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서씨(達城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달성서씨(達城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① 세대가 멀고 문적(文籍)에 증거가 없고 보책(譜冊)에 이르기를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는 서진(徐晋)으로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피봉(被封)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② 다만 공주(公州) 만성보(萬姓譜)에 이르기를 “판도판서(版圖判書)는 중랑장(中郞將) 한(閑)의 증손이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신(愼)의 손이고 밀직사사(密直司使) 무질(無疾)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서진(徐晋)의 출생연도는 고려 원종에서 충렬왕 사이인 1260년 ∼ 1280년으로 추정된다.

(2) 달성서씨(達城徐氏) 분파(分派)
달성서씨(達城徐氏)는 7세를 기준으로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석령(錫苓) 진사공파,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개 파로 대별된다.

(3) 분파(分派) 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달성서씨는 239가구 70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낸 서제(徐濟)의 후손인 현감공파(縣監公派)는 다산면 곽촌(藿村), 개진면 오사1리, 성산면 고탄리, 쌍림면 산당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성균관(成均館) 권지학유(權知學諭)를 지낸 서도(徐渡)의 후손인 학유공파(學諭公派)는 대가야읍 연조리에 세거하고 있고, 감찰공파(監察公派)는 대가야읍과 개진면 반운리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서섭(徐涉)의 후손인 판서공파(判書公派)는 성산면 기족리, 어곡리, 삼대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서기준(徐奇俊) : 2세
승봉랑(承奉郞) 도관좌랑(都官佐郞)을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 달천군(達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② 서영(徐穎) : 3세
호는 노남(櫓南)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문원(文苑 : 문인 사회)에 거(居)하사 인재를 장진(獎進 : 권장하여 끌어 올림)하고 문장(文章)과 훈업(勳業)으로 명망이 높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서균형(徐鈞衡) : 4세
 자는 상경(商卿)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찬성사(贊成事) 영(穎)과 승동정(承同正) 경안공(景安公) 영유(永儒)의 따님인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충혜왕 1년(1340년) 태어났다.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의 문인이다. 공민왕 9년(1360년) 정포은(鄭圃隱)·이석탄(李石灘)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 15년(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우왕 6년(1380년) 우대언(右代言)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는데, 우왕이 시부(詩賦)의 제목을 보려고 하자 누설(漏泄)을 문제삼아 거절하였으며 이여량(李汝良) 등 99명을 뽑았으며 우왕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았다. 창왕 1년(1388년) 문하평리(門下評理) 신분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광우(兪光祐)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에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호인(胡人)들을 평정하여 보새(寶璽 : 옥새)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공양왕 1년(1389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왕명을 받아 우왕을 강릉에서 참수(斬首)하였다. 공양왕 2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 조준(趙浚)·이지(李至) 등과 함께 세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3년(1391년)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로 재직 중 졸(卒)하였다. 시호는 정평(貞平)이다. 순조 33년(1833년) 대구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2) 조선시대
① 서침(徐沉) : 5세
자는 성묵(聖)이고 호는 구계(龜溪)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균형(均衡)과 전의부령(典儀副令) 영리(英利)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포은(鄭圃隱)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였고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연산도호부사(延山都護府使)·갑산군수(甲山郡守)·상호군(上護軍)·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등을 지냈다. 어윤적(魚允迪)의 동사년표(東史年表)에 의하면 세종조에 공의 거주지인 달성(達城) 즉 현재 달성공원을 군사요새(軍事要塞)로 쓰기 위해 그 땅을 바꾸는 명령이 내려져 그 때 세종이 연신못(蓮信못 : 현재 영선시장)과 신지(新池 : 현재 서문시장)의 몽리토지(蒙利土地 : 이익을 얻는 토지)를 하사하여 세금을 받게 하고 , 아울러 남산고역(南山古驛)과 동산(東山) 일대도 하사하고 후한 상과 세록(世祿 : 자손 대대로 이어 받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 내려 준다고 하였으나 공은 그것을 사양하고 본읍백성(本邑百姓)들이 조적이자(糶糴利子) 매석당(每石當) 오승식(五升式 : 5되) 삭감하여 줄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혀 조선말까지 이 제도가 존속하였다. 은덕을 입은 대구(大邱) 부민(府民)들이 위민자선(爲民慈善)의 거룩한 혁공(奕功)을 기리기 위해 현종 6년(1665년) 귀암서원(龜巖書院) 숭현사(崇賢祠)을 세워 공을 봉향(奉享)하였으나 1995년 산격동 연암산(燕巖山)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은덕을 입은 대구(大邱) 부민(府民)들은 공의 숭고한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기리기 위해 달성의 상징인 회화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달성공원에는 서침(徐沉) 선생의 이름을 딴 ‘서침 나무’가 달성공원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註釋) 조적(糶糴)
환곡(還穀)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이거나 하던 일을 말한다.
▶환곡(還穀) :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던 진휼제도(賑恤制度)를 말한다.
② 서문한(徐文翰) : 6세
호는 쌍죽당(雙竹堂)이며 일호(一號)는 남강(南岡)이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침(沈)과 동궁첨사(東宮詹事) 을방(乙芳)의 따님인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승사랑(承仕郞)의 품계를 받았으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광흥창(廣興倉)의 부승(副丞)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③ 서도(徐渡) : 7세 학유공파(學諭公派) 파조(派祖)
자는 군즙(君楫)이고 호는 월촌(月村)·호민제(好敏齊)이다.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 문한(文翰)과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 봉조(鳳朝)의 따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5년(1459년)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모두 입격(入格)한 후 세조 11년(1465년) 춘은문(春恩門)에서  과거(科擧) 고시관(考試官) 영상(領相) 신숙주(申叔舟)가 실시한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무공랑(務功郞)에 올랐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매년 한식(寒食) 익일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27-3번지 소재 청호재(菁湖齋)에서 향사를 올린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④ 서섭(徐涉) : 7세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派祖)
호(號)는 남애(南涯)이었으나 남은(南隱)으로 개호(改號)하였다.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 문한(文翰)과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 봉조(鳳朝)의 따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영천 금호읍에서 태어났다. 세종조 때 등과한 후, 문종조‧단종조에 벼슬을 지냈고, 관직은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父子)를 강화도로 귀양보내자, 간신(奸臣)들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을 등용하라는「척간소(斥姦疎)」라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세조 3년(1457년) 단종이 영월의 동헌(東軒)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사(賜死)되었던 영월사변(寧越事變) 때「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이라는 시를 남기고 낙향한 후,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유림들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중양재(中陽齋)‧분양서원(汾陽書院) 등을 건립하고 향사(享祀)를 지냈다. 또한 첨모재(瞻慕齋)와 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유지(遺旨)를 기렸다. 저서로『남은선생집(南隱先生集)』2권 1책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聞寧越事變痛哭(문영월사변통곡)

山空木落日無光(산공목락일무광) 텅 빈 산에 잎은 지고 해도 빛을 잃었는데
痛哭家家考妣喪(통곡가가고비상) 집집마다 통곡소리 부모상을 당한 듯
堪愧微臣生在世(담괴미신생재세) 부끄럽고 못난 신하 이 세상에 살아남아
他時地下面何相(타시지하면하상) 뒷날 지하에서 무슨 면목 뵈오리까?

⑤ 서간원(徐艮元)
자는 공형(公亨)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섭(涉)과 예조참의(禮曹參議) 윤(倫)의 따님인 인천채씨(仁川蔡氏) 사이에서 중종 1년(1506년) 태어났다. 헌종 7년(1841년) 신축보(辛丑譜)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학유공파(學諭公派)
파조(派祖) 서도(徐渡)의 손자로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한 9세 서영(徐英)이 임진왜란을 당하자 이듬해 선조 26년(1593년) 난(亂)을 피하여 선향지(先鄕地)인 영천(永川) 고용전(古用田) 현재 영천시 남부동에서 아들 한기(漢紀)의 처향(妻鄕)인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봉두동(鳳頭洞)으로 입향하였다. 참고적으로 배위는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현손녀(玄孫女)이며 산림처사(山林處士) 이신번(李信蕃)의 따님인 공인(恭人)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2) 판서공파(判書公派)
입향경위(入鄕經緯)는 미상(未詳)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던 파조(派祖) 서섭(徐涉)의 손자인 통정대부(通政大夫) 9세 철(澈)이 선향지(先鄕地)인 영천(永川)에서 고령군 성산면 기족리(旗足里)로 입향하였다. 입향시기는 조부의 관직 재위 기간, 대수(代數) 등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직전(선조 25년, 1592년)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학유공파(學諭公派)
▶ 서영(徐英)
자는 순극(順克)이고 호는 묵암(默菴)이다. 처사(處士) 인원(仁元)과 진사(進士) 수의(守義)의 따님인 풍산심씨(豊山沈氏) 사이에서 중종 26년(1531년) 태어났다. 음사(蔭仕)으로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냈다. 달성서씨(達城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선조 35년(1602년) 졸(卒)하였다.
▶ 서한기(徐漢紀)
자는 낙서(洛西)이며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낸 영(英)과 영석(永錫)의 따님인 숙인(淑人)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명종 21년(1566년)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평창현령(平昌縣令)을 지냈다. 인조 11년(1633년) 졸(卒)하였다.

(註釋) 음사(蔭仕)
과거를 보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으로 음직(蔭職)을 얻어 관리로 서용(敍用)됨. 공신(功臣)이나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는 음서(蔭敍)가 대표적인 제도이었다. 과거제가 주로 실력(實力)에 의하여 관인을 선발하는 제도였는데 비하여 음서는 가문(家門)에 기준을 둔 등용제도이다.
▶ 서숙손(徐叔孫)
자는 경응(敬應)이며 평창현령(平昌縣令)을 지낸 한기(漢紀)와 처사(處士) 신번(信蕃)의 따님인 공인(恭人) 여주이씨(驪州李氏) 사이에서 선조 22년(1589년)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지냈다. 인조 25년(1647년) 졸(卒)하였다.
▶ 서언강(徐彦鋼)
자는 영삼(領三)이다.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지낸 숙손(叔孫)과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낸 정(正)의 따님인 의인(宜人)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선조 40년(1607년) 태어났다.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지냈다. 현종 14년(1673년) 졸(卒)하였다.
② 판서공파(判書公派)
▶ 입향조 9세 서철(徐澈)의 아들 서수항(徐守亢)은 조선시대 관서의 문서와  장부(帳簿)나 문서(文書)를 주관하던 종6품 관직인 주부(主簿)를, 손자 서응천(徐應天)은 중추원(中樞院)에 속한 정삼품 무관(武官)의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2) 근∙현대 인물
① 학유공파(學諭公派)
▶서정두(徐正斗) : 1943년 고령향교 전교(典校)
▶서중규(徐重奎) : 고령축산업협동조합장
▶서경규(徐慶奎) : 제5대 경상북도의회 도의원
▶서규식(徐圭植) : 초등학교장
▶서진찬(徐振讚) : 대구시청 서기관
▶서호조(徐浩祚) : 고령군 농산물 검사소장
▶서규원(徐珪源) : 고령군 제4대 체육회장
▶서동호(徐東護) : 고령농업협동조합 조합장
▶서동준(徐東駿) : 대가야읍장
▶서재덕(徐宰德) : 고령농업협동조합 조합장
② 판서공파(判書公派)
▶서정만(徐正萬) : 국립중앙과학관장, 과기처 대덕단지관리사무소 초대 소장 과학기술처 차관
▶서정권(徐正權) : 경상여객 대표
▶서용선(徐容善) : 대구시 교육청 장학관
▶서종교(徐宗敎) : 경일항공여행사 대표이사
▶서한교(徐漢敎) : 경북도청 사무관
▶서정호(徐正鎬) : 시인, LG보험 지점 소장
▶서학수(徐鶴洙) : 대구시청 사무관

 

 

자료제공 : 학유공파 서재덕(徐宰德)
              판서공파 서정호(徐正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