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송씨(南陽宋氏) 안서공파(雁西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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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남양송씨(南陽宋氏) 안서공파(雁西公派)

남양송씨, 쌍림면 산주리74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송규(宋奎)
 10세기 초엽 주전충(朱全忠)이 당(唐)나라 말기에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웠고, 점차 세력을 키워 소선제(昭宣帝)의 양위(讓位)를 받아 후량(後梁)을 세우고 923년에 이존욱(李存勖)이 후량(後梁)을 멸하고 낙양(洛陽)에 그 나라의 수도를 세워 후당(後唐)을 세우는 등 혼란기에 당(唐)나라 팔학사(八學士) 중의 한 분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이었던 공이 난신(亂臣)의 참소(讒訴)를 입고 신라 경애왕 3년(926년) 동료 7학사(七學士) 등과 함께 황해를 건너 신라로 왔다. 경순왕(敬順王)의 후대(厚待)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며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마침내 신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청운야학(靑雲野鶴)으로 벗을 삼다가 고려 정종 2년(947년) 경기도 남양(南陽) 송주동(宋主洞) 현재 화성군 남양면 송림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송규(宋奎)를 시조로 받들고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註釋1) 팔학사(八學士)
송규(宋奎), 임팔급(林八及), 임팔급(林八汲), 설인검(薛仁儉), 허동(許董), 송규(宋圭), 최호(崔.),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 유전(劉荃) 등이다.
(註釋2) 난신(亂臣)의 참소(讒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가 남을 헐뜯어서 없는 죄(罪)를 있는 듯이 꾸며 고해 바치는 일을  뜻한다. 
(註釋3) 청운야학(靑雲野鶴)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생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 중시조(中始祖) 및 분파(分派)
 시조(始祖) 송규(宋奎) 이하 계대(系代)가 분명하지 않아 남양송씨(南陽宋氏)는 고려 말(高麗 末)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낸 송세보(宋世輔)를 1세조(世祖)로 하는 도촌파(道村派),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오른 송공절(宋公節)을 1세조(世祖)로 하는 안서파(雁西派)로 나뉘어 있다. 집성촌은 전남 고흥군 대서면 안남리, 화산리이다.

(3)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배출 가문
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두문동에서 충절을 지킨 고려의 옛 신하를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이라고 부른다.
② 고려 말 조선건국 초기에 고려의 옛 신하로서 두문동(杜門洞)에서 은둔(隱遁)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수차례 소환하여도 ​조선왕조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던 절개 즉 ‘망복지절(罔僕之節)’을 지키다가 고령지역으로 낙남(落南)하였던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은 쌍림면 송림촌(松林村)에 은거(隱居)하였던 남양송씨(南陽宋氏) 송인(宋寅)과 쌍림면 석절촌(石節村)에 은거(隱居)하였던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철충(韓哲冲)이 있다.

(註釋) 정충대절(精忠大節)
자기를 돌보지 않는 충의(忠義)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는 절개를 뜻한다.


(4)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 창설시(創設時) 주도적 역할
① 쌍림면 신촌리 소재 벽송정(碧松亭)을 수호(守護)하고 향속(鄕俗) 기강(紀綱)을 정립하기 위하여 1546년 3월 3일 향내 재지사족(在地士族) 33인의 구성원이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를 창시(創始)하였다.
② 이때 작성한 ‘송정입의(松亭立議)’에 남양송씨(南陽宋氏) 문중에서 참봉(參奉) 송세언(宋世彦), 송세준(宋世俊), 송인(宋仁), 송세호(宋世豪), 송임(宋任) 등 5명이 계원으로 참여하여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 창설시(創設時)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註釋) 송정입의(松亭立議)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합의된 내용을 적어 그것을 서로 지키도록 약속하였던 문서를 말한다.
 
(5) 임란창의시(壬亂倡義時) 1문(一門) 6의사(六義士) 배출 문중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策錄)된 송륜(宋倫)을 따라 재종질(再從姪) 송연년(宋延年), 송연령(宋延齡)과 삼종손(三從孫) 송이주(宋以朱), 송이장(宋以張), 송이정(宋以程) 등 6의사(六義士)가 임란창의(壬亂倡義)에 동참(同參)하여 1문(一門) 6의사(六義士)를 배출하였다.

(6) 분파(分派) 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송인(宋寅)의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고흥유씨(高興柳氏)의 고향이 전남 고흥군 대서면이므로 장자계열(長子系列) 송효신(宋孝信)의 차남 야은공(野隱公) 송호(宋浩)와 차자계열(次子系列) 송수산(宋守山)의 장남 서호산인(西湖散人) 송순손(宋順孫)이 임진왜란 이전 명종 재위기간(1545년 ∼1567년) 중 선대(先代) 외가(外家)인 고흥(高興)으로 이거(移居)하였다
② 나머지 후손들은 고령군 쌍림면 일대에 세거하면서 명맥(命脈)을 유지하였으나 그후 안동, 합천 등지로 산거(散居)하였으며 입향조 송인(宋寅)과 그 아들 송천생(宋天生)의 묘소가 있는 쌍림면 합가2구에 극소수의 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송충(宋忠)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숙종 9년(1104년) 임간(林幹)과 병마사 좌복야(兵馬使 左僕射) 황유현(黃兪顯), 부사(副使) 대장군(大將軍) 송충(宋忠) 등이 여진(女眞)과 정주성(定州城) 밖에서 싸워 패전하였으며 예종 3년(1108년) 계사 병부판관(兵馬判官) 유익(庾翼)과 장군 송충(宋忠), 신기군(神騎軍) 박회절(朴懷節) 등이 여진(女眞)과 길주(吉州)에서 싸우다가 죽자, 유익(庾翼)에게는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송충(宋忠)에게는 상장군 병부상서(上將軍 兵部尙書)를 추증(追贈)하였다.”라고 하여 공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송공절(宋公節)
고려 말에 동진사(同進士)를 지내고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으며 남양송씨(南陽宋氏) 안서파(雁西派)의 시조(始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송침(宋琛)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송공절(宋公節)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감사(監事)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남양군(南陽君)에 봉(封)해졌다. 따라서 후손들이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삼았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송인(宋寅)은 고려가 국운(國運)이 다하여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성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굽히지 않고 은둔(隱遁)하다가 낙남(落南)하여 1392년 고령군 쌍림면 송림촌(松林村)에 은거(隱居)하면서 물고기를 낚고 은행나무를 심어 정자를 짓는 등 한가로운 생활을 하면서 망복(罔僕)의 한(恨)을 달래었다. 

(註釋) 망복(罔僕)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송인(宋寅)
 호는 행정(杏亭) 또는 송촌(松村)이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침(琛)의 아들로 공민왕 5년(1356년) 2월 남양(南陽)에서 태어 나셨다. 공민왕 23년(1374년)에 동진사(同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삼은(三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으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하자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면서 항절불굴(抗節不屈)하여 기우자집(騎牛子集)과 신독재집(愼獨齋集)에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만대산(萬代山) 기슭에서 시거(始居)하다가 고령(高靈) 송림촌(松林村)으로 옮겨 은둔(隱遯)하면서 은행나무를 심고 정자(亭子)를 지어 행정(杏亭) 또는 송촌(松村)이라 자호(自號)하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었다.

 “ 南來無復好家亭(남래무복호가정)
   남쪽으로 와보니 좋은 가정(家亭 : 정자) 없기에
   種杏爲亭號杏亭(종행위정호행정)
   은행나무 심고 정자를 지어 행정(杏亭)이라 정호(亭號)를 불렀네.
   鵠嶺遺民今獨在(곡령유민금독재)
   개성 송악산의 고려 백성 지금 홀로 남아 있으니
   千年松柏夢中靑(천년송백몽중청)
   천만년 소나무와 잣나무는 꿈속에 푸르구나”라고 하였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누차 벼슬길에 나아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공은 지조를 지키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날마다 고기를 낚시하여 자신을 즐기면서 용담어구(龍潭漁謳)를 남겼으니 이르기를

“ 小艇回烟雨霏(소정회연우비)
 작은 배 돌아올 때 가랑비 보슬보슬
 一竿漁夫忘機(일간어부망기)
 낚시대 둘러맨 어부 때를 잃고 한가롭다.
 欲問生涯何處(욕문생애하처)
 물어보소 사는 곳이 어디메냐고
 江有兮山有薇(강유궐혜산유미)
 강에는 쏘가리 있고 산에는 고사리 있노라”라고 읊었다.

이때부터 다시 한강(漢江)을 건너지 않았으므로 후인(後人)들은 그 낚시하던 곳을 ‘용담어은동(龍潭漁隱洞)’이라 하였고 용담(龍潭)위에 밭 한띠 전이 있었는데 세상사람들은 ‘송돈(宋墩 : 송씨 돈대)’이라 일컬었다. 향년 77세로 여생을 마치니 세종 14년(1432년) 12월 7일이었다. 전남 고흥군 운곡사(雲谷祠)와 장성군 경현사(景賢祠), 개성 두문사(杜門祠)에서 제사를 드린다. 후손들은 쌍림면 산주리 마을회관 바로 위에 은행나무를 심어 옛날 정자(亭子)를 지었던 자리인 보호수 은행나무 옆에 ‘고려문하시중남양송공행정유허비(高麗門下侍中南陽宋公杏亭遺墟碑)’와 쌍림면 산주리 아랫마 입구 백고재(白高齋) 옆에 ‘고려문하시중남양송선생신도비(高麗門下侍中南陽宋先生神道碑)’를 세워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견(比肩)할 공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註釋) 용담어은동(龍潭漁隱洞)
쌍림면 하거1리에서 마주보는 산 밑 시냇가에 형성된 마을로 1960년대까지 마을이 존속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2) 송천생(宋天生)
 호는 차송정(次松亭)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 송인(宋寅)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도군수(淸道郡守)를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郡)의 구절창(九節倉) 아래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만년(晩年)에 용담(龍潭)의 위쪽에 소재한 벽송정(碧松亭) 아래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스스로 차송정(次松亭)이라 자호(自號)하고 한가로이 속세(俗世)에 속박(束縛)됨이 없이 마음 편히 지내다가 졸(卒)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송호(宋浩)
 초휘(初諱)는 우(祐)이며 호는 야은(野隱)이다. 참봉(參奉) 효신(孝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학문과 지식이 출중하여 유학(儒學)의 대가(大家)로 명성이 높았다. 고령(高靈)으로부터 흥양(興陽 : 고흥군의 옛지명)에 시거(始居)하였으니 남양송씨(南陽宋氏) 고흥군(高興郡)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4) 송순손(宋順孫)
 자는 경조(敬祖)이고 호는 서호산인(西湖散人)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수산(守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 때 생원(生員)이 되었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 : 먼 지방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었을 때 귀양살이 하는 곳인 적소(謫所)까지 스승을 따라가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당시의 안목(眼目)들을 피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공은 공자(孔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하였으며 적소(謫所)에서 힘들게 봉양하였다. 선생이 임종(臨終)할 때 유언(遺言)인 말명(末命)을 받들어 김굉필(金宏弼)이 사사(賜死)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옮겨 와서 장례를 치루었다(返櫬). 벼슬길에 뜻이 없어 처향(妻鄕)이자 선대 외가(外家)인 전남 고흥(高興)의 서호(西湖) 즉 고흥군 대서면 회남리로 이거(移居)하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註釋1) 무오사화(戊午士禍) 
세조 때 훈구파(勳舊派)가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수록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으킨 사화(士禍)를 말한다.
(註釋2) 갑자사화(甲子士禍)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 폐위(廢位) 및 사사(賜死)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훈구사림파(勳舊士林派)가 참혹한 화를 당하였던 사건을 말한다.   


 (5) 송륜(宋倫)
 처사(處士) 처원(處元)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뛰어났으며 학문과 무예를 닦아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고 임진왜란 때 전장(戰場 : 싸움터)에 나아가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사(戰死)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당시 직책은 조선 시대 궁중을 수비하고 임금을 호위하던 친위군(親衛軍)인 금군(禁軍)이었다. 재종숙(再從叔)인 공을 따라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재종질(再從姪) 송연년(宋延年), 송연령(宋延齡)은 각각 어모장군(禦侮將軍)과 보공장군(保功將軍)의 품계를 받았고 삼종손(三從孫) 송이주(宋以朱), 송이장(宋以張)은 내금위장(內禁衛將)과 부사과(副司果)를 제수(除授)받았다.

(6) 송이장(宋以張)
 자는 국서(國瑞)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송연년(宋延年)과 침(琛)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명종 13년(1558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휘하(麾下)에서 군관(軍官)으로 창의(倡義)에 동참(同參)하여 군공(軍功)으로 부사과(副司果)의 관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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