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배씨(星山裵氏)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만모재(晩慕齋)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성산배씨(星山裵氏) 선무사공파(宣撫使公派) 만모재(晩慕齋)

만모재(덕곡면 노리2길 64-3)

1. 만모재(晩慕齋) 유래(由來)


(1) 만모재(晩慕齋)는 선조 23년(1590년) 무과(武科) 별과(別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습독(習讀), 사직(司直)을 역임한 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사(宣撫使)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백형(伯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을 도와서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閑山島)에 출전하여 승전(勝戰)하고, 노량진(露梁津)에서 순사(殉死)하였던 배즙(裵楫)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고종 4년(1867년) 현재 고령군 덕곡면 노2리 서우재에 창건하였던 재실(齋室)이나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락(頹落)하여 1937년 1차 중건(重建)하고 1999년 2차 중건(重建)하여 현존하고 있다.


(2)《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의 진씨(陳氏) 주(註)에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의미를 해석하면 “보본(報本)은 뿌리인 조상에게 제례(祭禮)로 보답하는 것이고, 반시(反始)는 마음으로 추모(追慕)하는 것이다.” 하였다고 하였듯이 후손들은 조상의 은혜를 입으면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고 사모(思慕)한다는 ‘모(慕 : 그리워하다)’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후손들이 늦게서라도 조상의 근본(根本)을 잊지 않고 사모(思慕)하는 의미에서 재실(齋室)을 짓고 만모재(晩慕齋)라고 명명(命名)하였다.

2. 건축형태


정문은 한 칸 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만모재(晩慕齋) 주위는 기와 담장으로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좌, 우측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중간에는 대청마루가 놓여져 있다. 만모재(晩慕齋)의 본채 건물 좌측에는 양옥으로된 관리사(管理舍)가 있어 실용적인 재실이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배즙(裵楫)


 자는 통중(通衆)이고 호는 명암(明菴)이다. 임란시(壬亂時) 성주(星州) 의병장(義兵將) 제독(提督)으로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2등공신(宣務原從二等功臣)에 녹권(錄券)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된 덕문(德文)과 참군(參軍) 거추(巨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선산백씨(善山白氏) 사이에서 명종 19년(1564년)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23년(1590년) 무과(武科) 별과(別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습독(習讀)에 오르고 사직(司直)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성주의 부상현(扶桑峴), 고령의 개산포(開山浦)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워 행재소(行在所)로부터 선무사(宣撫使)를 제수(除授)받았다. 또한 가등청정(加藤淸正 : 가토 기요마사)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던 부왜승(附倭僧) 찬희(贊熙) 등이 적들에게 빌붙어 갖은 횡포를 일삼는 것을 공의 부친 서암공(書巖公) 배덕문(裵德文)이 베어죽이고 적장(賊將) 흑전구(黑甸句 : 구로덴구)의 목을 칠 때 참모(參謀)하였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백형(伯兄) 배설(裵楔)을 도와서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閑山島)에 출전하여 양진영(兩陣營)이 대적(對敵)하고 있을 때 월색(月色)이 창량(蒼凉)하게 바다에 뜨있으니 뱃전에 기대어 노래를 하며 시를 지어 읊었으니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 海濶魚龍睡 天晴鴻雁高(해활어룡수 천청홍안고)
  넓은 바다에 고기와 용이 졸고 있으며 맑은 하늘에 기러기는 높이 나는구나.
  波聲生鐵甲 月色滿弓刀(파성생철갑 월색만궁도)
  파도소리는 철갑선에 나는데 달빛은 활과 칼을 비추네”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승기(勝機)를 타고 계속 쳐부수며 다시 노량진(露梁津)에 이르러 “바다의 기운을 개이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 목숨을 끊으랴(海氣未淸此生畢命耶)”하고 혼자서 적진(敵陣)을 돌진(突進)하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선조 31년(1598년) 순사(殉死)하였다. 광해군 2년(16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훈련원사(訓鍊院事)에 추증(追贈)되었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촌(明谷村) 직전곡(稷田谷)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현감(縣監) 재중(載中)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덕산황씨(德山黃氏)로 합폄(合窆)이다. 공은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明谷)에 터를 잡은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신다.

4. 성산배씨(星山裵氏) 만모재기(晩慕齋記)


가난하면 부자를 사모하고 비천(卑賤)하면 고귀(高貴)한 것을 사모하며 곤궁(困窮)하면 현달(顯達)함을 사모하는 것은 사람이 늘 지니고 있는 정(情)이지만 홀로 자손이 조선(祖先)을 사모하는 것은 성품에 근본하여 정(情)에 갇힌 것이니 도리어 전(前)보다 못하랴! 세 가지를 사모한다는 것 이것은 말세(末世)의 풍속이 스며들어 물이 흐르듯이 모두 이러한데 배진조(裵震朝)군은 그의 여러 일가(一家)들과 의논하여 손님도 대접하고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향화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재실(齋室)을 마을 위에 짓고 현판을 만모재(晩慕齋)라고 하였으니 만(晩)이라고 이름한 것은 참으로 사모(思慕)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려서 부모를 사모하는 것은 어린애들도 역시 능히 하겠지만 종신(終身)토록 사모한 사람은 오직 큰 순(舜)임금 만이 그렇게 하였으니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로 할아버지에게서 증조와 고조로 더욱 멀어질수록 더욱 잊게 되기 때문에 옛날의 사람들이 분암(墳庵)이나 병사(丙舍)를 두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정을 유모(孺慕)하면서 의지하는 곳이 지금 이 재실(齋室)이다. 만모재(晩慕齋)는 나이가 어린 아이들에게 글을 배워 주기도 하고 손님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대접하는 장소이니 반드시 이것 만모재(晩慕齋)로서 이름을 지은 것은 예(禮)에 그가 나온 바를 잊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 재실을 짓게 된 제일 첫째 의미이다. 위가(韋家)의 화수회(花樹會)나 범씨(范氏)의 의장(義庄)도 모두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저울 즉 권형(權衡) 이전에는 미처 여가를 얻지 못하다가 지금 비로소 능히 행하는 것(재실을 짓는 것)도 역시 늦다(晩)는 의미이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배씨(裵氏)들의 후손이 그야말로 창성(昌盛)하리라. 내가 배군(裵君)과 서로가 알게 된 것도 늦으며 그 뜻을 가상(嘉尙)하게 여겨 글을 쓰며 시(詩)를 한 수 짓노라.

“가야산 동쪽 언덕에 조그만한 재실이 완성되었으니
 배군을 위하여 조상을 사모하는 정성을 설명하네
 이제부터 복전(福田)에는 옥(玉)같은 종자가 나와서
 일찍 경전(經典)의 가르침이 돈보다 나은 것임을 알리라
 뽕나무와 삼(麻)밭에 비와 이슬이 오면 세 번 올라가서 즐기고
 화수회(花樹會)하는 봄과 가을에 한번 모여서 정을 나누네
 병들어 산방(山房)에 누워 졸렬한 시를 짓노라면
 놀러온 사람이 듣고는 노래 소리를 뽑는구나.”

정묘년(1867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판서(判書) 이원조(李源祚) 지음
후경신년(1920년) 11월 유학(幼學) 야성(冶城) 송홍래(宋鴻来)가 글씀
(註釋1) 종신(終身)토록 사모한 사람은 오직 큰 순(舜)임금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양웅(楊雄)이 또한 말하기를 ‘부모를 섬김에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이는 순(舜) 임금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순 임금이 비록 이미 그 부모에게 순종하였으나 그 마음에는 항상 부족한 듯 여겼으니 이것이 순 임금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였던 까닭입니다.[楊雄亦曰‘事父母, 自知不足者, 其舜乎’, 蓋舜雖已順其親, 而其心常若不足, 此其所以爲終身之慕.]”라고 한 부분을 두고 한 말이다.

(註釋2) 분암(墳庵)
묘를 보살피기 위해 세운 암자

(註釋3) 병사(丙舍)
무덤 가까이에 지은 묘지기가 사는 작은 집

(註釋4) 유모(孺慕)
돌아간 부모를 사모(思慕)함

(註釋5) 위가(韋家)의 화수회(花樹會)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花樹)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고사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시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列卿 : 정3품 이상 벼슬)과 어사(御使)와 상서랑(尙書郞)이 즐비하구나. 조정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한 데서 화수회(花樹會)라는 말이 생겼다.

(註釋6) 범씨(范氏)의 의장(義庄)
범씨는 송나라 명신 범중엄(范仲淹)이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자 자식들에게 검약한 생활을 하도록 경계하고 마을에 의장을 설치하여 족인(族人)들을 도와주었다. 의장의 규율은 1인당 하루에 쌀 한 되를 먹고 한 해에 비단 한 필을 입게 하며, 혼인과 상장(喪葬)에 모두 물품을 지급하는 것이다. 《小學 卷5 嘉言》

(註釋7) 복전(福田)
불교용어(佛敎用語)로, 부처를 공양(供養)하고 선행(善行)을 쌓으면 복(福)을 받는 것이 마치 전지(田地)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곡물(穀物)을 수확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5. 만모재(晩慕齋) 중건기(重建記)


성주에 크고 작은 가야천(伽倻川)이 동쪽으로 멀리 쉬지 않고 흐르면서 상왕산(象王山) 냇물의 대소(大小)는 비록 다르지만 그 청숙(淸淑)하면서도 명려(明麗)한 기운(氣運)은 한가지이다. 곧바른 자그마한 내의 상류에 한 구역이 있는데 골이 깊고 아늑하며 반월형(半月形)이니 즉 명곡(明谷) 배씨(裵氏)들이 세거(世居)하던 4세의 묘역이다. 옛날에 명암공(明菴公)이신 휘 즙(楫)께서는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말하기를 “대장부(大丈夫)는 마땅히 말의 안장에서 칼을 시험하며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더니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상(扶桑)과 개산(開山) 사이에서 크게 이겼으니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行在所)로 상주(上奏)를 하여 특별히 선무사(宣撫使)를 제수(除授)받으셨으니 특수한 공훈(功勳)이었으며 그러다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개산(開山)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氣勢)를 타고서 노량진(鷺梁津)에 이르러 적의 화살에 맞아 마침내 쓰러져 혼백(魂魄)을 불러 의관(衣冠)으로 장례를 모셨다. 아들인 양진당(養眞堂) 휘 태해(泰海)는 당시 14세이었는데 부친이 비명(非命)에 돌아가신 것을 애통하게 여기며 어버이를 생각하는 ‘사친사일결(思親詞一闋)’을 짓고 도(道)로서 은거(隱居)하며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천지(天地)의 죄인(罪人)이다”라고 하셨다. 명곡(明谷)이신 휘 세일(世逸)같은 분은 건원릉(健元陵) 참봉(參奉)으로 제수(除授)되셨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성심재(省心齋)이신 휘 진탁(振鐸)은 주(周)나라를 존숭(尊崇)하는 의(義)를 지키셨으니 양진당(養眞堂)의 아드님과 그리고 손자가 되신다. 대개 공의 가문은 대대로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있었으며 면면(綿綿)히 이어 내려오며 끊어지지 않았고 학문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는 가정에서 할아버지께 수업(受業)하기도 하고 심원당(心遠堂) 이육(李堉)의 문하(門下)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의 일가(一家)에서 수학하며 일가에서 사현(四賢)이 백대(百代)토록 밝게 빛나며 그 남기신 풍속과 남은 메아리가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하여 비록 오래된 지금까지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공경심을 일어나게 하고 있으니 충효(忠孝)가 사람들의 신심(神心)에 느낌을 주는 것이 이와 같음에 있었다. 오래도록 재사(齋舍)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보전되지 아니하여 지난 기묘(1939년)에 후손인 종환(鍾煥)과 경호(經鎬)가 비로소 중건(重建)을 창설(創設)하였으나 벽에 걸어둘 기문(記文)이 없었는데 금년 봄에 상종(相宗)과 재동(在東)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징험(徵驗)이 될 기문(記文)을 부탁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산천(山川)의 좋은 경치는 첨윤(詹尹)이 터를 보았으며 동우(棟宇)의 아름다움은 장맹(張孟)의 칭송이 있었으며 오직 충(忠)과 효(孝)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인도(人道)의 바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어질면서도 그 부모를 버리는 자가 있지 아니하며 의(義)로우면서 그 임금을 대수롭게 여기는 자는 없다(未有仁而遣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고 하셨느니라. 시험삼아 지금의 세상을 볼 때에 과연 어진가? 의로운가? 하물며 이 재실은 충효당(忠孝堂)이다. 이 당(堂)에 거(居)하는 자는 항상 조선(祖先)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행하신 바를 생각하며 공부하고 자책(自責)한다면 제물을 공경히 차려 제사를 모시고 도리(桃李)의 동산에서 인륜(人倫)을 서술하며 묘곽(苗藿)의 예물(禮物)은 모두 인도(人道)에 관계된 일이다.” 당(堂)의 이름을 만모재(晩慕齋)라고 짓게 된 것은 이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선생의 기문(記文)에 설명되어 있으므로 지금 거듭 이야기 하지 않겠느라.

무술년(戊戌年 1958년) 모춘(暮春 음력 3월)
인주(仁州) 장일상(張一相) 지음

(註釋1)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

(註釋2) 상주(上奏)
임금님께 아룀

(註釋3) 선무사(宣撫使)
조선 시대 때 큰 재해(災害)나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그 지방의 민심(民心)을 어루만져 가라앉히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臨時) 사신(使臣), 또는 그 벼슬을 말한다.

(註釋4) 사친사일결(思親詞一闋)
어버이를 생각하는 글[思親詞] 한 수(首)를 말한다.

(註釋5) 대절(大節)
대의(大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절개

(註釋6) 징험(徵驗)
어떤 징후(徵候)나 또는 징조(徵兆)를 경험(經驗)함

(註釋7) 첨윤(詹尹)
초(楚) 나라의 정첨윤(鄭詹尹)으로, 점을 잘 치는 사람을 말한다.

(註釋8) 동우(棟宇)
집의 마룻대와 추녀끝

(註釋9) 장맹(張孟)의 칭송
장로(張老)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장맹(張孟)의 별칭이다.《예기》〈단궁 하(檀弓下)〉에 “진(晉)나라 헌문자(獻文子)가 새 집을 다 지어 놓고 낙성식(落成式)을 할 때 진나라 대부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장로(張老)가 칭송하기를 ‘매우 장엄하고 매우 찬란합니다. 앞으로 주인께서는 여기에서 제사 지내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거상(居喪)하면서 곡(哭)하고, 여기에서 친구와 종족을 모아 놓고 연회를 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晉獻文子成室 晉大夫發焉 張老曰 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였다.

(註釋10) 도리(桃李)
복숭아와 자두
(註釋11) 묘곽(苗藿)
곡식과 미역을 말한다.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