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전씨(竹山全氏) 충경공파(忠敬公派) 경모재(敬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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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죽산전씨(竹山全氏) 충경공파(忠敬公派) 경모재(敬慕齋)

(경모재, 운수면 신간1길60-1)

. 경모재(敬慕齋) 유래

(1) 고령군 운수면 신간1길 60-1(신간리 784 재실)에 소재한 경모재(敬慕齋)는 성주군 용암면으로 넘어가는 도로변 황실모텔 건너편 좌측 농로를 따라 500m 들어가면 의봉산 밑에 자연마을인 신간1리 마을회관옆에 위치하고 있다.

(2) ‘경모재(敬慕齋)’는 죽산전씨(竹山全氏) 충경공파(忠敬公派) 후손들이 1932년 음력 7월 상순(上旬)에 파조(派祖)로서 고령 입향조(入鄕祖)인 전윤(全倫)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공의 자호(自號)인 ‘경모(敬慕)’의 뜻인 임금을 공경하고 선조를 사모한다는 의미를 취하여 ‘경모(敬慕)’로 편액(扁額)한 재실(齋室)이다.

(3) 대한제국 광무 3년(1899년) 기해년 음력 2월 후손인 25세 재만(在萬)이 종전 창건한 ‘봉산당(鳳山堂)’이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폐(頹廢)하여 헐어버리고 종전 터 옆에 새롭게 창건한 재실(齋室)이 경모재(敬慕齋)이다.

2. 건축형태

(1) 경모재(敬慕齋)의 정문은 율수문(聿修門)이라고 편액(扁額)되어 있고 외곽은 방형(方形)으로 토석(土石) 담장을 둘렀다.

(註釋) 율수문(聿修門)
정문을 출입하는 자는 조상의 덕(德)을 이어받아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2)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의 ‘ㅡ’자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으로 좌측 온돌방 2개는 종인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회의실 및 종청(宗廳)으로, 우측 온돌방 1개는 제기(祭器) 및 침구(寢具) 비치하는 장소로,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있다.

(3) 좌측 온돌방에는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우거진다”는 뜻의 ‘根深茂蓁’(근심무진), “만 가지가 한 뿌리(근원)이다”라는 ‘萬枝同根(만지동근)’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어 약 560여 년전에 신간리에 입향한 전윤(全倫) 후손들의 끈끈한 족적(族的) 결합(結合)과 애종돈목(愛宗敦睦)의 정신이 돗보인다.

3. 추숭(追崇) 인물

(1) 전윤(全倫)

자는 명오(明五)이고 호는 경모(敬慕)이다. 군자사정(軍資司正) 오이(伍二)와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태종 6년(1406년) 태어났다. 공(公)은 고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벼슬을 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두문동(杜門洞)에서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와 남하면 지산리 사이에 있는 박유산(朴儒山) 균곡(菌谷)으로 이거(移居)하여 은거(隱居)하면서 박유(朴儒) 선생의 높은 절개(節槪)를 추모(追慕)하였던 전충수(全忠秀)의 손자이다.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 정5품)을 역임한 후 세조 1년(1456년) 성주로 유배되었다가 세조 12년(1467년) 졸(卒)하였다. 선조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지낸 정기룡(鄭起龍)의 계청(啓請 : 임금께 아룀)으로 신원(身元)이 회복(回復)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추증(追贈)되었다.

(註釋1) 왕유(王儒)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제5권에 기록된 왕유(王儒)의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왕유(王儒)는 본래의 성명이 박유(朴儒)이다. 자(字)는 문행(文行)이고,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처음에 궁예(弓裔)를 섬겨 원외랑(員外郞)이 되었고, 승진하여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다. 궁예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출가(出家)하여 산골짜기에 숨었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만나니 태조가 예(禮)로써 맞이하고 그에게 말하기를, “치리(致理)의 도는 오직 현자(賢者)를 구하는 데 있다. 지금 경이 오니, 부엄(傅巖)과 위빈(渭濱)의 사(士)를 얻은 것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冠)과 허리띠[帶]를 하사하고 국가 기밀의 중요한 관직을 관장하게 하였다. 공적이 있어 마침내 왕성(王姓)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엄(傅巖)
중국 옛 고장의 이름. 산서성(山西省) 평륙(平陸). 이곳에서 은거(隱居)하면서 담을 쌓는 역사(役事)를 하던 부열(傅說)이 은(殷) 나라 고종(高宗)의 부름을 받아 정승이 되었다.
▶위빈(渭濱)
중국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에 있는 개울로 위천(渭川)이라고도 한다. 강태공(姜太公)이 이곳에서 낚시하며 천하의 인재를 찾아 다니던 주나라 문왕(文王)을 만나고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封)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註釋2) 추증(追贈)
죽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올려 주는 것이며 조선 초기에는 문·무관(文武官) 6품 이상의 관원에 대하여 부(父)·조(祖)·증조(曾祖)의 3대(三代)를 추증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실직(實職) 2품 이상의 종친(宗親), 문·무관(文武官)의 부(父)·조(祖)·증조(曾祖) 3대에 한해 추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에는 ‘이증(贈)’이 있다.

(2) 전극창(全克昌)

자는 방언(邦彦)이다. 아버지 인(璘)과 경유(景裕)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사이에서 선조 6년(1573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체격과 국량(局量)이 건전하고 지모(智謀)와 도략(鞱略)이 출중(出衆)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벼슬이 없는 선비로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자 선조 33년(160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정기룡(鄭起龍)이 선조에게 공의 전공을 아뢰자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려 영세(永世)토록 미치게 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신병(身病) 치료차 제자들과 함께 동래(東萊) 온천(溫泉)을 다녀온 46일간의 기록인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에 의하면 “광해군 9년(1617년) 9월 3일 귀로(歸路)인 하양(河陽)에서 문인(門人)들과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맞이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임을 알 수 있다. 광해 13년(1621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에 제수(除授)되어 조정에서 사람을 얻었음을 축하하였다. 인조 5년(1627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북쪽 변두리에 급보(急報)가 있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영변부사(寧邊府使)를 겸해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남이흥(南以興)과 더불어 안주성(安州城)에 나가 후금(後金)군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안주성(安州城) 함락시 공(公)이 역전순절(力戰殉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남이흥(南以興)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註釋1) 도략(鞱略)
육도삼략(六韜三略)과 같은 말로 중국의 오래된 병서(兵書)를 가르킨다.
(註釋2) 제수(除授)
추천(推薦)에 의(依)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直接) 관리(官吏)를 임명(任命)함
(註釋3) 역전순절(力戰殉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충절(忠節)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을 뜻한다.

(3) 전주국(全柱國)

자는 이지(二之)이고 호는 충모(忠慕)이다. 처사(處士) 이헌(以憲)과 통정대부(通政大夫) 진보(進寶)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숙종 18년(1692년) 태어났다. 공(公)의 충효(忠孝)와 의행(懿行 : 좋은 행실)이 도내에 널리 알려져 숙종 37년(1711년) 특별히 임금이 내리는 명령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의 벼슬을 지냈고 또한 복호(復戶) 3결(三結)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영조 1년(1725년) 졸(卒)하였다.

(註釋) 3결(結)의 은전(恩典)
1만㎡인 1㏊를 1결로 계산하면 3결은 3만㎡이므로 9,075평에 해당하는 농토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받는 특별한 혜택을 나라로부터 받았다.

4. 죽산전씨(竹山全氏) 충경공파(忠敬公派) 경모재기(敬慕齋記)

이봉산(尼鳳山) 아래 마을을 봉산(鳳山)이라 하니 그윽하고 깊으며 넓고 아늑하여 좌우로 숲이 울창하고 앞에는 작은 들이 탁 트여 뽕나무와 삼(麻)이 있다. 우리 전씨(全氏)의 세거지(世居地)라 할 만하다. 타성(他姓)은 한두집에 불과하다. 그 마을 가운데에 재실(齋室)을 지어 바로 선조이신 휘(諱) 륜(倫)께서 스스로 호(號)를 지어 그 정자(亭子)에 편액(扁額)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군(府君)께서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죽산군(竹山君)에 피봉(被封)된 휘 전한(全僩)의 10세손이요.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용모를 갖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성품이 아이들과 더불어 놀면서도 위태로운 높이는 좋아하지 아니하고 천둥벼락처럼 무서운 형벌에도 굽히지 아니하였는지라. 장성(長成)하여 음직(蔭職)으로 조정에 나아가 직언(直言 : 바른 말)으로 밝게 하고자 하였으나 미움을 받아 성주로 귀양을 오니 성주목사가 공의 외종(外從)으로 특별히 가엽게 여겼다. 그 후로 임금이 그 충성을 깨닫고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였으나 끝내 서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자손들에게 이곳에서 살 것을 명(命)하였다. 그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편액(扁額)을 경모(敬慕)라 하니 대개 임금을 공경하고 선조를 사모하는 뜻을 취함이라. 공이 비록 멀리 외지에 쫒겨남을 보았으나 임금께 충성하고 애국하는 마음은 죽음에 이를지라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시대의 형편에 따라 핍박(逼迫)을 받을지라도 어느 누가 사모함을 버리리오. 효도하고 우애하고 천성으로 용서됨을 어찌 먼 날에 잊으며 오래지 않아서 소홀히 할 것인가? 이에 정자(亭子)의 문미(門楣)에 현판을 거는 까닭인지라. 하늘이 우리 문중에 재앙을 내리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가혹(苛酷)한가? 상화(喪禍 : 죽음의 재앙)를 겪어 기록이 없어졌으니 그 슬픔 한이 없고, 많지 않는 먼 후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정자(亭子) 또한 봄풀도 탄식을 맞은 듯하다. 5대손 휘 극창(克昌)이 이 땅의 형상(形象 : 모양)을 보고 집을 세내어 살았으나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니 선조 34년(1600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정기룡(鄭起龍)이 장계(狀啓)를 올려 추천하여 특별히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년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과 부윤(府尹) 이만성(李萬成)과 더불어 안주성(安州城)에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하니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의 군청 동쪽 신성(新城)에 있는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공의 손자 휘 주국(柱國) 또한 충효(忠孝)로 알려져 특별히 임금이 내리는 명령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의 벼슬을 받았고 복호(復戶)의 명이 있었다는 사적(事蹟 : 사건의 자취)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그후에 자손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고 교양(敎養)이 없어 말과 행동이 서투르고 무식(無識)하여 마침내 오래되지 못하여서 가승(家乘 : 한 집안의 기록)에는 있을지라도 백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기록이 남았드라. 증빙할 문헌이 없어 오늘날에 10여대(餘代)에 이르렀는지라. 집수는 겨우 20여호(戶)요 사람은 경우 40명에서 50명이니 실로 한탄(恨歎)할 바이라. 1932년 임신년 봄에 모든 종중원에게 묻고 의논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아서 대청 한 칸, 방 세 칸을 짓기 시작하여 수 개월이 지나 낙성(落成)의 공고(公告)를 하면서 잔을 잡아 집에 고(告)하고 이르기를 선현(先賢)의 재실이 많은 곳에서는 많은 뜻으로 이름하나 우리 종중같아서는 크게 다름이 있었는지라. 우리 경모재(敬慕齋) 휘 윤(倫) 할아버지께서는 실지로 성주에 입향하신 나의 입향조(入鄕祖)로 마땅히 날로 임금을 공경하고 조상을 깊이 사모함이 나라에 충성하고 효도를 쌓은 그늘이 드리워졌음이라. 이제 잔손(孱孫)들이 그 곳에 약간 스스로 살고 있는 바이나 하물며 지금 사회가 세계의 추세에 빠져 들어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는 것이 오래된지라. 우리들은 대개 그 선조를 경모하는 큰 뜻을 생각함으로 현판을 걸었노라. 여러 종인(宗人)들이 모두 이르기를 마침내 경모재(敬慕齋)로써 문미(門楣)에 거는 것을 승낙하고 거듭하여 종인(宗人)에게 일려 말하기를 이 집의 뜻이 깊지 않겠는가? 우리 잔손(孱孫)들로 이 재실에 오르는 자는 충효로써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권면(勸勉 : 타일러 힘쓰게 함)하며 할아버지는 손자를 계도(啓導 : 깨우쳐 이끔)하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곧 우리 할아버지의 신령스러운 영혼이 오르내리면서 충만(充滿)하니 내 어찌 며칠이 걸리지 않는 동안 후손에게 말하지 않으랴? 아무쪼록 각기 힘쓰고 힘쓸지어다. 감히 그 말을 써서 벽에 거노라.
 
1932년 임신년 음력 7월 상순
후손 재환은 손을 씻고 삼가 쓴다.

(註釋1)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 2년(1471년) 성종이 자신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한 공으로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뜻한다.
(註釋2)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을 뜻한다.
(註釋3) 복호(復戶)
조선 시대 때 군인(軍人), 양반(兩班), 충신(忠臣), 효자(孝子)의 일부(一部) 및 궁중의 노비(奴婢)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免除)하여 주던 일을 말한다.
(註釋4) 잔손(孱孫)
가냘프고 매우 약한 자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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