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驪州李氏) 반곡재(盤谷齋) 하편(下篇)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여주이씨(驪州李氏) 반곡재(盤谷齋) 하편(下篇)

반곡재(쌍림면 용리 59-1)

 

5. 반곡재 상량문(盤谷齋上樑文)


서술하노니, 조상의 음덕(蔭德)을 잊지 못해 정자(亭子)와 재사(齋舍)를 세워 사모의 정을 깃들이고, 철따라 성묘(省墓)하며 슬픔을 느껴 향기로운 제물(祭物)을 올리고 정성을 펼치니, 어찌 유독 온전히 고인(故人)을 섬기면서 또한 성실함이 이와 같은가? 삼가 생각건대, 고려(高麗) 안동장군(安東將軍) 반곡선생(盤谷先生) 여주(驪州) 이공(李公) 미숭(美崇)은 포은(圃隱) 문하(門下)의 뛰어난 제자이고 왕씨(王氏) 조정(朝廷)의 세신(世臣 : 대대로 내려오면서 관직을 받아 임금을 섬기는 신하)이로다. 남보다 뛰어난 힘에 경술(經術)의 학문을 함께 이루었고,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才能)과 지혜(智慧)에 일찍이 세상을 구제(救濟)할 만한 도량(度量)을 지녔도다. 이름 가리켜 서로 맹세하고 따른 이는 이존오(李存吾), 박신(朴信), 변계량(卞季良)이고, 명성(名聲) 도모(圖謀)하여 의(義)를 지키고 계획한 이는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이로다. 정부자(鄭夫子 : 정몽주(鄭夢周))는 나라의 많은 중책(重責)을 일찍이 받았고, 장자방(張子房)은 한씨(韓氏) 5대의 큰 은혜를 잊지 않았도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천명(天命)이 바뀌는 때를 만나 모진 삭풍(朔風)에 눈보라치는 처절함을 참지 못했으니, 붉은 피가 선죽교(善竹橋) 위에 뿌려지고 충심(忠心)이 두문동(杜門洞) 안에서 숨을 죽였도다. 이때에 비록 감히 말할 것이 있어도 오직 공(公)은 곧음을 지키고 의(義)를 취하여 목숨을 버렸으니, 듣는 것은 남에게 있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 있도다. 도리(道理)에 따라 책망(責望)하지 않으며 백이(伯夷)의 정의(正義)를 밝혔고, 세력이 궁(窮)해도 굽히지 않으며 장순(張巡)의 충분(忠憤)을 실천하였도다. 역수(曆數 : 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가 철을 따라서 돌아가는 순서)가 돌아간 곳은 뒤집어져 회복하기 어렵기에, 망대(望臺)에 올라 임금께 하직(下直)하고 병장기(兵仗器)를 묻고 자결(自決)하였도다. 방어의 계책(計策)으로 성을 쌓았던 곳은 텅 비었고, 전쟁에 나아가 호령(號令)하며 훈련하던 곳은 쓸쓸하도다. 이에, 일곱 분이 따라 순절(殉節)하니 사관(史官)이 또 제(齊)나라 전횡(田橫)의 두 나그네 무덤으로 기록하고, 여러 대 능(陵)이 나란하니 후세에 유서간(劉西澗) 부자와 같은 묘라 일컫도다. 위대한 공(功)과 맑은 지조(志操) 사람들 입에 전해져 늠름(凜凜)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름 산의 명칭으로 남아 길이 전해지도다. 일은 당시 조정(朝廷)에 거리껴 사람으로서 꼭 지켜야 할 도리(道理)를 펼치지 못했지만, 의리(義理)는 춘추(春秋)에 관계되니 어찌 올곧은 도리의 자취가 묻히랴. 주민들은 상상(想像)하며 슬픔을 머금었고 길가는 나그네는 가리키며 탄식하도다. 이제 후손들 번성하여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며, 은둔(隱遁)한 지 오래되어 비록 벼슬하여 화려한 지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선대(先代)의 공덕(功德)을 굳게 지켜 아직도 충신(忠臣)의 후손이라 일컬어지네. 무엇보다 깊이 사모하는 마음은 항상 체백(體魄)이 깃들어 쉬는 곳에 있지만, 정성과 힘 펼치지 못해 아직도 묘도(墓道)에 비각(碑閣)을 세우지 못했도다. 일이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물력(物力 : 물자와 노력)이 쇠잔(衰殘)했기 때문이고, 하늘이 이에 그 충심에 이끌려 마침내 공론(公論)이 준엄(峻嚴)하게 일어남을 보게 되니, 사람의 도모(圖謀)가 거북점(龜筮)과 시초점(蓍草占 : 시초라는 빳빳한 풀나무를 가지고 치는 점)에 들어맞고, 여론(輿論)이 북채보다 빠르도다. 남쪽과 북쪽 언덕은 진실로 학문을 닦던 옛 나라가 아니고, 저 강과 저 언덕에는 수양하던 옛 자취가 완연(宛然)하도다. 가야산 먼 곳은 가파르고 가파른 만 길의 송악(松嶽)이고, 반계(盤溪)의 세찬 물줄기는 깊은 못 한줄기 박연(朴淵)이로다. 땅이 숨기고 하늘 드넓은 곳 마을 모퉁이 묘지 가까이 백 보 되는 언덕에 당(堂)을 지으니, 정성과 힘을 다하여 집집마다 항아리의 곡식 쏟아내고, 목수와 재목을 모아 몇 칸의 집을 지어 비바람 겨우 가렸도다. 조그만 세 칸 집을 지으니 유가(儒家)의 법을 이어 검소(儉素) 질박(質朴)하고, 마루에 양쪽 퇴(退 : 툇마루)를 늘이고 재숙(齋宿 : 재계(齋戒)하고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냄)을 갖추어 주선(周旋)하네. 새 것을 기뻐하여 옛 것을 잊고, 한(恨)하지 않아도 빨리 이루어졌네. 여기에 제물을 깨끗이 차리고 또한 여기에서 화수(花樹)의 모임을 가지네. 정령(精靈)께서 가까이 있어 집안 뜰에서 오르내리고, 추위와 더위 차례로 바뀌어 철따라 삼가 깨끗이 청소하네. 어찌 ‘숭보(崇報)’라 하는가? 자손 된 자의 정성이라네. 효도(孝道)하고 화목(和睦)하며 멀고 가까운 이를 따지지 않았네. 모든 후손들이 어찌 애당초 한 사람의 몸을 생각지 않으랴. 선조를 욕보임 없이 앞으로 백대(百代)의 후손들에게 전하리라. 산수(山水)가 달리 보이고 묘소가 더욱 빛나네. 오늘 이 3월에 공사를 마치니 들보 올리는 노래를 올리네.

兒郞偉抛樑東(아랑위포량동)
여보게들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任那山色碧童童(임나산색벽동동)
임나(任那 : 고령)의 산 빛이 푸르고 우뚝하네 
千古猶餘亡國恨(천고유예망국한) 
천 년 세월 망국의 한이 남아 있어
烟雲長使淚英雄(연운장사누영웅) 
안개와 구름 길이 영웅을 눈물짓게 하네
兒郞偉抛樑西(아랑위포량서) 
여보게들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甲劒藏陵上鹿(갑검장릉상록제) 
병장기 묻힌 무덤에 사슴이 올라 있네
七星巖下年年草(칠성암하연연초) 
칠성암 아래 해마다 우거지는 풀
爲待王孫綠色齊(위대왕손록색재) 
왕손을 기다려 푸른 빛 한결 같네
兒郞偉抛樑南(아랑위포량남) 
여보게들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月坪禾稿長(월평화고장람삼) 
월평에 볏짚이 모포처럼 길게 깔렸네
川流㶁㶁分田灌(천류괵괵분전관) 
시냇물 콸콸 흘러 밭에 나누어 물을 대고
冥佑從來一理涵(명우종래일리함) 
신명이 예로부터 도와 하나의 이치로 적시네 
兒郞偉抛梁北(아랑위포량북)
여보게들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松岳迢迢千里隔(송악초초천리격) 
송악이 아득하게 천 리나 머네
丹忠化作山頭雲(단충화작산두운) 
충심(忠心)이 산꼭대기 구름으로 변하여
日夜浮天向北闕(일야부천향북궐) 
밤낮으로 하늘에 떠서 대궐로 향하네 
兒郞偉抛樑上(아랑위포양상)
여보게들 들보 위에 떡을 던지세
應有明靈時陟降(응유명령시척강) 
밝은 영령 있어 때때로 오르내리네
芬苾春秋薦此誠(분필춘추천차성) 
봄가을에 향기로운 제물로 정성을 올리니
洋之左右氣悽愴(양지좌우기처창) 
좌우에서 양양히 오르내려 기운이 처량하네 
兒郞偉抛樑下(아랑위포량하)
여보게들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
鳥飛翬革渠之廈(조비휘혁거지하) 
저 큰 집이 새가 날듯이 화려하네
一帶平泉豁眼前(일대평천활안전) 
한 구역 평천이 눈 앞에 열려 있어
塵緣不到衿懷灑(진연부도금회쇄) 
속세의 자취 이르지 않아 흉금이 깨끗하네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후손들 번성하고 관직이 뒤따라 맑은 풍모(風貌)와 높은 절조(節操) 역사에 전해져 길이 남고, 굳센 의지와 충심(忠心) 산악과 같이 더욱더 중하게 하여 어긋나지 않게 잘 이끌어 길이 편안하게 하소서.

고려 기원 1030년(1947년) 정해 3월 상순 곡우절(穀雨節)에 포산(苞山) 곽수빈(郭守斌)은 삼가 짓는다.

(註釋1) 장자방(張子房)은……않았도다
장자방은 한(漢)나라 장량(張良)이다. 장량의 선조 5대가 한(韓)나라의 정승(政丞)을 지냈다. 그런데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자 장량이 자객을 동원하여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의 수레를 저격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농민들을 이끌고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유방(劉邦)도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켰다. 장량이 유방의 모사(謀士)가 되어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멸망시켰는데 그 공로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가문은 누대(累代)에 걸쳐 고려 왕조의 은혜를 입은 권문세족(權門勢族)임을 뜻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註釋2) 도리(道理)에……밝혔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의(義)를 지키다가 죽었다는 말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자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두 아들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서 먹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註釋3) 세력이 궁(窮)해도……장순(張巡)의 충분(忠憤)을 실천하였도다.
장순(張巡 : 709년~757년)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들로 진원(眞源)의 현령(縣令)이었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원(許遠, 709년~757년)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지켰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맞서지 못함)으로 성이 함락되자 함께 순국(殉國)하였다.《舊唐書 卷187 張巡傳》
 (註釋4) 제(齊)나라 전횡(田橫)의 두 나그네 무덤
전횡(田橫)은 제(齊)나라 왕 전영(田榮)의 아우로 전영이 항우(項羽)의 공격으로 죽자 전횡(田橫)은 패잔병들을 다시 모아 항우(項羽)에 맞서면서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帝王)으로 세우고 자신은 승상(丞相)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한나라 장수 한신(韓信)과 관영(灌嬰)의 군대에 전광이 죽자 전횡은 스스로 왕이 되어 관영의 군대에 맞서다가 팽월(彭越)에게 의탁하였다. 얼마 후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자, 제왕 전횡(田橫)은 주살(誅殺)될까 두려워 5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한고조(漢高祖)가 사신을 보내 전횡(田橫)이 오면 크게는 왕으로 삼고, 작게는 후(侯)로 봉하며, 오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도륙(屠戮)하겠다고 하며 불렀다. 전횡이 할 수 없이 두 나그네와 함께 낙양(陽) 근처에까지 와서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같이 남면(南面)하여 고(孤)라고 칭했는데, 이제 와서 북면(北面)하여 섬길 수는 없다.”라고 하며 자결(自決)하였다. 이에 두 나그네는 전횡(田橫)의 머리를 한고조(漢高祖)에게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고 얼마 후 따라 자결(自決)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섬의 500명도한꺼번에 자결(自決)하였다. 《史記 卷94 田 列傳》
(註釋5) 유서간(劉西澗)……무덤
유서간(劉西澗) 부자(父子)는 유환(劉煥, 1000~1080)과 그의 아들 유서(劉恕 : 1032년~1078년)를 가리킨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6 〈이빈로에게 답함〔答李濱老〕〉에 “여산(廬山)은 참으로 동남 지방의 웅려(雄麗)하고 기특한 장관(壯觀)이면서 또 도정절(陶靖節 : 도잠(陶潛))의 조손(祖孫)과 유서간(劉西澗 : 유환의 호) 부자(父子)의 유풍(遺風)이 있는 곳입니다.……내가 여기에 오니 마침 학관(學官) 양군(楊君)이 서간(西澗)의 유상(遺象)을 가져왔기에 원우(元祐) 연간의 이공택(李公擇) 상서(尙書)와 함께 학사(學祠)에 모셨습니다. 이어서 다시 정절(靖節)과 충숙(忠肅) 및 서간(西澗)의 아들 비승공(秘丞公)을 아울러 모셔다가 합사(合祀)하도록한 다음, 다시 그 우측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의 사당을 세운 뒤 여기에 두 분 정호(程顥)와 정이(程) 부자(父子)를 배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註釋6) 고결하고……전해지도다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고령군 사이에 미숭산(美崇山)이 있는데, 반곡(盤谷) 선생의 이름인 미숭(美崇)을 따서 미숭산이라 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註釋7) 화수(花樹)의 모임
친족(親族)끼리의 모임. 당(唐)나라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唐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하였다.
(註釋7) 저 큰 집이 새가 날듯이 화려하네
《시경(詩經)》 〈사간(斯干)〉에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으며,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如鳥斯革 如翬斯飛〕”라고 하였는데, 동우(棟宇)가 높게 일어남은 새가 놀라 낮빛을 변함과 같고, 처마가 화려하고 높으며 날아갈 듯함은 꿩이 날아 날개를 펴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註釋8) 평천(平泉)
당(唐)나라 때의 정승(政丞) 이덕유(李德裕)가 세운 평천장(平泉莊)이라는 별장(別莊)이다. 별장 안에 정자(亭子)와 누대(樓臺), 기화이초(奇花異草), 진귀한 소나무가 있어 그 경치가 완연히 선경(仙境)과 같았다고 한다.《舊唐書 卷174 李德裕列傳》

6. 미숭성(美崇城) 시(詩)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찬(撰)


(1) 원문
古城臨絶(고성임절헌)
고성을 산정 절벽에 쌓을 적에
雄憤忽盈腔(웅분홀영강)
큰 분노 온 몸에 가득 하였네
雲海多風浪(운해다풍랑)
험한 세상 풍랑이 매우 거친데
無人駐碧幢(무인주벽당)
푸른 휘장 두른 장군의 수레 멈추게 할 사람은 없었다네

(註釋) 벽당(碧幢)
군막(軍幕)에 쓰이는 벽색 유막(碧色油幕) 즉 벽유당(碧油幢)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군막(軍幕)을 말한다
(2) 한시(漢詩) 감상(鑑賞)
공(公)의 청고(淸高)한 지절(志節)을 칭송(稱頌)하고 항전(抗戰)의 기백(氣魄)을 지닌 영웅(英雄) 안동장군(安東將軍)은 없고 혼(魂)과 행적(行績)을 가늠케 하는 역사적인 자취만 남아 있음을 아쉬워하면서 읊은 회고시(懷古詩)이다.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