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배씨(星山裵氏)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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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성산배씨(星山裵氏)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四현 유지비(덕곡면 노리2길 64-3)>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지타(祗沱)로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촌 중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으로 다른 5부 촌장(村長)들과 함께 기원전 57년 갑자년(甲子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 초대(初代) 왕(王)으로 추대(推戴)한 공(功)으로 신라개국좌명일등원훈공신(新羅開國佐命一等元勳功臣)이 되었으며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올랐다. 유리왕 9년(32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을 한지부(漢祗部)로 승격시키고 배씨(裵氏)를 사성(賜姓)받게 되면서 모든 배씨(裵氏)의 시원(始原)이 되어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배지타(裵祗沱)에 연원을 두며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세거지(世居地)와 선조(先祖)의 작호(爵號)를 따라 경주배씨(慶州裵氏)에서 분성(盆城), 성주(星州),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등으로 분관(分貫)하였다.


(2) 성산배씨(星山裵氏) 시조(始祖) 배위준(裵位俊)


고려 건국공신(建國功臣)인 태사(太師)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이후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정조 24년(1800년) 경신년(庚申年)에 발간된 성산배씨 파보(派譜)부터 고려 중엽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을 지낸 배위준(裵位俊)을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시조(始祖)로 모신다.


(3) 성산배씨(星山裵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


①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서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② 성산배씨(星山裵氏)는 신라 개국(開國) 원훈(元勳)을 세운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와 고려 개국(開國) 원훈(元勳)을 세운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의 뒤를 이어 조선 개국(開國)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 등으로 인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칭(稱)을 받게 되었다.

(註釋) 원훈(元勳)
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을 뜻한다.


 (4) 성산배씨(星山裵氏)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세계(世系)


① 시조(始祖) 배위준(裵位俊)의 현손(玄孫)인 5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아들 6세 배문적(裵文迪), 배무적(裵武迪) 형제로 갈리어져 크게 번창하였으며, 
② 8세 배진손(裵晋孫)의 아들인 9세 장남 배규(裵規)의 화당공파(花堂公派), 차남 배구(裵矩)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삼남 배현(裵俔)의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分派) 되었으며
③ 다시 9세 배현(裵俔)의 7세손 배덕문(裵德文)의 아들 사형제 중 장남 배설(裵楔)은 병판공파(兵判公派), 차남 배건(裵楗)은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삼남 배즙(裵楫)은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사남 배역(裵櫟)은 주부공파(主簿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5) 성산배씨(星山裵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산배씨는 123가구 31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낸 배선보(裵善輔)의 후손은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배번(裵藩)의 후손은 덕곡면 본리리 승암(承巖)마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던 배즙(裵楫)의 후손은 덕곡면 노2리 서유재 마을에, 진사(進士)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후손은 개진면 인안2리에 세거하고 있다. 그밖에 배극렴(裵克廉)의 후손은 개진면 반운동에, 배윤조(裵胤遭)의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배문회(裵文繪)의 후손은 운수면 화암리에, 배환극(裵煥克)의 후손은 운수면 월산리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배인경(裵仁慶)
 상서좌복야(尙書左僕寺) 원서(元舒)와 태전(太傳) 원순(元淳)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서원한씨(西原韓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아가며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학업에 나아갔는데 학문이 숙성(夙成)하여 13세 때 벌써 문장이 뛰어났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선임되었는데, 숭문전(崇文殿)에서 임금을 모시고 숭문전 첨지(僉知) 신맹섭(申孟攝), 승선(承宣) 김구락(金九洛), 기거주(起居注) 이당진(李唐珍), 사업(司業) 박규두(朴奎斗) 등과 더불어 홍범(洪範)과 예기(禮記), 월령(月令)과 중용(中庸)을 강의(講義)하였는데 공의 해석이 매우 정밀하다 하여 임금이 금 이십 냥과 비단 열 필을 하사하니 그때 공의 나이가 28세였다.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충렬왕(忠烈王) 어전에서 왕명(王命)으로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충선왕(忠宣王)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러 공이 연로하므로 사직(辭職)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충선왕이 이르기를 “경은 누대(累代)에 걸친 공신(功臣)의 자손(子孫)이고, 또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은 노신(老臣)으로서 지금 어찌하여 짐을 멀리하려 하는가.” 하고 궤장(几杖 :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공이 다시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마지못해 이를 윤허(允許)하고 공(公)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緣由)로 성주(성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던 수관조(受貫祖 : 관향을 받은 조상)가 되었다. 후손들은 재실인 흥덕재(興德齋)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유업(遺業)을 추모하고 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註釋) 숙성(夙成)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육체적 발육(發育)이 빨라 어른스러움을 뜻한다.
② 배용성(裵用成)
추밀원(樞密院)에서 벼슬을 하였던 문적(文迪)의 장남으로 고려 시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軍事機密)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③ 배진손(裵晋孫)
자는 사려(士麗)이고 호는 아당(我堂)이다. 추밀원사(樞密院事) 용성(用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판공부사(判公部事)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배치(裵絺)
처사(處士) 웅(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좌도수군만호( 慶尙左道水軍萬戶)를 지내고 네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냈다. 집은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였고 좋은 의복을 기까이 하지 않아 그 시대에 청백(淸白)하다는 명성(名聲)을 떨쳤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② 배윤후(裵允厚)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좌도수군만호(慶尙左道水軍萬戶) 치(絺)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때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 부산진관(釜山鎭管) 오포만호(烏浦萬戶)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③ 배덕문(裵德文)
자는 숙회(叔晦)이고 호는 서암(書巖)이다. 중종 12년(1525년) 경릉참봉(敬陵參奉) 주(綢)와 세무(世茂)의 따님인 단인(端人)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중종 20년(1525년) 태어났다. 열 살 때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동향(同鄕)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은 현우(賢友 : 어진 벗)이었다. 명종 8년(1553년)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한성서윤(漢城庶尹)을 거쳐 언양현감(彦陽縣監), 영덕현감(盈德縣監), 울산군수(蔚山郡守), 고부군수(古阜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의병(義兵)을 일으킨 공에게 ‘제독(提督)’의 직무를 주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앞잡이가 된 중(僧) 찬희(賛熙)가 성주목사(星州牧使) 제 말(諸 沫)을 죽이고 스스로 목사(牧使)가 되어 성주의 백성들을 도륙(屠戮)하려고 하자 중(僧) 찬희(賛熙)를 찔러 죽였다. 그 때에 개령(開寧)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이 칠석(七夕)을 기하여 성주를 약탈(掠奪)하려 하자 길목에 매복하여 그 장수 흑전구(黑甸句)를 베어 대검(大劒) 두 자루와 금부채 하나를 노획하였다. 그로부터 성주가 편안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除授)되었다. 선조 36년(1603년) 졸(卒)하였다. 고종 10년(1873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증직(贈職)받았다. 후손들이 1920년 대가면 도남동 뒷개마을에 이만규(李晩)가 근찬(謹撰)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除授)되었던 서암공(書巖公) 배덕문(裵德文)의 셋째 아들로서 선무사(宣撫使)를 지낸 배즙(裵楫)이 선조 3년(1570년)경 선향지(先鄕地)인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 광대원(廣大院)에서 가야산의 3부 능선에 자리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明谷) 즉 서우재로 입향(入鄕)하여 그 후손들이 450여 년간 이곳에서 세거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배즙(裵楫)
자는 통중(通衆)이고 호는 명암(明菴)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된 덕문(德文)과 참군(參軍) 거추(巨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선산백씨(善山白氏) 사이에서 명종 19년(1564년) 셋째 아들로 현재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 광대원(廣大院)에서 태어났다. 공은 선조 23년(1590년) 무과(武科) 별과(別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訓練院) 습독(習讀)에 오르고 사직(司直)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성주의 부상현(扶桑峴), 고령의 개산포(開山浦)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행재소(行在所)로부터 선무사(宣撫使)를 제수받았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백형(伯兄) 설(楔)을 도와서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閑山島)에 출전하여 승전(勝戰)하고, 다시 노량진(露梁津)에서 적진(敵陣)을 돌진(突進)하다가 유탄(流彈)을 맞아 선조 31년(1598년) 순사(殉死)하니 당시 나이 35세이었다. 광해군 2년(16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훈련원사(訓鍊院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고령군 덕곡면 노1리와 노2리 사이에 있었던 ‘마검담(磨劍潭)’은 임진왜란 때 공이 칼을 갈고 훈련하던 곳이었으나 수몰(水沒)되었다. 명곡(明谷) 마을 입구에는 배즙(裵楫)와 아들 배태해(裵泰海), 손자 배세일(裵世逸), 증손자 배진탁(裵振鐸) 등 사현(四賢)의 충절(忠節), 학덕(學德), 효행(孝行)을 기리는 ‘성산배씨(星山裵氏) 사현(四賢)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註釋)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
② 배태해(裵泰海)
자는 성대(成大)이고 호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선무사(宣撫使) 즙(楫)과 현감(縣監) 재중(載中)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덕산황씨(德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18년(1585년)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화를 피하여 성주의 서쪽 덕곡방 서우촌(西寓村)에 살다가 선고(先考)가 노량진(露梁津)에서 순사(殉死)했다는 흉보(凶報)를 듣고 어버이를 생각하는 글(思親詞) 한 수(首)인 ‘사친사일결(思親詞一闋)’을 지어 애모(哀慕)하는 정(情)을 표현하였다. 인조 13년(1635년) 음서(蔭敍)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除授)받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대표적 사숙제자(私塾弟子)인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과 친밀하였으며 그가 공의 당호(堂號)를 양진당(養眞堂)이라고 써주었다. 인조 26년(1648년) 7월 18일 향년 64세로 졸(卒)했다.
③ 배세일(裵世逸)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군자감정(軍資監正) 태해(泰海)와 판관(判官) 명국(鳴國)의 따님인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광해군 6년(1614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심원당(心遠堂) 이육(李堉)의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종숙(從叔)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심연(沈演)의 문경(聞慶) 진영(陣營)에 있었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효렴(孝廉)으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다. 숙종 11년(1685년) 졸(卒)하였다.
④ 배진탁(裵振鐸)
자는 성명(聖鳴)이고 호는 성심재(省心齋)이다.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배세일(裵世逸)과 참군(參軍) 춘환(春煥)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인조 14년(1636년) 태어났다. 8세에 일월(日月)을 보고서 신월(新月 : 초승달)이라는 시를 읊었는데 장로(丈老 : 어른 노인)한 분들이 경탄하였다. 현종 10년(1669년) 미수(眉叟) 허목(許穆) 문하에 수학할 때 그 기량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농암(聾巖) 이광언(李光彦), 백포(栢浦) 채무(蔡楙)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만년에 상옥산(象玉山) 아래 가호(伽湖)의 윗쪽에 정사(精舍)를 짓고 현판을 성심재(省心齋)라 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좌우에 ‘毋自欺(무자기 : 자신을 속이지 말라)’, ‘愼其獨(신독 : 자기 혼자 있어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라)’ 등의 글을 걸어놓고 날마다 자기성찰(自己省察)을 하였고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모방하여 동규절목(洞規節目)을 만들었다. 부모님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여묘생활을 하였으며 과거 공부를 폐하고 산수에 은둔하면서 자호(自號)를 “가호조수(伽湖釣叟)”라 하였다. 숙종 25년(1699년)에 졸(卒)하였다.
⑤ 배진조(裵晋朝)
자는 상첨(相瞻)이며 호는 벽와(僻窩)이다. 처사(處士) 경덕(敬德)과 주익(周益)의 딸인 진양강씨(晋陽姜氏) 사이에서 순조 20년(1815년) 태어났다. 천자(天資)가 순수(純粹)하고 재주와 식견이 통달(通達)하고 지혜가 밝았다. 일찍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으며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오루(梧樓) 이배운(李培運)와 강마지교(講磨之交)를 맺었다. 고종 18년(1881년)에 졸(卒)했다. 유집(遺集) 1권이 있다.

(註釋1) 종유(從遊)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낸다는 의미이나 제자를 뜻함
(註釋2) 강마지교(講磨之交)
학문이나 기술을 같이 갈고 닦은 교우(交友)를 말한다. 
(2) 근·현대인물
① 배영민(裵英珉) : 구앤배 소아과 원장
② 배민수(裵珉洙) : 수성퍼스트 치과 원장
③ 배재철(裵在哲) : 배재철 법률사무소 변호사
④ 배재선(裵在善) : 한국항공대 교수, 공학박사
⑤ 배석호(裵碩鎬) : 초등학교 교감
⑥ 배인호(裵仁鎬) :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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