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경언재(景彦齋)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경언재(景彦齋)

경언재(쌍림면 안박실길67-9)

1. 경언재(景彦齋) 유래

 고령군 쌍림면 안박실길 67-9(신곡리 648-2번지)에 소재한 경언재(景彦齋)는  쌍림면 안림에서 경남 합천군 쌍책면을 지나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변에 위치한 신곡 2리 동회관 좌측에 난 도로를 따라 약 500m를 가면 깊고 큰 골짜기 박실마을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박곡문중(璞谷門中) 후손들이 입향조(入鄕祖) 처사(處士) 휘 광준(光峻)의 학덕(學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1990년 11월 창건(創建)한 재실(齋室)이다.

2. 건축형태
(1) 경언재(景彦齋)의 입구는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정문은 정화문(正和門)이라고 편액(扁額)되어 있고 외곽은 방형(方形)으로 토석(土石) 담장을 둘렀다.
(2)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으로 좌우는 각각 온돌방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있다.

3. 추숭(追崇)인물
(1) 김문기(金文起)
 초휘(初諱)는 효기(孝起)이고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이다. 조선 태종 때 호분시위사좌령사직(虎賁侍衛司左領司直)을 지낸 순(順)과 이조판서(吏曹判書) 문정공(文靖公) 효정(孝貞)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이에서 정종 1년(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白池里)에서 태어났다. 세종 8년(1426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1430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병조참의(兵曹參議)·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지냈다. 단종 1년(1453년) 형조참판(刑曹參判)를 거쳐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세조 2년(1456년)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사전에 발각되었을 때 공(公)만이 공초(供招 :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불복(不服)하였으며 영월군수(寧越郡守) 장남 현석(玄錫)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었다. 영조 7년(1731년) 복관(復官)되고 충의(忠毅)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정조 15년(1791년)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 제사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단)에 배향(配享)될 때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과 함께 공은 판서급(判書級)의 중신(重臣)이라는 이유로 ‘삼중신(三重臣)’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사육신(死六臣)’보다 먼저 정단(正壇)에 배향(配享)되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 “김문기(金文起)를 원사육신(原死六臣)으로 판정하여 사육신 묘역에 허장(虛葬)을 모셨고 의절사(義節祠)에 위패를 모셨다.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김천의 섬계서원(剡溪書院), 의성의 덕양서원(德陽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註釋)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端宗)의 릉(陵)인 장릉(莊陵)에 단종을 위하여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을 배식단(配食壇)이라 한다.
(2) 김광준(金光峻)
자는 준팔(俊八)이며 호는 언곡(彦谷)이다. 처사(處士) 창선(昌善)과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서 효종 1년(1650년)에 태어났다. 충신(忠臣)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으로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돈후한 성품과 예양(禮讓)의 덕을 지녔고 경서(經書)를 가까이 하면서 세상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산림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니 고을사람들이 ‘임하처사(林下處士)’라고 불렀으며 김녕김씨(金寧金氏) 박곡문중(璞谷門中)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숙종 11년(1685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1991년 경언재(景彦齋)를 세워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제향(祭享)하고 있다.
(註釋) 임하처사(林下處士)
벼슬이나 속세(俗世)를 떠나 산골이나 시골에 파묻혀 글읽기를 즐기며 지내는 선비를 말하며 산림처사(山林處士)와 비슷한 말이다.

4. 경언재기(景彦齋記)
우리 영남지방의 남쪽에 위치한 고령군은 본래 제일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물은 대가천이 굽이쳐 흐르고 산은 가야산이 웅장하고 서쪽에는 만대산이 우뚝 솟았고 그 아래 산맥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한 마을 이루니 이곳이 박곡리이며 김녕김씨(金寧金氏) 세거지(世居地)이다. 골짜기가 깊고 재실이 우뚝 서있으니 이름하여 경언재(景彦齋)라 하였다. 누구를 위해 지었던고? 옛날 처사(處士) 김녕김씨(金寧金氏)로 휘는 광준(光峻)이고 자는 응팔(應八)이며 호는 언곡(彦谷)이며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삼중신(三重臣)으로 배향된 충신(忠臣)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의 9세손이라. 공(公)은 일찍 언양(彦陽)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여 노년(老年)에 여기에서 은둔(隱遁)하시고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온 집안의 후손으로 영화로운 길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고 산림(山林)에 몸을 의탁하여 문학(文學)을 숭상하며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는 도(道)를 닦으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글읽는 것을 업(業)으로 삼고 고기잡이와 땔나무 하는 것을 즐기니 사람들이 모두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은자(隱者)이며 임하처사(林下處士)라고 하였다. 좌우에 뾰족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수려(秀麗)하고 소나무와 회나무는 울창하여 수십리에 감돌아 있고 길가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이곳이 김녕김씨의 선대의 땅이라고 하였다. 몇 해 전에 주손(冑孫) 연조(淵祚)가 그 종숙(從叔) 석만(錫萬)씨와 성심성의껏 선영(先塋)의 석물(石物)을 모두 갖추니 향인(鄕人)의 칭송(稱頌)이 자자(籍籍)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수백 여 년이 되었으나 아직 추모(追慕)할 장소가 없어 자손들이 지을 것을 도모한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하물며 주손(冑孫)의 종숙(從叔)이 재력(財力)을 많이 부담하고 그 종친(宗親)에게 묻고 상의(相議)하여 용대(龍大)씨와 영식(榮植)씨에게 공사 감독을 맡겨 여러 대(代) 동안 틈을 내지 못했던 일을 오래지 않아 성취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금년 봄에 준공(竣工)을 하고 후손 무기(武己)씨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스스로 생각건대 미천하고 용렬한 내가 어찌 감히 명가(名家)의 문미(門楣 : 문얼굴 위에 가로 대는 나무)에 글을 쓸 수 있으리오! 그러나 내가 듣고 보니 옳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선조을 위하여 비를 세우고 재실을 지으니 그 정성에 감동하여 삼가 한 마디말로 고(告)하노니 그 재호(齋號)를 경언(景彦)이라 하니 지은 뜻이 크도다. 공자께서 가로되 효도는 조상이 남긴 뜻을 잘 계승하고 조상의 사적(事跡)을 잘 기술하는 것이니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과 효도하는 도리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으리오? 또 대체로 보아서 집의 양식에 관한 제도와 집의 마룻대와 추녀끝이 지니는 자세가 당당(堂堂)하고 규모가 세세(細細)하고 미미(微微)한 데까지 두루 미치면서도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아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아 유가(儒家)의 고제(古制)를 깊이 본받았다. 매양 정화문(正和門)을 들어설 때마다 바람이 곱고 해가 길 때에 종족이 다함께 모여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고 화목(和睦)을 꾀하고 천륜(天倫)의 즐거운 일을 펴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이야기하며 예의를 익혀 성현이 남긴 법도를 완미(玩味)하고 농사짓는 이야기와 풍월(風月)을 읊조리면서 즐겁게 농사짓는 일을 별업(別業)으로 삼았다. 혹 거문고를 타며 바둑을 두고 혹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그윽한 정을 펴는 것이 다소 있고 각자 그 즐거움을 다하게 하였으며 즐거워하고 기쁘기가 한량없으며 화기(和氣)는 상서(祥瑞)를 이르게 하고 화수(花樹)의 봄빛이 원근에서 서로 비치면 스스로 한 집안의 원림(園林)을 이루게 될 것이니 어찌 낙양(洛陽) 사대부(士大夫)의 조망(眺望)에 양보하겠는가? 뒷뜰의 원숭이와 날짐승과 앞쪽에 있는 시내의 물고기와 새들과 봄 강 언덕의 꽃과 버들과 가을 하늘의 노을과 해오라기는 또한 이 재실 외관(外觀)의 화려(華麗)한 차림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시문(詩文)·서화(書畫)를 일삼는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재실(齋室)의 아름다움과 함께 논(論)할 바가 아니다. 다만 뒤에 오는 사람은 지금 세상 사람의 뜻을 잘 받들어 계승하는 것이 지금 세상 사람이 옛날 사람을 이어 받는 것 같이 하여 대대로 그 아름다운 가풍(家風)을 잇는다면 김씨 가문이 어찌 크게 번창하지 않겠느냐? 힘쓸지어다

경오(庚午, 1990년) 동지절(冬至節) 순천(順天) 김형원(金亨遠) 근기(謹記)

(註釋) 낙양(洛陽) 사대부(士大夫)의 조망(眺望)에 양보하겠는가?
주(周)나라 수도 낙양(洛陽)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경치와 조망(眺望)이 좋은 곳에 정자(亭子)를 지어 놓고 풍류(風流)를 즐겼는데 경언재(景彦齋) 주변 외관(外觀)의 화려(華麗)한 차림새 조망(眺望)도 그에 못지 않다는 뜻이다.

5. 경언재(景彦齋) 상량문(上樑文)
9대 묘역 가까운 땅에 오랫동안 재숙(齋宿)하는 곳이 없어 하늘이 비장(秘藏)하여 아껴 둔 한 구역 임학(林壑)에 기다렸다가 집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고 함께 분암(墳庵)을 짓고 세천(歲薦)을 공손히 올린다. 크게 생각해 보니 언곡처사(彦谷處士) 휘(諱) 광준(光埈)은 김녕(金寧)의 화벌(華閥)이자 고령의 오래된 가문(家門)이다.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는 자기의 몸을 희생(犧牲)하여 충절(忠節)을 다하였고 특히 사육신(死六臣)의 의열(義烈)에 참여하였으며 공의 장남 휘 현석(玄錫)이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재직 중 아버지를 따라 순절(殉節)하였으니 능히 만세(萬世)의 강상(綱常)을 붙들었네. 섬계서원(剡溪書院)와 덕양서원(德陽書院)에 함께 부조(不祧)하는 원묘(院廟)를 세웠고 장릉(莊陵)과 오례서원(悟禮書院)에 모두 배향하는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 서직(黍稷)이 이미 향기가 나고 조두(俎豆)가 또한 정결하다. 중세(中世)에 운(運)이 쇠진(衰盡)하여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인 언양(彦陽)을 버리고 만년(晩年)에 은둔(隱遁)을 즐겨 박곡(璞谷)에 토구(菟裘)를 마련하였다. 영예(榮譽)와 복록(福祿)에 대한 생각을 끊음에 세상 사람들이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은자(隱者)라고 칭하였고 고기잡이와 땔나무를 하면서 우거(寓居)하니 세상 사람들이 운림고사(雲林高士)라고 일컬었다. 은둔하면서도 나라를 잊지 않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인륜(人倫)을 어지럽히지 않았으며 선조의 교훈이 항상 있음에 충성과 효도를 다하여 실행하였다. 후손에게 복록(福祿)이 대단하니 가히 선조께서 선(善)과 인(仁)을 쌓으신 것을 알겠도다. 이슬과 서리를 밟음에 두렵고 떨려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렵고 송추(松楸 : 묘소)와 선영(先塋)을 살핌에 부족하나마 경건하게 참된 정성을 쏟았도다. 다행히 한 문중이 합심(合心)함에 힘입어 백 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행하였네. 윗 기둥과 아래 집은 능히 사시(四時)의 바바람을 덮어 가리고 따뜻한 방과 서늘한 대청은 가히 두어 고을의 손님과 벗을 불러 모을 수 있네. 불운(不運)과 행운(幸運)이 왕복(往復)하는 것은 천운(天運)의 순환함에 어긋나지 않고 숨은 공덕(功德)을 드러내 밝히는 사람의 일 또한 드러나고 묻힘에 운수가 있게 마련이도다. 그나마 두어줄 거친 송사(頌辭)를 지어 육위(六偉)의 긴 들보를 들어 올리는 것을 돕노라.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낙동강과 대니산 봉우리에 아침 해가 돋아 붉어오네 
낚싯대 손에 잡고 세상일 잊었는데
강산(江山)은 삼공(三公) 자리 줘도 아니 바꾸리라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함박산 빛깔은 쪽풀처럼 푸르고
돌속에 안씨 구슬 깊이 간직하나
지금까지 쪼지 않아 깨닫는 사람이 적구나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만대산이 한껏 높아 올라갈 수 없어라
수풀밑에 봄이 깊어 고사리가 푸르니
사람들 길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나란히 기억하네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가야의 물이 정기(精氣)를 모아 우륵을 탄생했네
냇물위에 커다랗게 음악당을 지었으니
당일에 탄금소리 귀에 쟁쟁 들려오네
어영차 들보를 위쪽으로 들어 올리니
푸른 하늘 물같이 티끌이 없어졌네
우리 한국 어느 날에 화합하여
남과 북이 서로 통하여 병기(兵器)를 버릴까?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들어 내리니
문앞 큰길위에 수레와 말이 통행하네
봄과 가을 좋은 때에 시인들을 맞이하여
술 거르고 닭을 삶아 대아(大雅)편을 노래하네

삼가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땅위 신령(神靈)은 집터를 보존하고 하늘의 신명(神明)은 끝까지 집을 보호하고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예법과 정성을 극진히 하여 선조의 은혜와 공로를 잊지 말고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먼 친족에 이르기까지 종족의 돈독(敦篤)함을 더욱 생각하소. 마을 앞의 교목(喬木)은 특별히 가세(家世)의 오래됨을 상징하고 이랑위에 쟁기질은 오직 자손에게 안일(安逸)함을 물려주네. 마을에는 인후(仁厚)한 예속(禮俗)을 숭상하고 재실에는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는 유풍(儒風)을 일으키소서.   

동방기원 4325년 백로절(白露節)에 성균관 전학 합천 이상학(李相學) 짓다.

(註釋1) 재숙(齋宿)
제관(祭官)이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내던 일을 말한다.
(註釋2) 임학(林壑)
산림의 깊숙하고 으슥한 곳.
(註釋3) 분암(墳庵)
묘를 보살피기 위해 세운 암자를 뜻한다.
(註釋4) 세천(歲薦)
해마다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註釋5) 화벌(華閥)
세상에 드러난 높은 문벌(門閥)을 뜻한다.
(註釋6) 서직(黍稷)
제사에 쓰는 기장과 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註釋7) 조두(俎豆)
조는 고기를 올려 놓는 제기(祭器)이고, 두는 나무로 만든 제기(祭器)이다.
(註釋8) 토구(菟裘)
토구지지(菟裘之地)의 준말로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는 곳이나 노후에 여생을 보내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註釋9) 운림고사(雲林高士)
산림에 은둔한 인격이 고결한 선비를 뜻함
(註釋10) 삼공(三公)
조선시대 정1품 관직인 좌의정·우의정·영의정을 합하여 부르던 칭호이다.
(註釋11) 안씨 구슬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가 지은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말하는 것으로 자손을 훈계한 글로 격언(格言)과 아훈(雅訓)이 많다.
(註釋12) 대아(大雅)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대아(大雅)는 총 31편이며 조회에 사용되던 음악으로 축복과 훈계를 노래한 가사이다
(註釋13) 유풍(儒風)
옛날부터 전(傳)해 오는 풍속(風俗) 즉 유속(流俗)을 뜻한다.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