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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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
박영규(朴英規)는 승주(昇州 : 순천의 옛지명)사람으로 견훤(甄萱)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견훤(甄萱)의 장군(將軍)이 되었다. 신검(神劒)이 반역(反逆)을 일으키자 견훤(甄萱)이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투항(投降)하였다. 태조 19년(936년) 2월에 박영규(朴英規)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귀순(歸順) 의사를 밝히자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장군을 뵈온 뒤 당에 올라가서 부인에게 절을 올린 후, 그대를 형처럼 섬기고 부인을 누님처럼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태조 19년(936년) 9월 태조(太祖)가 신검(神劒)을 토벌할 때 내부에서 은밀하게 내통(內通)하여 백제를 멸망시키자 박영규(朴英規)를 좌승(佐丞)에 임명하고, 밭 1,000경(頃)을 하사하였으며 역마(驛馬) 35필(匹)로 집안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으며 박영규(朴英規)는 뒤에 관직이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권제오(卷第五) 박영규(朴英規)편”에 기록되어 있다. 졸(卒)하여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0편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편”에 기록되어 있다. 박영규(朴英規)는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딸은 태조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고 나머지 두 딸은 정종(定宗)과 사돈을 맺어 정종의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
(2) 순천박씨(順天朴氏) 중시조(中始祖) 박숙정(朴淑貞)
①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 이후 계대(系代)가 분명하지 않고 기후(其後) 6세를 실전(失傳)하고 고려 정승(政丞)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군(封君)되었던 후손 박난봉(朴蘭鳳)에 이르러 2세를 실휘(失諱)하였다.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박숙정(朴淑貞) 대(代)에 이르기까지 세수실전(世數失傳)으로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계대(繼代)하고 본관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② 고려사(高麗社) 우산절(禹山節) 열전(列傳)에 의하면 “박숙정(朴淑貞)은 충숙왕 때 김목경(金牧卿)이 밀성부사(密城副使)가 되었을 때 찰방별감(察訪別監)으로 재직시 김목경(金牧卿)의 탐욕스러움과 포악함을 탄핵하여 그를 파면시켰다”라고 기록되어 공의 성품이 강직(剛直)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근재(謹齋) 안축(安軸)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 제현(諸賢)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공은 풍류(風流)가 있어 충숙왕 13년(1326년)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가 되어 관동지방(關東地方)의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에 누대(樓臺)를 지었는데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즉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사선정(四仙亭), 울진의 취운루(翠雲樓) 등을 모두 창건(創建)하였다.
(3) 순천박씨(順天朴氏)의 분관(分貫) 춘천박씨(春川朴氏)
① 순천박씨(順天朴氏) 중시조(中始祖)인 박숙정(朴淑貞)의 동생 박항(朴恒)은 고종 35년(1248년)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으며, 충렬왕 때 승선(承宣)을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에 올라 왕을 호종(扈從)하고 원(元)에 다녀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② 그후 박항(朴恒)의 후손들은 춘천(春川)에 세거(世居)하면서 순천박씨(順天朴氏)에서 분관(分貫)하여 춘천박씨(春川朴氏)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4)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 파조(派祖) 박가실(朴可實)
① 화령윤(和寧尹)을 지냈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던 천상(天祥)과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우왕 14년(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崔瑩)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을 계획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征伐軍)의 출정(出征)을 명(命)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 등과 함께 공(公)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동참(同參)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로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심덕부(沈德符), 강릉등처병마절제사(江陵等處兵馬節制使) 왕빈(王賓) 등  45인에게 모두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할 때 안사공신(安社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포상(褒賞)되었고 창왕 1년(1389년) 계림병마절제사(雞林兵馬節制使)로 재직 중 왜구를 공격하여 이겼던 전공(戰功) 등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② 조선 태종 2년(1402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에 임명되었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까지 올랐다. 태종 10년(1410년) 군사를 불러 모으기 위하여 행하는, 취각(吹角)에 관한 군령(軍令 : 군대안의 명령)을 어겨 옥살이를 하다 석방되었다가 같은 해 5월 25일 졸(卒)하였다.
(5) 순천박씨(順天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순천박씨는 87가구, 2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문목공(文穆公) 박가실(朴可實)의 후손은 우곡면 사촌리에 세거하고 있고 판윤공(判尹公) 박가권(朴可權)의 후손 중 진사공파(進士公派)는 쌍림면 용2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원룡(朴元龍)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숙정(淑貞)과 대언(代言) 시(蒔)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여 근재(謹齋) 안축(安軸)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종유(從遊 : 학덕이 있는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으며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조정(朝廷)이 부패하고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지자 만년(晩年)에는 영동 천마산에 들어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북 영동군 양강면 청남리에 영사재(永思齋)를 세우고 향사(享祀)한다. 
② 박천상(朴天祥)
이부시랑(吏部侍郞) 원룡(元龍)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 무과에 등제하여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는데 이숭인(李崇仁), 하륜(河崙) 등과 함께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판별하였는데 무고(誣告)에 연좌(緣坐)되어 유배(流配)되었다가 밀직(密直)과 제조(提調)에 올랐으며 조선 창업 후에는 화령윤(和寧尹)을 지냈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2) 조선시대
① 박안명(朴安命)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가실(可實)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5년(1415년) 대전행수(大殿行首)를 거쳐 경력소경력(經歷所經歷)과 부정(副正)를 지냈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목(靖穆)이다. 배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弘)의 따님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② 박문규(朴文規)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된 안명(安命)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弘)의 따님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봉직랑(奉直郞) 양지현감(陽智縣監)을 지냈다.
③ 박윤공(朴允恭)
양지현감(陽智縣監) 문규(文規)와 병조참의(兵曹參議) 상직(尙直)의 따님인 상주김씨(尙州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사용(副司勇)을 거쳐 과의교의(果毅校尉)에 올랐다.
④ 박린(朴璘)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사용(副司勇) 윤공(允恭)과 군사(郡事) 명지(命之)의 따님인 의인(宜人) 은산신씨(殷山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사과(副司果) 행(行)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사육신(死六臣)에 의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실패로 세조(世祖)가 선위(禪位 :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받은 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상주(尙州)의 산양(山陽)에 우거(寓居)하면서 정자를 짓고 부벽(浮碧)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난지곡(難知谷)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여막(廬幕)을 호위(護衛)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⑤ 박우경(朴佑卿)
자는 대성(大成)이며 참봉(參奉) 빈(贇)과 의창(宜昌)의 따님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으며 용양위(龍驤衛)의 별시위(別侍衛)에 속하였다. 후손들이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沙村里)에 양원재(養源齋)를 건립하여 매년 향사(享祀)를 드린다.
⑥ 박호걸(朴豪傑)
자는 의겸(義兼)이며 찰방(察訪) 매손(昧遜)과 눌(訥)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을 지냈다.
⑦ 박태완(朴泰完)
자는 원경(元卿)이며 세장(世章)과 병절교위(秉節校尉) 지헌(之憲)의 따님인 포산곽씨(苞山郭氏) 사이에서 숙종 29년(1703년)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영특하고 민첩하였으며 성리(性理 : 인간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의 뜻을 크게 깨달았다.  일찍 공의 문학에 관한 명성(名聲)이 도내에 크게 알려졌으나 세상일이 많이 허황(虛荒 : 헛되고 미덥지 못함)하여 그 유문(遺文 : 생전에 남긴 글)과 의적(懿蹟 : 아름다운 자취)를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다. 공(公)은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 (文穆公派) 고령 입향조(入鄕祖) 박사성(朴思誠)의 선고(先考)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 고령 세거 후손들의 입향조(入鄕祖)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박사성(朴思誠)으로 양지현감(陽智縣監)을 지낸 박문규(朴文規)의 11세손이다. 공(公)은 상주(尙州)와 현풍(玄風 : 현풍 달성군 유가면 용2리 가잿골)을 거쳐 영조 40년(1764년) 경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沙村里)에 시거(始居)하였다.
(註釋)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正月)에 80세 이상의 관원(官員) 및 90세 이상의 백성(百姓)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을 말한다.
(2) 양지현감(陽智縣監) 박문규(朴文規)와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관계
① 박문규(朴文規)는 중시조(中始祖) 박숙정(朴淑貞)의 아들 5형제 중 장손계열로 박원룡(朴元龍)의 5대손 즉 내손(來孫)이고 박팽년(朴彭年)은 5형제 중 끝 집으로 4대손인 현손(玄孫)이다.
② 따라서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은 양지현감(陽智縣監) 박문규(朴文規)에게 삼종숙(三從叔)이 된다.
(3) 양지현감(陽智縣監) 박문규(朴文規)와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관계
① 순천박씨(順天朴氏) 문목공파(文穆公派) 파조(派祖) 박가실(朴可實)의 따님이 경기감사(京畿監司)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창녕성씨(昌寧成氏) 성개(成槪)에게 출가(出嫁)하였다.
② 성개(成槪)는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의 종조부(從祖父)이고 박가실(朴可實)의 손자가 박문규(朴文規)이므로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은 박문규(朴文規)와 사돈지간(査頓之間)이 된다.
(4) 단종(端宗)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폐위(廢位)되자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왕위(王位) 복위(復位)를 시도했던 거사(擧事)인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인한 화(禍)가 친척(親戚)이자 인척(姻戚)인 양지현감(陽智縣監) 박문규(朴文規)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공의 처가(妻家)인 상주(尙州)로 피신한 후 현풍(玄風 : 현풍 달성군 유가면 용2리 가잿골)을 거쳐 우곡면 사촌리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박상호(朴尙昊)
자는 도장(道章)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양덕(揚德)과 정엽(廷曄)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순조 5년(1805년) 태어났다. 입향조 박사성(朴思誠)의 증손이다. 타고난 품성이 착하고 감춘 덕(德)과 학행(學行)이 훌륭하여 향리(鄕里)에서 추중(推重 : 높이 받들고 귀하게 여김)하였다. 고종 5년(1865년) 졸(卒)하였다.
(2) 박상림(朴尙林)
자는 치순(致淳)이고 호는 사포(沙圃)이다 처사(處士) 양호(揚浩)와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헌종 5년(1839년)에 태어나 백부(伯父) 양직(揚直)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그는 10세에 배우던 책을 덮고 나무를 하여 부모의 수고를 대신하였고, 15세에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극진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다. 어머니가 머리에 종기(腫氣)가 나서 온갖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고 고통스러워 하자 입으로 상처를 빨아내며 보살폈고, 임종(臨終)이 가까워지자 인분(人糞)을 맛보며 약을 지어 드렸으나 차도(差度)가 없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였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뒤에는 아침 저녁으로 묘소를 오가며 애통해하였다. 향도(鄕道)의 사림(士林)에서 그의 행적(行蹟)을 조정에 거듭 천거(薦擧)하여 포상(褒賞)하게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904년 졸(卒)하였다.
(3) 박우동(朴佑東)
자는 내익(乃益)이고 호는 월포(月圃)이다. 상곤(尙坤)과 경신(景信)의 따님인 서흥김씨(瑞興金氏) 사이에서 철종 2년(1851년) 태어났다. 품성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효도로 어버이를 모시고 친족간에 화목(和睦)하였다. 부모 상중(喪中)에 3년동안 슬픔을 다하니 향린(鄕隣 : 고향의 이웃)이 추중(推重)하였다. 임종(臨終) 때에 자식과 조카들을 불러서 유훈(遺訓)하기를 돈목하고 집안 일을 잘 다스리고 효제(孝悌)하고 몸을 닦음으로 사람의 도(道)를 행하라고 하였다. 일에 임해서는 삼가고 스스로 경계하면 가도(家道 : 집안의 도덕이나 규율)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였다. 1904년 졸(卒)하였다.
(4) 박경동(朴敬東)
자는 경익(警益)이며 호는 사천(沙川)이다. 상관(尙觀)과 성산전씨(星山全氏) 사이에서 철종 14년(1863년) 태어났다. 성격(性格)과 도량(度量)이 여느 사람 달랐고 효도를 극진히 하였으며 모부인(母夫人 : 남의 어머니를 높혀서 부르는 말)이 병이 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여 즉시 소생(甦生)케 하였고 상(喪)을 당하여 애훼(哀毁)함이 상제(喪祭 : 상례와 제례)를 벗어났다. 여묘(廬墓)살이 3년을 하면서 꿇어앉아 절하는 곳이 움푹 파였다고 고령읍지(高靈邑誌)와 대동문헌록(大東文獻錄)에 기록되어 있다. 1940년 졸(卒)하였다.
(註釋) 애훼(哀毁)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몹시 여윔
(5) 박봉규(朴鳳圭)
자는 윤약(允若)이고 호는 춘당(春堂)이며 일명(一名) 문규(文圭)라고 한다. 노선(魯宣)과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고종 26년(1889년) 태어났다. 성품이 온아(溫雅)하였으며 재주와 학식과 견문(見聞)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몸 단속을 법도(法度)로써 하였으며 검소(儉素)함으로 집안을 바로 다스려 궁핍(窮乏)하지 않았고 오직 학문(學文)에 힘썼다. 1911년 졸(卒)하였다.  

자료제공 : 박종화(朴鐘華)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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