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배씨(星山裵氏) 비순위공후(備巡衛公后) 진사공파(進士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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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성산배씨(星山裵氏) 비순위공후(備巡衛公后) 진사공파(進士公派)

낙산서원(개진면 치산길 128-20)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지타(祗沱)로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촌 중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으로 다른 5부 촌장(村長)들과 함께 기원전 57년 갑자년(甲子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 초대(初代) 왕(王)으로 추대(推戴)한 공(功)으로 신라개국좌명원훈공신(新羅開國佐命元勳功臣)이 되었으며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올랐다. 유리왕 9년(32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이 한지부(漢祗部)로 개칭(改稱)되었고 배씨(裵氏)를 사성(賜姓)받게 되면서 모든 배씨(裵氏)의 시원(始原)이 되어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배지타(裵祗沱)에 연원을 두며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세거지(世居地)와 선조(先祖)의 작호(爵號)를 따라 경주배씨(慶州裵氏)에서 분성(盆城), 성주(星州),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등으로 분관(分貫)하였다.


(2) 경주배씨(慶州裵氏)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


초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다.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膽力)이 있어 벼슬이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弓裔)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조(太祖) 즉위 후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고려가 도읍을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길 때 개주도체찰사(開州都體察使)가 되어 새 서울 건설에 큰 업적을 세웠고 벼슬은 대상행이조상서겸(大相行吏曹尙書兼) 순군부령도통병마대장(徇軍部令都統兵馬大將)에 이르렀다. 태조 19년(936년) 졸(卒)하였다. 성종 13년(994년)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어 태조(太祖)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다.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등 사태사(四太師) 네 분의 동상(鐵像)을 만들어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에 사당(祠堂)을 짓고 모시었다. 그 뒤 마전(麻田 : 지금의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소재)의 숭의전(崇義殿), 평산(平山)의 태사사(太師祠),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등에 배향되었다. 조선 영조 16년(1740년) 가을에 송도(松都) 남문루(南門樓)에 영조가 행차(行次)하여 고려명신(高麗名臣)을 추모하고 하교(下敎)하기를 “그들의 후손은 지손(支孫)과 서손(庶孫)을 막론하고 군교(軍校)의 역(役)을 면하게 하라”하였다. 신라 6부 촌장 중 하나인 배지타(裵祗沱) 이후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건국공신(建國功臣)인 배현경(裵玄慶)을 모든 배씨의 중시조(中始祖)로 삼아서 세계를 잇고 있다

(3) 성주배씨(星州裵氏) 시조(始祖) 배위준(裵位俊)


태사(太師)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이후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중엽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을 지낸 배위준(裵位俊)을 성주배씨(星州裵氏)의 시조(始祖)로 모신다.

(4)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


①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서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②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신라 개국(開國) 원훈(元勳 : 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 )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와 고려 개국 원훈(元勳)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의 뒤를 이어 조선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던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 등으로 인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칭(稱)을 받게 되었다.

(5) 성주배씨(星州裵氏) 분파(分派)


5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아들 6세 배문적(裵文迪), 배무적(裵武迪) 형제로 갈리어져 크게 번창하였으며, 6세 배문적(裵文迪)의 후손인 9세 배규(裵規)의 화당공파(花堂公派), 배구(裵矩)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배현(裵俔)의 진사공파(進士公派), 배유(裵裕)의 녹야당공파(綠野堂公派), 12세 배신(裵紳) 낙천공파(洛川公派), 6세 배무적(裵武迪)의 후손인 11세 배극렴(裵克廉)의 정절공파(貞節公派), 배극명(裵克明)의 미은공파(薇隱公派) 등으로 크게 분파(分派) 되었다.


(6) 성주배씨(星州裵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주배씨는 123가구 31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낸 배선보(裵善輔)의 후손은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배번(裵藩)의 후손은 덕곡면 본리리 승암(承巖)마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던 배즙(裵楫)의 후손은 덕곡면 노2리 서유재마을에, 진사(進士)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후손은 개진면 인안2리에 세거하고 있다. 그밖에 배윤조(裵胤遭)의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배문회(裵文繪)의 후손은 운수면 화암리에, 배환극(裵煥克)의 후손은 운수면 월산리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배인경(裵仁慶)
좌복야(左僕寺) 배원서(裵元舒)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아가며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학업에 나아갔는데 학문이 숙성(夙成 :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육체적 발육(發育)이 빨라 어른스러움)하여 13세 때 벌써 문장이 뛰어났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선임되었는데, 숭문전(崇文殿)에서 임금을 모시고 숭문전 첨지(僉知) 신맹섭(申孟攝), 승선(承宣) 김구락(金九洛), 기거주(起居注) 이당진(李唐珍), 사업(司業) 박규두(朴奎斗) 등과 더불어 홍범(洪範)과 예기(禮記), 월령(月令)과 중용(中庸)을 강의(講義)하였는데 공의 해석이 매우 정밀하다 하여 임금이 금 이십냥과 비단 열필을 하사하니 그때 공의 나이가 28세였다.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충렬왕(忠烈王) 어전에서 왕명(王命)으로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충선왕(忠宣王)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러 공이 연로하므로 사직(辭職)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충선왕이 이르기를 “경은 누대(累代)에 걸친 공신(功臣)의 자손(子孫)이고, 또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은 노신(老臣)으로서 지금 어찌하여 짐을 멀리하려 하는가.” 하고 궤장(几杖 :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공이 다시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마지못해 이를 윤허(允許)하고 공(公)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 흥안은 성주의 옛 지명)에 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緣由)로 성주(성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던 수관조(受貫祖 : 관향을 받은 조상)가 되었다. 후손들은 재실인 흥덕재(興德齋)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유업(遺業)을 추모하고 있다. 아들 문적(文迪)은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軍機)를 맡아본 국왕의 비서기구인 추밀원(樞密院)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장손(長孫)인 용성(用成)은 종2품인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냈다.
② 배용신(裵用臣)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지내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진 인경(仁慶)의 손자이며 추밀원(樞密院)에서 벼슬을 하였던 문적(文迪)의 차남이다. 고려말 비순위(備巡衛)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현풍(玄風)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만년(晩年)에 낙강(洛江)위에 정사(精舍)를 짓고 화산(火山)아래에 살면서 시주(詩酒)로써 산촌(山村)생활을 즐겼다. 당시의 명유(名儒)들은 모두 그와 교분(交分)을 가졌다고 하나 문헌(文獻)으로 고증(考證)할 길이 없어 애석하다.

(2) 조선시대


① 배중현(裵仲賢)
비순위(備巡衛) 중랑장(中郞將) 용신(用臣)과 배천조씨(白川趙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시대의 정5품 무관직인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고조부이다.
② 배효손(裵孝遜)
중랑장(中郞將) 중현(仲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조에 무신 정3품 당하관의 품계인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증조부이다.
③ 배환(裵紈)
어모장군(禦侮將軍) 효손(孝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5위에 두었던 종6품 무관직인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조부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낙천(洛川) 배신(裵紳) 선생 언행록(言行錄), 성산배씨(星山裵氏) 비순위공후(備巡衛公后) 진사공(進士公) 파보(派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바 중종 때인 1520년경 낙천(洛川) 배신(裵紳) 선생의 선고(先考) 배사종(裵嗣宗)이 현풍에서 고령군 개진면 옥산 2리 적산(笛山)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배사종(裵嗣宗)
자는 경지(敬之)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부사과(副司果) 환(紈)의 아들로 성종 21년(1490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과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중종 25년(1530년) 졸(卒)하였다.
② 배신(裵紳)
자는 경여(景餘)이고 호는 낙천(洛川)이다.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과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사종(嗣宗)이며 동선(東善)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중종 15년(1520년) 12월 기유일(己酉日)에 현풍의 서쪽인 화산(火山)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같은 고을 김열(金)에게서 배우고 8세에는 엄한경(嚴漢卿)한테 배웠는데, 공부가 날로 진척하여 기재(奇才)라고 일컬어졌다. 17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고을에서 모두 축하하니, 선생이 사양하기를, “사람의 사업이 어찌 여기에서 그칠 것인가?” 하였다. 약관(弱冠)에 처음으로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을 뵙고 뒤에는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게 종사(從事)하여 지결(旨訣 : 중요한 말씀)을 들었으니 공은 남명학(南冥學)과 퇴계학(退溪學)의 회통자(會通者)가 되었다. 명종 16년(1561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명종 20년(1565년)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에 대한 천거(薦擧)인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그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빙고별좌(氷庫別座)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4년(1571년) 조정에서 재능이 없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도태(淘汰)시키고 특별히 명유(名儒)를 가려 맡길 것을 명하였는데 이조(吏曹)와 예조(禮曹)가 배신(裵紳)과 조목(趙穆)을 맨 먼저 천거하여 낙점(落點)되어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그를 쫓아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강소(講所)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으며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으로 하여 가르쳤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초당(草堂) 허엽(許曄) 등 제공(諸公)이 만류하였다.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였고 문장(文章)은 섬려(贍麗 : 넉넉하고 화려함)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돌아가시자 나라에서 그의 행적(行蹟)을 알고자 하였으므로 많은 문도(門徒) 중에 공이 천거되어 조명(朝命)으로「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올렸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인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글인 행록(行錄)을 지었다. 공은 낙동강 위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일컫기를 ‘낙천 선생(洛川先生)’이라 하였으며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과는 도의교분(道義交分)하였고 당대의 뛰어난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덕계(德溪) 오건(吳健)와 친밀하게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각종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참모(參謀)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던 대암(大庵) 박성(朴惺),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순절(殉節)한 존재(存齋) 곽준(郭) 등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한 분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선조 6년(1573년) 12월 17일 병으로 서울에서 향년 54세로 졸(卒)하였다. 선생이 몰(歿)하자 조정(朝廷)의 현사대부(賢士大夫)로부터 벼슬을 못한 선비인 위포사(韋布士)에 이르기까지 선생을 알고 있는 이는 눈물을 흘리고 조상(弔喪)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의복가지를 보내서 수의(襚衣)로 쓰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아들 희(暿)가 반상(返喪)하여 다음달 27일에 고령군 개진면 봉동후(鳳洞後) 장등(長嶝) 건좌(乾坐)에 장사(葬事)지냈다. 철종 13년(1862년)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던 시문집(詩文集) 2권 2책인 낙천문집(洛川文集)이 전한다. 공은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奉享)되었으나 고종 5년(1868년)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이 내려진 후 후손들이 추모할 곳이 없어 1902년 고령군 개진면 인안리 치산(雉山)에 공의 호(號)를 취하여 서당을 지어 낙산서당(洛山書堂)이라 편액(扁額)하고 이 때 처음으로 마을 이름을 내려주어 화산(火山)이라 하였다. 
(註釋) 현사대부(賢士大夫)
현량방정하고, 직언과 극간을 할 수 선비(賢良方正, 直言極諫之士)를 말한다.
③ 배계서(裵繼緖)
자는 윤화(允和)이고 호는 모헌(慕軒)이다. 종사랑(從仕郞) 희(暿)의 아들로 선조 3년(1570년) 태어났다. 어버이 병환(病患)에 상분(嘗糞)하였으며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인조 6년(1628년) 졸(卒)하였다.
(註釋) 상분(嘗糞)
부모의 위중한 병세(病勢)를 살피기 위하여 그 대변을 맛봄을 이르는 말로, 지극한 효행(孝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④ 배응도(裵應度)
자는 자성(子成)이고 호는 국은(局隱)이다. 윤회(胤繪)와 효대(孝大)의 따님인 개성고씨(開城高氏) 사이에서 정조 21년(1797년) 태어났다.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 : 마음을 두고 깊이 생각함)하고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고 낙동강 가 북쪽 편에 집을 지었는데 그 문미(門楣 : 문얼굴 위에 가로 대는 나무)에 이르기를 취적재(吹笛齋)에 원근(遠近)의 많은 학자들이 추종(追從)하였다고 하였다. 유고(遺稿) 4권이 있었으나 화마(火魔)로 소실(消失)되었다.
⑤ 배수강(裵守綱)
초휘(初諱)는 정강(正綱)이고 자는 성수(性守)이다. 도찬(道燦)의 차남으로 철종 1년(1850년) 태어났으나 삼종숙(三從叔) 도면(道冕)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본래 덕을 기리는 뜻이 있어 평생토록 사물(事物 : 재물)에 마음이 기울지 아니 하였다. 제족(諸族 : 한 집안의 모든 겨레붙이)들에게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낙천(洛川) 배신(裵紳) 선생의 비각(碑閣)을 세울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리고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로서 사람을 다스리니 세상에서 흔히 이르기를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미덕(美德 : 아름답고 갸륵한 덕행)을 베푸는 가풍(家風)을 본받았다고 하였다. 

 

자료제공 : 후손 배철섭(裵哲燮)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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