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모졸재(慕拙齋), 추우재(追友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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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모졸재(慕拙齋), 추우재(追友齋)

1. 모졸재(慕拙齋), 추우재(追友齋) 유래(由來)

(1) 모졸재(慕拙齋)


고령군 쌍림면 개실1길 16에 소재한 이 건물은 화개산(花開山) 자락, 점필재(畢齋) 사당(祠堂)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점필재(畢齋)의 7세손인 헌릉봉사(獻陵奉事)를 지낸 졸와공(拙窩公) 김시락(金是洛)의 효우(孝友)를 계승하고 그 겸졸(謙拙)을 본받기 위하여 후손들이 1964년 6월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마을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모졸재를 끼고 돌면 등산로 입구가 있고 바로 뒷편에 싸움소 사육장이 있다.

(2) 추우재(追友齋)


고령군 쌍림면 개실2길 20-1에 소재한 이 건물은 도연재(道淵齋)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가면 깨끗이 단장된 돌담길이 이어지고 전통혼례체험장이자 한옥 민박으로 활용되는 화산재(花山齋)를 만난다. 화산재(花山齋)를 지나면서 산자락을 향해 꺾어진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서면 맨 끝 산비탈에 마치 사당(祠堂)처럼 생긴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서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추우재(追友齋)이다. 바로 옆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뒤로는 대나무 숲과 송림이 아름답다. 점필재(畢齋)의 7세손 오우당공(五友堂公) 김시수(金是洙)의 효도와 우애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48년 4월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2. 건축형태


(1) 모졸재(慕拙齋)


민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편 두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두칸을 터서 큰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루 위에는 저존당(著存堂)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2) 추우재(追友齋)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아담한 건물이다. 왼쪽 한 칸은 대청마루로 이용하고 오른쪽 두 칸은 터서 큰 방으로 사용한다. 둥근기둥이 박힌 대청마루에 앉으면 마당 한 쪽에 심어진 커다란 배롱나무와 담장 너머로 마을의 오른편이 훤히 내려다보여 좋다. 추우재(追友齋) 담장 너머로 황토로 별채를 따로 지어 민박으로 사용한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1) 졸와공(拙窩公) 김시락(金是洛)


자는 희철(希哲)이고 호는 졸와(拙窩)이다. 처사(處士) 김이(金彛)와 통덕랑(通德郞) 창하(昌夏)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효종 9년(1658년) 태어났다. 다섯 형제가 조용하고 외진 곳에 집 몇 칸을 짓고 ‘오우당(五友堂)’으로 편액(扁額)하였는데 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가 오우당기(五友堂記)를 지어 효우(孝友)를 찬미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렇게 말했다. “ 어릴 때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우에게 우애하는 것으로 제일 큰 일로 삼았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아버지를 잃어 편친(偏親 : 홀어머니)을 봉양하며 그 성효(誠孝)를 극진히 하였다. 뭇 아우를 기르며 그 우애를 극진히 하고 또 하나의 집을 지어서 형제들과 즐겁게 지내는 곳으로 삼았다. 드나들 때는 서로 따르고 질병이 들었을 때는 서로 부지(扶持)하며 자리를 나란히 앉았고 이불을 함께 덮고 잠을 잤다. 형제가 번갈아 화답하고 서로 사랑하고 나쁜 점은 서로 본받지 않았다. 매양 좋은 날을 만나면 수레를 타고 당(堂)에 올라 노래자(老萊子)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니 앞뒤로 환하게 비치고 사안(謝安)의 뜰에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좌우에 줄지어 늘어선 것 같았다”. 숙종 17년(1691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숙종 27년(1701년)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도천(道薦)을 받아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고 숙종 34년(1708년)에 후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숙종 36년(1710년) 헌릉봉사(獻陵奉事)로 승서(陞敍)되었다. 숙종 36년(1710년) 6월 6일 향년 53세로 졸(卒)하였다.
(註釋1) 서로 사랑하고 나쁜 점은 서로 본받지 않았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형과 아우는 서로 사랑할 것이오  ‘형과 아우들이여,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요, 서로 도모하려 하지 말지어다(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註釋2) 노래자(老萊子)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니
노래자(老萊子)는 춘추 시대 말기 초(楚)나라 사람으로 은자(隱者)이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나이 일흔에 어린 아이가 입는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린 일화는 유명하다. 이것을 채의희(彩衣戱)나 영아희(嬰兒戱) 또는 노래희(老萊戱)라 부른다. 중국 24 효자(孝子) 가운데 한 사람이다.
(註釋3) 사안(謝安)의 뜰에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훌륭한 자제를 뜻한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出衆)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 : 지초와 난초)과 옥수(玉樹 : 아름다운 나무)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2) 오우당공(五友堂公) 김시수(金是洙)
자는 희성(希聖)이고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처사(處士) 김이(金彛)와 통덕랑(通德郞) 창하(昌夏)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현종 2년(1661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12세에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자 모친과 아들 형제들이 서로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너무도 고독하여 교육하며 독려(督勵)할 도리가 없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모범(模範)이 있어서 그 양심(良心)을 감발(感發)시켜 모친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였다. 사랑과 공경이 모두 흡족하고 형제들이 번갈아 화합하여 서로 사랑하고 나쁜 점은 서로 본받지 않았다. 다섯 공이 모두 성취하자 집을 한 채 짓고 그 가운데 거처하며 밥상을 이어서 밥을 먹고 침구(寢具)를 함께 덮고 지내면서 드나들 때 서로 부축해주니 세상 사람들이 오우당(五友堂)이라 불렀다. 한계(寒溪) 오공(吳公)이 기문(記文)을 지어 이를 찬미(讚美)하였다. 더구나 선대(先代)를 위하고 종족(宗族)을 도우며 방계(傍系) 가운데 제사를 이을 수 없는 선조가 있으면 자기의 재물을 내어서 도와주곤 하였다.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은 당시 훌륭한 선비들이었는데 문장과 예법을 강론(講論)할 때에는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은 행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몸소 실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들은 진정 군자다운 사람으로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영조 5년(1721년) 졸(卒)하였다.

4. 모졸재기(慕拙齋記)  


고령의 가곡(佳谷)에 김씨들이 세거(世居)하여 나라에서 우뚝 드러난 씨족이 된 것은 실상 점필재(畢齋) 선생으로부터이다. 선생의 7세손 휘(諱) 시락(是洛)께서 명릉(明陵)의 시절을 맞이하여 효도와 우애로서 조정에 천거(薦擧)되어 여러 번을 받아 벼슬이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은거하여 강학(講學)으로 삶을 보내니, 좋아하는 것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요, 왕래하는 이들은 당대(當代)의 도를 닦는 무리였다. 마음으로 보존하여 행실로 나타내는 것은 선인(先人)을 받들고 후인(後人)을 포용하며 궁핍한 자를 돕는 일이 아님이 없었다. 대개 바탕과 문체(文體)가 두루 갖추어졌지만 평상시에 심히 스스로 겸손과 졸렬함에 자처하여 현능(賢能 : 어질고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 남에게 앞서려 하지 않으셨다. 만년에 일찍이 자호(自號)를 짓기를 ‘졸와(拙窩)’라 하곤 하셨다. 공이 돌아가신 200여년 뒤에 여러 후손들이 묘소에 올리는 시제(時祭)는 심히 공경히 지내되 오직 재실(齋室)이 없어 여러 해 동안 한으로 여기더니, 임인년(1962년)에 서로 모의하여 네 칸의 집을 마을의 동편에 짓기로 하였다. 이윽고 공사가 끝나자 편액을 걸기를 ‘모졸재(慕拙齋)’라 했으니 대개 공이 자호(自號)한 바를 인하여 그 오래도록 추모하고자 함이다. 극수(克秀)와 태인(泰仁) 두 사람이 와서 종인(宗人)의 뜻을 전하면서 나의 글을 구하거늘 내가 김씨들과는 세세(世世 : 대대)로 동향(同鄕)에서 우호적으로 지냈고 공의 행적은 진실로 이미 귀에 익숙하여 마음으로 사모했었다. 지금 비록 나의 글이 족히 이 재실을 값지게 할 수 없음을 알지만 의리로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대개 세도(世道)가 변함으로부터 민생(民生)에 한이 큰 것은 향리의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이 무너지고 흩어지며 떠돌아다니고 헤어져 표연(飄然 : 훌쩍 나타나거나 떠나가는 모양)히 굴러다니는 쑥대가 그칠 바 없음 같지 않음이 없더니, 오직 김씨들은 안도(安堵)하여 여전히 분수(分數)를 지키고 규약을 따르며 농부는 들에서 일하고 선비들은 시서를 외우며 선대를 위한 제사는 서리 이슬처럼 더욱 경건히 했다. 종친들의 친목의 즐거움은 조석으로 폐하지 않으니, 이 어찌 다만 김씨들의 어진 덕이 타인들보다 뛰어남이 있음은 또한 공의 효우(孝友)와 겸졸(謙拙 : 겸손과 질박함)이 남긴 유택(遺澤)이 그렇게 인도하여 폐함이 없게 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저 선조의 유택이 무궁하면 자손들의 경모의 정도 마땅히 무궁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금일에 이 재실을 짓고 이름을 지어 이것을 알리는 까닭이다. 비록 그러나 집을 짓고 이름을 짓는 것은 그 외형이요 사모하는 것은 그 실속이니, ‘사모한다’는 것은 또한 한갓 겉으로만 사모하는 것을 이름이 아니다. 오직 공경하고 또 능히 실지로 일삼는 바가 있어 그 효우를 계승하고 그 겸졸을 본받아 공의 유풍(遺風)과 여열(餘烈)이 끊이지 않고 더욱 펴지게 한 후에야 바야흐로 참으로 공을 사모하고 또 그 재실의 이름이 가진 뜻에도 거의 어긋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오호라! 효우(孝友)의 도가 쇠함으로부터 세상에 아비도 없고 형도 없는 작태가 연이어 나오고 겸양의 풍습이 사라지니, 지식을 자랑하고 기교를 꾸미는 무리가 분연히 일어났다. 지금에 국가가 패망하고 우리의 도가 무너진 것은 그 근원을 살펴본다면 애당초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다. 공과 같이 어진 분은 비록 추존(推尊)하여 이 세상에 자랑하여 사람마다 함께 사모케 함이 마땅하거늘, 어찌 다만 그 자손들만의 본보기로 삼아 사사로이만 존모(尊慕)하려 하는가.

갑진년 유대절(流大節 : 6월)에 향후생(鄕後生) 성산(星山) 이헌주(李憲柱)는 삼가 짓다.

(註釋1) 명릉(明陵)의 시절
명릉(明陵)은 숙종(肅宗)의 능호(陵號)이다. 따라서 명릉(明陵)의 시절은 숙종 때를 말한다.
(註釋2) 유택(遺澤)
후세(後世)까지 남아 있는 은혜(恩惠)
(註釋3) 유풍(遺風)
후세(後世)에까지 남겨진 교화(敎化)
(註釋4) 여열(餘烈)
조상(祖上)이 대대(代代)로 남겨 놓은 일
(註釋5) 추존(推尊)
받들어 존경하다

​일선김씨 모졸재 개실1길16

5. 추우재기(追友齋記) 
글에 이르기를, “거칠어진 묘소에 와서 애통한 정을 뿌리는 것을 ‘추원(追遠)’이라 한다.”하니, 진실로 추모하지만 그 의탁할 바가 없으면 사모하는 정이 공허해질 뿐이다. 오직 우리 종선조(從先祖) 오우당공(五友堂公 : 김시수)께서는 문충공(文忠公 : 점필재 김종직)의 가문 내에서 그 보고 들은 바가 시례(詩禮)의 가르침과 인륜(人倫)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때문에 습관이 성품과 함께 굳어져 효도와 우애가 집안에서 인정받고 명성이 세상에까지 퍼져가니, 이른 바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 사이는 문학(文學)에 있어서 천성(天性)이다’는 말에 해당된다. 공의 형제는 다섯인데 공은 그 중 둘째로 재실(齋室)을 지어 오우당(五友堂)이라 이름하고 상(床)을 연이어 즐기며 한 지붕에서 학문을 연마하시니 옛 춘진(椿津)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한계(寒溪) 오공(吳公 : 휘는 선기)이 기문(記文)을 지어 이를 찬미한 바 있다. 이제 공이 가신지 200여년이 되었는데 우리 가문의 여론이 효도와 우애를 말하면 하면 반드시 공을 거론하니, 그 남겨진 풍도와 명성이 오히려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음이 있을진져! 공의 후손들의 서로 더불어 꾀하여 이르기를, “우리 할아버지 재실이 허물어진지가 이미 몇 년이 지났으나 한 칸의 집조차 없어 경모(敬慕)의 정을 풀 곳이 없으니 어찌 후손의 책임이 아닐 손가?”하거늘, 모두가 “그렇다”고 답하고서 드디어 각각 주머니를 털어 거처하던 부락 내의 시원한 언덕에 4개의 기둥으로 3칸의 집을 짓기로 했다. 정해년(1947년) 봄에 이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을 알리니 재력(財力)이 계속 충당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완성하고서 나에게 재실 이름을 묻거늘 내가 “추우재(追友齋)라 하면 어떨까?”라 했다. 만일 오우당공(五友堂公)께서 당일에 계셨다면 스스로도 허락하셨을 것이다. 진실로 능히 공의 마음과 공의 도를 체득(體得)했다면 종족간에 화목도 또한 이 우애를 미루어 나가면 될 것이다. 행여 이에 힘쓰지 아니하고 이해(利害)로 서로 비교하고 시비(是非)로 서로 꾀한다면, 비록 우뚝한 재각(齋閣)이 사람들의 이목을 번쩍이게 하나 선현(先賢)을 사모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오호라! 세월이 흘러 만물도 바뀌니 공의 유적이 흩어져서 그 깊은 말씀과 자상한 행실이 전해지지 않게 되어 지금에는 모두 고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본(大本 : 크고 중요한 근본)이 존립해 있음이 이와 같다면 나머지는 상상으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존록(彛尊錄)』 한 권은 우리 가문의 대보(大寶)이다. 이는 공이 평일에 받들던 바이니 이제 이 재실에 거처하여 이 책을 강습하여 뜻을 가다듬고 행을 닦는다면, 이것이 진실로 공을 사모하는 도일 것이다. 후대 자손들이 반드시 보고 감흥(感興)할 것이니, 어찌 공과 같은 분이 지금에 다시 나지 않으리라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종족들은 힘쓸지어다. 내가 비록 노쇠했으나 장차 눈을 부비면서 성취하리라. 이에 기록한다.

무자년 4월 종후손(從後孫) 태진(泰鎭)은 삼가 기록한다.

(註釋1) 춘진(椿津)의 풍도(風度)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양파(楊播)의 집안은 대대로 순후하고 의리와 겸양을 돈독히 하여, 형제가 서로 섬기는 것을 부자간에 섬기는 듯이 하였다. 양춘(楊椿)과 양진(楊津)은 공손하여, 형제가 아침이 되면 대청에 모여서 종일 마주한 채 안에 들어가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을 경우 모이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대청에다 종종 가림막을 설치해서 잠자리를 만든 뒤, 가서 눕고 담소도 나누었다.〔楊播家世純厚 竝敦義讓 昆季相事 有如父子 椿津恭謙 兄弟旦則聚於廳堂 終日相對 未嘗入內 有一美味 不集不食 廳堂間往往幃幔隔障 爲寢息之所 時就休偃 還共談笑〕”라고 하였다.


일선김씨 추우재 개실2길20-3

 

자료제공 : 문충공파 종친회장
 김년수(金年秀)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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