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경모재(敬慕齋)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경모재(敬慕齋)

경모재(개진면 반운3길 6-2)

 

1. 경모재(敬慕齋) 유래(由來)

(1)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鄭仁弘)이 인근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자 같은 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門人)과 내암(萊庵)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도(門徒)들이 5월 10일 합천군 가야면 숭산동 (崇山洞) 소학당(小學堂)에서 창의기병(倡義起兵)하자 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합천종중에서는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희관(希寬)의 아들 운(雲), 춘형(春亨), 수(需)와 손자 영원(永源), 영순(永淳), 영청(永淸), 영택(永澤), 영숙(永淑), 영해(永海), 영항(永沆)과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희단(希檀)의 아들 영(霙)과 손자 종인(種仁)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의병진(義兵陳)에 합류(合流)하였다.

(註釋) 창의기병(倡義起兵)
국난(國難)을 당했을 때 의병(義兵)으로서 군대(軍隊)를 일으킴


(2) 임진왜란 때 창의토적(倡義討賊)하기 전에 어머니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친정(親庭)이자 공(公)의 외가(外家)가 있는 개진면 양전리 인근 마을인 고령군 대가야읍 수곡(藪谷) 현재 내곡 3리 속칭 시실로 가족을 피난시키고 전란(戰亂)이 종식(終熄)되자 개진리 양전리(良田里)에 정착하였다가 그후 농막(農幕)을 따라 인근 개진면 반운리(盤雲里)로 이거(移居)하여 이곳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정언공파(正言公派) 문중의 420여 년간 세가지(世居地)가 되었다.  

 
(3) 후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에 의병(義兵)으로 동참(同參)하여 1592년 정인홍(鄭仁弘)이 주도한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 : 6월 4일∼6월 6일), 사원동(蛇院洞) 복병전투(伏兵戰鬪 : 6월 17일경), 안언전투(安彦戰鬪 : 7월 9일∼7월 10일) 등지의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조 30년(1597년) 일어난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웠던 성산이씨(星山李氏) 개진면 양전리 입향조(入鄕祖) 이춘형(李春亨)과 아들 이영숙(李永淑)의 장대한 업적을 기리고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1956년 ‘경모재(敬慕齋)’라 편액(編額)하고 개진면 반운3길 6-2에 세웠던 재실(齋室)이 ‘경모재(敬慕齋)’이다. 

2. 건축형태

경제적이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장점이 많은 ‘맛배지붕 개량형 기와집’으로 건축되었으며 둘레는 담장을 둘렀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기와집이다. 좌측에는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공간은 대청을 깔아 제사 및 종중회의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경모재(敬慕齋) 본채 건물 좌측에는 관리사(管理舍)가 있어 실용적인 재실이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1) 이춘형(李春亨)


자는 여상(汝常)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직(贈職)받은 모헌(慕軒) 희관(希寬)과 훈도(訓導) 연(璉)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중종 36년(1541년) 10월 8일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 속칭 소사(所沙) 본제(本第)에서 태어 나셨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비롯한 형 운(雲), 동생 수(需)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같은 해  5월 10일 합천군 가야면 숭산동(崇山洞) 소학당(小學堂)에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자 의병(義兵)으로 지원하여 합천군 야로면 주학정(住鶴亭)에서 훈련을 받고 동참(同參)하였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 영남 3대 의병장(義兵將) 진중(陣中)에서 계획을 돕고(贊劃) 군사상(軍事上)의 기밀(機密)을 여러 번 세웠으며 무계(茂溪), 성주(星州), 지례(知禮), 개령(開寧) 등 전투에 공의 아들 영숙(永淑)과 권솔(眷率)들과 종군(從軍)하여 왜적을 격퇴시킨 전공(戰功)이 지대하였다. 난리가 이미 평정(平靖)되고 공이 돌아와서 초옥(草屋)에 누워 거문고와 글로써 스스로 즐기며 입으로만 임진왜란 때의 수고하였음을 말하지 아니하고(口不道平吳之勞)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의하면 외가 곳인 고령 수곡(藪谷 : 내곡리)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합천에서 고령으로 입향할 때에는 반운리와 양전리 사이의 양전구역에 입향하여 ‘성산이씨(星山李氏) 고령 양전파(良田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년) 9월 18일 졸(卒)하고 묘는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 산 190번지 정곡(井谷) 술좌(戌坐)에 있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행장(行狀)을 짓고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배위는 진사(進士) 의제(義濟)의 따님인 공인(恭人) 화순최씨(和順崔氏)이다. 묘는 동원(同原)에 쌍분(雙墳)이다.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 자질에는 운(雲), 춘형(春亨), 수(需) 등 3형제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삼우재(三友齋)가 건립되어 있으며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亂護國嶺南忠義壇)과 합천의 임란창의사(壬亂彰義祠)에 공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향사(享祀)를 지낸다.

(註釋1) 가동(家童)
한 집안의 노복(奴僕)이나 비첩(婢妾) 따위, 또는 집안에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아이를 말한다.
(註釋2) 권솔(眷率)
자기가 거느리고 사는 식구(食口)를 말한다.
(註釋3) 유덕(遺德)
죽은 사람이 남긴 덕(德) 또는 후세(後世)에 남긴 은덕(恩德)을 말한다.

(2) 이영숙(李永淑)


초명(初名)은 영준(永濬)이며 자는 도숙(導叔)이고 호는 우재(尤齋) 또는 송천(松川)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아버지 춘형(春亨)과 진사(進士) 의제(義濟)의 따님인 공인(恭人) 화순최씨(和順崔氏)사이에서 맏아들로 명종 19년(1564년) 11월 16일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 소사(所沙) 본제(本第)에서 태어 나셨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찬(撰)한 행장(行狀)에 의하면 사람의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청아(淸雅)하고 사람됨과 그 행실(行實)이 순후(淳厚)하며 실천(實踐)하는 공부에 힘쓰고 평소 집에서는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였으니 향당(鄕黨)에서는 충성스럽고 신실(信實)하다고 칭찬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2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경향(京鄕)에서 모여든 잠신(簪紳)들과 깊이 교류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10일 합천군 가야면 숭산동(崇山洞) 소학당(小學堂)에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자 의병창의(義兵倡義) 격문(檄文)에 따라 합천에서 백부 운(雲)을 비롯한 삼형제와 공을 포함한 아들과 조카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100여인을 거느리고 임난창의(壬亂倡義)에 선창(先唱)하였다. 공은 아버지 춘형(春亨)을 따라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 영남 3대 의병장 진중(陣中)에서 무계(茂溪), 성주(星州), 지례(知禮), 개령(開寧) 등 전투에 종군(從軍)하여 세운 전공(戰功)으로 전란(戰亂) 중 실시된 무과별시(武科別試)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수의부위(修義副尉)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웠다. 임금이 혼미(昏迷)하여 국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조정(朝廷)에서 벼슬에 나아갈 뜻을 버렸으며 모옥(茅屋 : 초가집)을 짓고 우재(尤齋)라고 편액(扁額)하여 뜰에는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책상에 책을 쌓아두고 날로 그 가운데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가(詩歌)를 읊조리면서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氣分)이 좋게 즐기면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인조 8년(1630년) 2월 5일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67세이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사부2리 도룡동(道弄洞) 신좌(辛坐)이며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배위는 진사(進士) 리(莅)의 따님인 단인(端人) 인천이씨(仁川李氏)이다. 묘는 쌍분(雙墳)이다. 대구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亂護國嶺南忠義壇)과 합천의 임란창의사(壬亂彰義祠)에 공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향사(享祀)를 지낸다.

(註釋1) 향당(鄕黨)
자기(自己)가 났거나 사는 시골의 마을, 또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註釋2) 잠신(簪紳)
높은 벼슬아치가 쓰는 쓰개의 꾸밈이라는 뜻으로, 높은 지위(地位)를 이르던 말이며 유사어(類似語)로는 잠영(簪纓)이라는 말이 있다.
(註釋3) 격문(檄文)
비상(非常) 사태(事態)에 관하여, 널리 세상 사람들을 선동(煽動)하거나 의분(義憤)을 고취하려고 쓴 글을 말한다.
(註釋4) 선창(先唱)
맨 먼저 주창(主唱)함


4. 성산이씨(星山李氏) 경모재기(敬慕齋記)

생각건대 지난 선조(宣祖) 시대에 우리 선조 우재공(尤齋公) 휘(諱) 영숙(永淑)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젊은 나이에 일개 사마(司馬)로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송암(松庵) 김면(金沔) 등 여러분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혹 왜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싸우기도 하였으며, 혹 적을 막기도 하였으며, 혹 군량(軍糧)을 운반하여 병사(兵士)를 먹이기도 하였으며, 또 혹 곡식 씨앗을 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난리(亂離)가 평정(平定)된 후에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사(政事)가 혼란스럽게 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뜻을 접고 집 한 칸을 지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쌓아두고 읽으며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으니, 역시 기미(幾微)를 보고서 진퇴(進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이 살았던 세상과는 삼백 여년의 세월이 흘러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아울러 군중일록(軍中日錄)이 집안에서 불타는 재앙(災殃)을 당하여 그 사적(事蹟)을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후손들은 선대의 업적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민멸(泯滅)될까 두려워서 반운리에 네 칸의 재실(齋室)을 지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재호(齋號)를 경모재(敬慕齋)라 하고는 용석(龍錫)군과 중석(仲錫)군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내 생각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여러 의사(義士)가 의(義)를 내세워 국난(國難)에 달려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이름이 드러나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기도 한 상황이 서로 달라, 도리어 그 와중(渦中)에도 행불행(幸不幸)이 있었을 터이니, 공의 유사(遺事)를 읽어보니 이 부분에서 슬픈 마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충간의담(忠肝義膽)으로 난리속으로 소매를 떨치고 달려간다는 것은 그 위대한 공과 장대한 업적을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환히 알려야 마땅한데, 사적(史籍)에 제대로 실리지 않고 집안에서도 불타버려 마침내 사라져서 근거 삼을 만한 아무 종적(蹤迹)이 없음에랴? 생간건대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쓴 공의 아버지 묘갈문(墓碣文)에서 이르기를 “형제와 아들 조카 등 열 두 사람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계획하고 군사상의 기밀(機密)을 도와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웠으니 공은 바로 그날 아들과 조카 속의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던 공적을 가히 상상(想像)할 수 있으며 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재실(齋室)은 영천(靈川)의 치소(治所) 즉 고령군청의 동서쪽에 있고 금산이 바치는 듯이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회천(會川)의 물이 휘돌아 흐르니 참으로 좋은 풍수(風水)이다. 그런데 이 재실(齋室)에 오르는 자는 먼저 공을 가히 사모하는 무슨 일 즉 숭배(崇拜)하는 절을 하고 난 후에야 사모하는 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경치를 구경하는 재실 즉 단지 한가한 한낱 정자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공을 사모한다고 하리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과 관련하여 말하지 말라.

기해년 1959년 족후손(族後孫) 기윤(基允) 삼가 기록하다

(註釋1) 사마(司馬)
나라의 군정(軍政)을 맡아 보았던 벼슬아치를 말한다.
(註釋2) 군중일록(軍中日錄)
싸움터에 나아갔던 중 날마다 기록한 일기
(註釋3) 상고(詳考)
상세히 참고(參考)하거나 검토(檢討)함
(註釋4) 민멸(泯滅)
형적(形跡)이 아주 없어짐
(註釋5) 기문(記文)
기록한 문서
(註釋6) 유사(遺事)
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
(註釋7) 충간의담(忠肝義膽)
충성스러운 깊은 마음속과 의열(義烈)의 용감한 기운을 뜻한다
(註釋8)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을 뜻한다.

5. 기타 재실(齋室) 및 추숭인물(追崇人物) 소개 

(1) 운천재(雲川齋)


고령의 치소(治所) 남쪽에서 성주, 합천의 물이 합쳐지니 회천(會川)이라 하였고 회천이 고령의 남쪽으로 가면서 한 번 휘어 꺾여져 동쪽 높은 산으로 달려 반천(盤川)이 촌락을 끼고 물위에 바둑판에 돌을 널어 놓은 것 같으니 반운리(盤雲里)이라. 이곳 율산(栗山 : 밤갓) 밑에 후손들이 1912년 낙은공(洛隱公) 이우성(李遇聖)을 추모하기 위하여 재실(齋室)인 운천재(雲川齋)를 창건하였다. 1930년에서 1935년경에 운천재(雲川齋)에서는 중재(重齋) 김황(金榥) 등 당대의 홍유석학(鴻儒碩學)들이 초대되어 시회(詩會)를 열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으며 후학(後學)을 양성한 서당(書堂)으로 유서(由緖)깊은 재실(齋室)이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은 예로부터 수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찾아와 많은 시가(詩歌)를 남겼는데 현재 6편의 두루마리에 85수(首)가 담긴 시첩(試帖)이 남아 있어 문회(文會)가 성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폐(頹廢)하여 후손들이 1982년 종전 장소의 좌측에 운천재(雲川齋)를 다시 세웠다. 현재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좌측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그 나머지 2칸은 대청을 놓았다.

(註釋1) 홍유석학(鴻儒碩學)
유학에 정통하여 학문(學問)이 아주 깊은 경지(境地)에 이른 사람을  뜻한다.
(註釋2) 소인묵객(騷人墨客)
시문(詩文)ㆍ서화(書畫)를 일삼는 사람이란 뜻으로,문사(文士), 시인(詩人)과 서예가(書藝家), 화가(畫家) 등(等) 풍류(風流)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註釋3) 문회(文會)
문인(文人) 또는 문학(文學)을 애호(愛好)하는 사람들이 작품(作品)을 감상(鑑賞), 평가(評價)하거나 그밖의 행사(行事)를 하기 위(爲)한 모임을 뜻한다.

 
(2) 추숭인물(追崇人物) 이우성(李遇聖)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낙은(洛隱)이다. 처사(處士) 동즙(東楫)과 광태(光泰)의 따님인 철성이씨(鐵城李氏) 사이에서 숙종 18년(1692년)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선공(先公)이 일찍 세상 떠난 것을 괴로워하였다. 늘 제삿날이 되면 밤새도록 자지 않았고 여러 날을 울었다.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셔서, 집에 한 섬의 양식이 없고 자기 몸에 제대로 된 옷이 없는데도 오직 어머니에게는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드렸으며, 몸에 편리한 도구를 다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여론이 그를 훌륭하다고 하였다. 영조 23년(1747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 산성곡 십자형 병오룡(丙午龍) 병좌(丙坐)이다. 

 

자료제공 : 후손 이기호(李基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