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배씨(星山裵氏) 매곡공후(梅谷公后) 승암파(勝岩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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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성산배씨(星山裵氏) 매곡공후(梅谷公后) 승암파(勝岩派)

모의재(덕곡면 승암2길 22-3)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성산배씨(星山裵氏) 매곡공후(梅谷公后) 승암파(勝岩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지타(祗沱)로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촌 중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으로 다른 5부 촌장(村長)들과 함께 기원전 57년 갑자년(甲子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 초대(初代) 왕(王)으로 추대(推戴)한 공(功)으로 신라개국좌명일등원훈공신(新羅開國佐命一等元勳功臣)이 되었으며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올랐다. 유리왕 9년(32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을 한지부(漢祗部)로 승격시키고 배씨(裵氏)를 사성(賜姓)받게 되면서 모든 배씨(裵氏)의 시원(始原)이 되어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배지타(裵祗沱)에 연원을 두며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세거지(世居地)와 선조(先祖)의 작호(爵號)를 따라 경주배씨(慶州裵氏)에서 분성(盆城), 성주(星州),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등으로 분관(分貫)하였다.


(2) 경주배씨(慶州裵氏)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무장(武將)으로 초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다.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膽力)이 있어 벼슬이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弓裔)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조(太祖) 즉위 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고려가 도읍을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길 때 개주도체찰사(開州都體察使)가 되어 새 서울 건설에 큰 업적을 세웠고 벼슬은 대상행이조상서겸(大相行吏曹尙書兼) 순군부령도통병마대장(徇軍部令都統兵馬大將)에 이르렀다. 태조 19년(936년) 졸(卒)하였다. 묘소는 칠곡군 지천면 낙산리 가락산에 있다. 성종 13년(994년)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어 태조(太祖)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다.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등 사태사(四太師) 네 분의 동상(鐵像)을 만들어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에 사당(祠堂)을 짓고 모시었다. 그 뒤 마전(麻田 : 지금의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소재)의 숭의전(崇義殿), 평산(平山)의 태사사(太師祠),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등에 배향되었다. 조선 영조 16년(1740년) 가을에 송도(松都) 남문루(南門樓)에 영조가 행차(行次)하여 고려명신(高麗名臣)을 추모하고 하교(下敎)하기를 “그들의 후손은 지손(支孫)과 서손(庶孫)을 막론하고 군교(軍校)의 역(役)을 면하게 하라”하였다. 신라 6부 촌장 중 하나인 배지타(裵祗沱) 이후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건국공신(建國功臣)인 배현경(裵玄慶)을 모든 배씨의 중시조(中始祖)로 삼아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3) 성주배씨(星州裵氏) 시조(始祖) 배위준(裵位俊)


 태사(太師)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이후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정조 24년(1800년) 경신년(庚申年)에 발간된 성산배씨 파보(派譜)부터 고려 중엽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을 지낸 배위준(裵位俊)을 성주배씨(星州裵氏)의 시조(始祖)로 모신다.


(4)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


①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서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②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신라 개국(開國) 원훈(元勳 : 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 )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와 고려 개국(開國) 원훈(元勳)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의 뒤를 이어 조선 개국(開國)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 등으로 인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칭(稱)을 받게 되었다.


(5) 성주배씨(星州裵氏) 분파(分派)


 5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아들 6세 배문적(裵文迪), 배무적(裵武迪) 형제로 갈리어져 크게 번창하였으며, 6세 배문적(裵文迪)의 후손인 9세 배규(裵規)의 화당공파(花堂公派), 배구(裵矩)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배현(裵俔)의 진사공파(進士公派), 배유(裵裕)의 녹야당공파(綠野堂公派), 12세 배신(裵紳) 낙천공파(洛川公派), 6세 배무적(裵武迪)의 후손인 11세 배극렴(裵克廉)의 정절공파(貞節公派), 배극명(裵克明)의 미은공파(薇隱公派) 등으로 크게 분파(分派) 되었다.


(6) 성주배씨(星州裵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주배씨는 123가구 31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낸 배선보(裵善輔)의 후손은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배번(裵藩)의 후손은 덕곡면 본리리 승암(承巖)마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던 배즙(裵楫)의 후손은 덕곡면 노2리 서유재마을에, 진사(進士)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후손은 개진면 인안2리에 세거하고 있다. 그밖에 배극렴(裵克廉)의 후손은 개진면 반운동에, 배윤조(裵胤遭)의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배문회(裵文繪)의 후손은 운수면 화암리에, 배환극(裵煥克)의 후손은 운수면 월산리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배인경(裵仁慶)
 상서좌복야(尙書左僕寺) 원서(元舒)와 태전(太傳) 원순(元淳)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서원한씨(西原韓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아가며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학업에 나아갔는데 학문이 숙성(夙成 :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육체적 발육(發育)이 빨라 어른스러움)하여 13세 때 벌써 문장이 뛰어났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선임되었는데, 숭문전(崇文殿)에서 임금을 모시고 숭문전 첨지(僉知) 신맹섭(申孟攝), 승선(承宣) 김구락(金九洛), 기거주(起居注) 이당진(李唐珍), 사업(司業) 박규두(朴奎斗) 등과 더불어 홍범(洪範)과 예기(禮記), 월령(月令)과 중용(中庸)을 강의(講義)하였는데 공의 해석이 매우 정밀하다 하여 임금이 금 이십냥과 비단 열필을 하사하니 그때 공의 나이가 28세였다.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충렬왕(忠烈王) 어전에서 왕명(王命)으로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충선왕(忠宣王)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러 공이 연로하므로 사직(辭職)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충선왕이 이르기를 “경은 누대(累代)에 걸친 공신(功臣)의 자손(子孫)이고, 또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은 노신(老臣)으로서 지금 어찌하여 짐을 멀리하려 하는가.” 하고 궤장(几杖 :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공이 다시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마지못해 이를 윤허(允許)하고 공(公)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 흥안은 성주의 옛 지명)에 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緣由)로 성주(성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던 수관조(受貫祖 : 관향을 받은 조상)가 되었다. 후손들은 재실인 흥덕재(興德齋)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유업(遺業)을 추모하고 있다. 아들 문적(文迪)은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軍機)를 맡아본 국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樞密院)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장손(長孫)인 용성(用成)은 종2품인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냈다.


② 배용성(裵用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지내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진 인경(仁慶)의 손자이며 추밀원(樞密院)에서 벼슬을 하였던 문적(文迪)의 장남으로 고려 시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軍事機密)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냈다.


③ 배규(裵規)


 자는 중원(仲員)이고 호는 화당(花堂)이다. 진손(晋孫)과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고려말에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우왕 3년(1377년) 정사(丁巳)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우왕 8년(1382년) 임술방(壬戌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과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냈다. 그후 조선 세종조(世宗朝)에서 지례현령(知禮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벼슬이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사림(士林)들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며 묘는 성주군 용암면 계상동에 있다. 순조 9년(1809년) 삼강서원(三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아들 배윤(裵閏)과 배한(裵閑)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父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주목(星州牧)편에 기록되어 있다.


(註釋) 관서부자(關西夫子)
원래 중국 후한(後漢) 때의 양진(楊震)을 가리킨다. 양진(楊震)은 성품이 몹시 청렴결백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 특히 밝아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칭하였다. 배규(裵規)를 양진(楊震)에 빗대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2) 조선시대


① 배한(裵閑)


 자는 이습(而習)이다. 대사간(大司諫) 규(規)와 우대언(右代言) 승득(承得)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와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종 1년(1419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제수(除授)된 후 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비서각(秘書閣) 직각(直閣)·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좌사간(左司諫) 겸(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② 배윤겸(裵允謙)
 사간원(司諫院) 좌사간(左司諫) 한(閑)과 참의(參議) 원지(元之)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화순최씨(和順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서각(秘書閣) 주서(注書) 와 춘추관(春秋館)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으나 공의 내종(內從)인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가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주륙(誅戮)당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으나 세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조 7년(1462년) 태일전(太一殿)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입직(入直)한지 6일만에 사임하고 귀향하여 관하리(管下里) 영하금원(嶺下琴院)에서 동지(同志) 사우(士友)들과 춘추(春秋)를 강론(講論)하였다.
(註釋) 내종(內從)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는 도총제(都摠制) 김추(金錘)와 배윤겸(裵允謙)의 조부로서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규(規)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고려 우왕 9년(1383년) 태어났다. 따라서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어머니는 배윤겸(裵允謙)의 고모가 되신다.


③ 배숙(裵璹)
 자는 수옥(壽玉)이며 호는 매곡(梅谷)이다. 장사랑(將仕郞) 경보(景輔)와 경화(慶華)의  따님인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이에서 중종 11년(1516년) 태어났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인이다. 명종 13년(1558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후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보우(普雨)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총애를 받아 궁전을 드나들며 포교하자 이를 탄핵하는「척요승보우소(斥妖僧普雨疏)」를 올렸다. 스승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죽자 심상(心喪) 3년을 치렀다. 명종 19년(1564년) 이황(李滉)의 추천으로 승평교수(昇平敎授)가 되어 후배의 육성에 힘썼다. 향리로 물러난 뒤에는 정사를 지어 『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을 중심으로 후생에게 강론하였고, ‘성정수제(誠正修齊)’의 넉자를 써서 걸어놓고 성의·정심·수신·제가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선조 22년(1589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매곡집(梅谷集)』4권이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암공(捿岩公) 배번(裵藩)이 선향지(先鄕地)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대리(新岱里)에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난을 피하여 상승암(上勝巖)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농토가 넓고 기름진 옥토(沃土)를 찾아서 본리2리로 전거(轉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배부형(裵富亨)
 자는 군팔(君八)이고 영기(永己)와 석애(錫愛)의 따님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광해군 10년(1618년) 태어났다. 재기(才氣)가 매우 두드러지게 뛰어나며 크고 훌륭하여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고을 안의 인재를 천거하여 호군(護軍)의 지위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향리로 돌아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 16년(1638년) 졸(卒)하였다.


② 배기석(裵基奭)
 자는 무약(武若)이며 족보명은 배석휴(裵奭烋)이다. 아버지 학구(鶴九)와 성산이씨(星山李氏) 어머니 사이에서 고종 24년(1887년) 4월 14일 고령군 덕곡면 원송동에서 태어나 숙부인 배학천(裵鶴天)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일제(日帝)는 공에게 덕곡면 가륜동(加倫洞)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를 적용하여 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1956년 3월 5일 졸(卒)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追敍)하였고 ‘항일투사유공자훈장(抗日鬪士有功者勳章)’을 수여하였다.


(2) 근·현대인물


① 배태남(裵泰南 1916년) : 일본 광도현(廣島縣) 한국상공회의소 회장
② 배태상(裵泰祥 1931년) : 예비역 육군대령
③ 배해동(裵海東 1931년) : 한국자동차보험 안동지점장
④ 배창환(裵昌桓 1936년) : 일본 나라현(奈良縣) 한국상공회의소 회장
⑤ 배정동(裵丁東 1937년) : 대구카톨릭대 의대교수, 의학박사
⑥ 배의표(裵義杓 1939년) : 고령농업협동조합 조합장
⑦ 배철동(裵喆東 1946년) : 한국주택은행 지점장
⑧ 배호철(裵浩喆 1950년) : 제3대 고령군의회 부의장
⑨ 배영표(裵英杓 1951년) : LG전자 상무이사
⑩ 배임표(裵壬杓 1953년) : 신학대학교 교수
⑪ 배달표(裵達杓 1955년) : 서울보증보험 지점장
⑫ 배현동(裵顯東 1961년) : 치과병원장
⑬ 배장곤(裵長坤 1964년) : 구미1대학 교수, 공학박사
⑭ 배수환(裵壽桓 1966년) : 국정원 서기관
⑮ 배상곤(裵相坤 1969년) : 경운대 교수, 공학박사

자료제공 : 후손 배장호(裵長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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