州牧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이조참의(吏曹參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효종 9년(1658년) 7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찬선(贊善)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북벌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효종 10년(1659년) 9월 효종의 급서(急逝)로 북벌계획이 중지되고 조대비(趙大妃)의 예송(禮訟) 문제 등으로 12월 낙향(落鄕)하였다. 현종 9년(1668년) 우의정(右議政)에, 현종 14년(1673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在野)에 머물러 있었다. 1674년에 효종비(孝宗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논의되자, 그의 의견을 따르는 서인(西人)은 대공복(大功服 : 9개월복)을 주장하고 남인(南人)은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주장하였는데,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자 양사(兩司)의 논핵(論劾)을 받아 파직(罷職) 삭출(削黜)되었다. 1675년(69세) 숙종 1년 정월에 앞서의 예송(禮訟) 때에 예를 그르친 죄를 물어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경상도 장기(長鬐), 거제(巨濟)로 옮기고, 1680년 5월에 다시 청풍(淸風)으로 옮기는 명을 받았으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다시 집권하자 이해 6월에 석방되어 귀향하였고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겸(兼)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임명되었다. 제자 윤증(尹拯)의 아버지의 묘비에 쓰는 글인 묘문(墓文) 문제로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서인(西人)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는 호승지벽(好勝之癖)과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경향이 많은 성격의 결함에도 기인(基因)한 바가 있다. 1683년(77세)에 벼슬을 내놓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은퇴 후 청주의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였다. 1689년(83세) 정월에 훗날 경종이 된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에게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자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상소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여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는 길에 그해 6월 8일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는데 문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을 주어 ‘만동묘(萬東廟)’를 화양동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모화사상(慕華思想) 고취(鼓吹)에 있어서 2대 주창자(主唱者)라고 일컫는다. 사후 5년 만인 숙종 20년(1694년)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해에 수원, 정읍, 충주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고, 이듬해에 문정(文正)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이후로 덕원(德源), 화양동(華陽洞)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70여 곳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1744년 영조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정조에 의해 효종의 묘정(廟庭)에 추향(追享)되었다. 공의 학문은 주자(朱子)와 이이(李珥)의 정통 학맥을 잇고 김장생(金長生)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이(李珥)의 성리학(性理學)과 송익필(宋翼弼)의 예학(禮學)을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을 통해 전수(傳受)받아 기호(畿湖) 유학(儒學)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 그는 공자, 맹자, 주자의 철학적 핵심이 ‘직(直)’에 있다고 이해하고 이 직(直)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禮)’를 강조하는 한편, 직(直)을 살현하기 위한 목표로서 의리(義理)를 강조하여 그의 의리(義理) 사상은 직(直)과 의(義)와 예(禮)가 하나로 연결되어 일체를 이루고 있음에 그 특징이 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은 숙종 43년(1717년) 왕명에 따라 간행된 『우암집(尤菴集)』이 있으나 그후 보완된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註釋 1)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 : 오랑캐 도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
▶ 춘추대의(春秋大義)
유학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춘추(春秋)에서 말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나 본분을 말한다.

(註釋 2)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 오랑캐에게 당한 복수를 갚아 수치를 씻고자 한다.

(註釋 3) 북벌계획(北伐計劃)
병자호란의 수모(受侮)와 오랫동안 선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있던 자신의 한(恨)을 씻고자 이완, 송시열 등과 함께 청나라를 치려고 한 계획을 말한다.

(註釋 4) 삭출(削黜)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음

(註釋 5)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1694년) 서인(西人)들이 전개하던 폐비(廢妃) 민씨(閔氏)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복위운동(復位運動)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을 말한다.

(註釋 6) 만동묘(萬東廟)
숙종 15년(1689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임금으로부터 사약(賜藥)을 받은 뒤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병자호란 때 의를 지킨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을 당부해 건립한 사당이다.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하여 고종 2년(1865년) 철폐(撤廢)하였다.

(註釋 7) 호승지벽(好勝之癖)
남과 겨루어서 꼭 이기기를 남달리 즐기는 성벽(性癖)

(註釋 8) 모화사상(慕華思想)
중국(中國)이나 중국(中國) 것을 섬기며 따르려는 사상(思想)

자료제공 : 내감 나종근(羅宗根)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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