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驪州李氏) 반곡재(盤谷齋) 상편(上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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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여주이씨(驪州李氏) 반곡재(盤谷齋) 상편(上篇)

반곡재(쌍림면 용리 59-1)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반곡재(盤谷齋) 유래(由來)


(1) 이 건물은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반룡사(盤龍寺)로 올라가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있는 용2리 마을회관 뒤편 고령군 쌍림면 용리 59-1(반룡길 164-6)에 위치하고 있다. 반곡재(盤谷齋)는 기울어져가는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을 바로잡고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꾀한 이성계(李成桂)의 신흥(新興) 무인세력(武人勢力)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에 결사항전(決死抗戰)하다가 순사(殉死)한 고려(高麗) 충신(忠臣)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공(公)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47년 4월 건립(建立)한 재사(齋舍)이며 매년 음력 10월 10일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신으로 향사(享祀)를 드리고 종원(宗員) 간에 화목(和睦)을 도모하는 종청(宗廳)과 후손들을 계도(啓導)하는 학당(學堂)으로 활용하고 있다.
(註釋)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고려 후기의 집권세력이자 조선의 건국세력으로 기존 권문세족(權門勢族)에 비해 강경한 성리학주의(性理學主義)로 무장한 중소지주계급(中小地主階級) 세력으로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새롭게 등장했다. 사대부(士大夫)란 士(교양인)와 大夫(관료)의 합성어로써,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학자적(學者的) 관료(官僚)를 일컫는다. 대부분 신분적으로는 향리(鄕吏),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나 자작농 등 중간 계층에 해당하였다.


(2) 반곡재(盤谷齋)로 처마에 편액(扁額)한 것은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호(號)가 반곡(盤谷)이므로 공의 호(號)로 재호(齋號)를 삼았다. 반곡재(盤谷齋)의 재호(齋號)는 해방 후 초대 고령군수를 지낸 이홍직(李洪直)의 선고(先考)인 송산(松山) 이정근(李正根)이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과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을 지낸 소창(小滄) 신성모(申性模)에게 부탁하여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이 친필(親筆)로 휘호(揮毫)하여 게첨(揭添)하였으며 반곡재(盤谷齋)는 대통령(大統領) 친필(親筆)이 있는 고령지역 최초의 재실(齋室)이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불민(不敏)하여 반곡재(盤谷齋)의 편액(扁額)은 2006년 2월 도난되었고 종중에서는 불의(不意)의 사고에 대비하여 사전에 비치(備置)하였던 탁본(拓本)을 근거로 다시 현판을 제작하여 게첨(揭添)하였다.


(3) 반곡재(盤谷齋)는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과 관련하여 각종 유적(遺蹟), 지명(地名), 설화(說話) 등이 지역에 산재(散在)되어 있고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정되어 2018년 10월 26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鄕土文化遺産)’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는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고조부(高祖父)되시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되어 있는데 198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부표준영정 제41호로 지정하였다.

2. 건축형태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건물로 좌측 2칸은 온돌방, 우측 1칸은 대청을 놓았다. 전면 길이 방향으로 반 칸은 마루를 놓았으며 마루에는 현액(懸額), 기문(記文), 상량문(上樑文), 후손 27세 이대지(李大池)의 위선사(爲先事)에 대한 사적포창(事績褒彰), 각종 시문(詩文) 등이 게첨(揭添)되어 있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


호는 반곡(盤谷)이며 홍건적(紅巾賊)을 평정(平定)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제수(除授)된 언(彦)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윤(允)의 따님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충목왕 2년(1346년) 외동아들로 개경(開京)에서 태어났다.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推仰)받고 있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고조(高祖) 규보(奎報)는 고려 최고 문장가(文章家)이었으며 학문이 심오(深奧)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었고 수태보(守太保)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증조부 징(澄)은 청요직(淸要職)인 사간(司諫)을 지냈고 조부 헌(憲)은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한 훈공(勳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올랐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상(氣像)이 헌칠하고 여력(膂力)이 뛰어났으며 항상 충절(忠節)과 의리(義理)에 관한 언행(言行)을 일삼았으며 경학(經學)을 전수(傳受)받았는데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해박(該博)하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병법(兵法)에 뛰어났다. 선생께서는 공이 재주와 용기를 겸비(兼備)한 것을 기이(奇異)하게 여겨 경학(經學)을 가르치면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국가에 할 일이 많으니 이 시대에 세상을 구제할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릇이 큰 사람은 반드시 유교의 경서(經書)를 토대로 한 통치력(統治力)인 경술(經術)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니 모름지기 노력하시라” 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왕에게 천거(薦擧)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올라 삭방도(朔方道 : 함경도 이남과 강원도 북부지방)를 지키는 중임(重任)을 맡아 매우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우왕 14년(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변(政變)을 일으킨 이성계(李成桂)가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을 앞세워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와 무인세력(武人勢力)을 규합(糾合)한 후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세울 것을 획책(劃策)하고 1392년 4월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스승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참살(慘殺)하고 조선을 건국하려 하자 그 불의(不義)함을 꾸짖고 평안도(平安道) 지방을 관할하던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과 함께 “충의군(忠義軍)”이라 명명(命名)하고 2,00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의 니산(尼山 : 현재 노성산)에서 이성계군과 최초로 일전(一戰)을 하였으나 패하고 김천시 구성면 흥평 2리의 덕대산(德大山) 산성(山城), 성주군 가천면의 독용산성(禿用山城)과 고령군 운수면 월산리의 운라산성(雲羅山城)에서 계속 항전(抗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퇴(敗退)한 후 조부이신 헌(憲)께서 전공(戰功)으로 식읍(食邑)을 받았던 조채지향(祖埰之鄕 : 조상이 사패지를 받았던 곳) 고양(高陽 : 지금 고령) 상원산(上元山)을 최후(最後) 항전지(抗戰地)로 정하고 입성(入城)하여 축성(築城)하고 군사를 조련(調練)하면서 여조회복(麗朝回復)을 위한 계책(計策)을 세웠으나 1392년 7월 16일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성공하여 개경(開京)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건국(朝鮮建國)을 선포하자 울분(鬱憤)을 참으며 하늘의 뜻(天意)이 다함을 알고 미숭산성내에 있는 순사암(殉死巖)에서 우측으로 약 75m 떨어진 자정암(自靖巖)에 올라 여조회복(麗朝回復)의 실패(失敗)에 대하여 입을 다물며 자정(自靖)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을 밝히며 잔병(殘兵) 1천명은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生業)에 종사할 것을 호소하면서 거사(擧事)를 포기(抛棄)하였다. 장병해산(將兵解散)을 선포하였던 자정암(自靖巖)에 “아액금대(我厄唫臺)”란 글씨를 암반(巖盤)에 새겼는데 6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鮮明)하게 남아 있어 그때의 역사를 말없이 웅변(雄辯)하고 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한 후 사람을 보내어 누차 설득하였으나 끝내 불복하고 1392년 음력 10월 10일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하여 공께서 절벽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였다. 후인(後人)들이 공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경모(景慕)하여 휘(諱)로 산명(山名)을 삼아 종전 상원산(上元山)을 미숭산(美崇山)으로 고쳐 불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용2리(반룡 뒷산) 산 39-1번지 해좌(亥坐)에 있으며 묘비명(墓碑銘)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지낸 동종(同宗) 매구(邁久)가 근찬(謹撰)하였다.
(註釋)  아액금대(我厄唫臺)


1392년 7월 17일 조선(朝鮮)의 건국(建國)을 선포하자 장병을 해산하면서 나의 불행(여조회복의 실패)에 대하여 입을 다물겠다는 뜻으로 자정암(自靖岩)의 반석(盤石)위에 ‘아액금대(我厄唫臺)’란 글자를 각자한 후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1392년(壬申年) 10월 11일 자진(自盡)하였다.

4. 반곡재기(盤谷齋記)
묘(墓)에는 반드시 재(齋)가 있는데 재(齋)의 말뜻은 가지런히 한다는 것이니, 많은 사람을 포용(包容)하여 재숙(齊宿)하려고 세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그분의 거처(居處)와 담소(談笑)와 뜻과 좋아하던 바와 즐기시던 바를 생각한다.”라고 한 것은 모두 어버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만약 먼 조상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미루어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뜻을 생각하는 한 가지 일은 백천(百千) 세(世)가 멀어도 오히려 비슷하게 하리라고 상상하면서 사모한다면 재(齋)를 세우는 것이 어찌 오로지 재숙[(齋宿) : 재계(齋戒)하고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냄]만 위한 것이겠는가. 고려 말에 안동장군(安東將軍) 이공(李公)이 있었으니, 재주와 용맹이 출중(出衆)하였고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백가(百家)의 글을 두루 통달하였으며,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오천자(烏川子)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선생께서 큰 인물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글을 읽기를 권하며 이르기를 “나라에 일이 많아 그대는 마땅히 쓰임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경술(經術)에 힘을 써서 성취하여라.”하였다. 선죽교(善竹橋)의 변고(變故)에 이르러 공께서 분개(憤慨)하고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일이 연이어 불리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영천(靈川)의 상원산(上元山)에 이르러 날마다 군대를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익히며 사직(社稷)을 보존하려고 도모하였으나, 뜻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고 천명(天命)으로 왕조가 바뀌고 말았다. 임신년(1392년) 나라가 망하자 공(公) 또한 망하였고 공이 망하자 칠의사(七義士) 또한 함께 순국(殉國)하였으니, 아, 강직(剛直)하도다. 나라가 바뀌는 때라 역사에 공의 높은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대부분 누락되었고 아름다운 자취가 감추어져 세상에 전하지 않으니, 어찌 효손(孝孫)이 애통함을 품고 또한 뜻있는 선비가 눈물을 흘릴 뿐이겠는가. 공(公)은 본래 황려현(黃驪縣) 사람이다. 휘는 미숭(美崇)이고, 호는 반곡(盤谷)인데, 후대 사람들이 공의 이름으로 산을 이름하여 지금도 일컬어지고 있으며, 갑검능(甲劒陵)·장궁구(藏弓丘)·연병장(鍊兵場)·주마대(走馬臺)·망향대(望鄕臺)·순사암(殉死巖) 등이 그 유허(遺墟)이다. 묘가 이 산 아래 반룡촌(盤龍村) 뒤에 있는데 세월이 매우 오래되어 후손들이 비로소 묘소 아래에 재사(齋舍)를 세워 공(公)의 호(號)로 그 처마에 편액(扁額)하였다. 아, 공의 이름으로 산을 일컬었으니, 전횡도(田橫島)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고 현회(顯晦 : 드러나고 숨음)가 같은 시대가 아니다. 공의 호로 처마에 편액을 걸었으니, 곧 복파묘(伏波廟)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고 앞뒤가 같은 정성(精誠)이다. 정성이 이르는 곳에는 때가 또한 이를 것이니, 이에 공의 이름을 알아서 장차 크게 드러나 세상에 전할 것이다. 역사에 누락된 것이 어찌 탄식할 만한 일이겠는가. 다시 바라건대, 모든 이씨(李氏)들은 재숙(齋宿)하는 날 반드시 공의 뜻을 생각하여 분발(奮發)하고 격앙(激昻)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충효(忠孝)로 처신(處身)하고 경술(經術)로 재목(材木)감이 되어 출처(出處)에 그 도(道)를 잃지 않는다면 선비가 나라의 상서(祥瑞)로움이 될 것이니, 어찌 옛날과 지금의 다름이 있겠는가. 공의 후손 규원(圭元)이 내가 글을 할 줄 안다고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무자년(1948년) 3월에 신안(新安) 이규형(李圭衡)이 기록하다
(註釋1) 재계(齋戒)하는……생각한다


《예기(禮記)》〈제의(祭儀)〉에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그분의 거처(居處)를 생각하고, 그분의 웃음과 말소리를 생각하고, 그분이 뜻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분이 좋아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분이 즐기시던 바를 생각한다. 재계한 지 사흘째에 그 재계하는 대상이 보이는 듯하다.[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하였다.
(註釋2) 손오(孫吳)의 병법(兵法)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위(衛)나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法)》을 말한다.
(註釋3) 오천자(烏川子)


오천(烏川)은 연일(延日)의 고호(古號)로, 연일 정씨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년~1392년)를 가리킨다.
(註釋4) 선죽교(善竹橋)의 변고(變故)


정몽주(鄭夢周가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다가 이방원(李芳遠)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被殺)된 사건을 말한다.
(註釋5) 그 유허(遺墟)이다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 순사(殉死)한 후에 오랜 세월 쓸쓸하게 남아 있는 미숭산성(美崇山城 : 경남기념물 제67호)내 23곳의 옛터를 말한다.


① 갑검능(甲劒陵)
장병해산 시 갑옷, 병기(兵器), 집물(什物)를 묻고 흙을 덮어 쌓아 올렸으며 성내 헬기장 좌측에 있다.


② 장궁구(藏弓丘)
장병해산 시 안동장군과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이 친히 사용하던 활과 화살을 묻었던 곳으로 성내 헬기장 우측에 있다.


③ 연병장(鍊兵場)
남쪽 성문내 서편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주변에는 돌로 줄지어 표하고 또 엎드려서 활을 쏠 때에 몸을 숨긴 석대(石臺)도 있었다.


④ 주마대(走馬臺)
길이는 약 430m이며 안동장군과 병사가 기마전투(騎馬戰鬪) 연습을 하였던 곳이다.


⑤ 망향대(望鄕臺)
공이 매일 조석(朝夕)으로 대(臺)에 올라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절을 하며 여조회복(麗朝回復)을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축원(祝願)했으며 공이 살았던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바라보며 불이신지절(不二臣之節)을 다짐하였던 곳이다. 


※ 불이신지절(不二臣之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의미하며 본래 임금을 부당하게 해치고 새로이 왕위에 오른 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⑥ 순사암(殉死巖)
안동장군(安東將軍)이 이곳에서 자진(自盡)하자 공을 따르던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을 비롯한 잔류중진(殘留重鎭) 칠의사(七義士)가 산성 북쪽의 절벽바위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우러러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떨어져 죽었던 곳으로 사후(死後)에 이 곳에 대나무가 솟아나 지금까지 만고(萬古)의 절개(節槪)를 보여주고 있다.
(註釋6) 전횡도(田橫島)


중국 화북지방의 산동성(山東省) 동북쪽 바닷속에 있다고 한다. 한신(韓信)이 제(齊)나라를 무너뜨리고 왕을 사로잡아 가자 전횡(田橫)이 스스로 제(齊)나라 왕이 되었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부하 500여 명을 데리고 해도(海島)인 오호도(嗚呼島)로 들어가 살았다. 유방(劉邦)이 사람을 보내 전횡(田橫)을 설득해 불러들였지만, 낙양(洛陽)의 30리 앞에서 자결(自決)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하들도 섬에서 모두 자결하여 의리(義理)를 지켰다. 이에 이 섬을 ‘전횡도(田橫島)’라 부른다고 한다. 후일 전횡(田橫)과 그의 신하들의 충절(忠節)은 수많은 사람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본문에서는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과 함께 순사(殉死)한 칠의사(七義士)의 충절(忠節)을 전횡(田橫)과 함께 자결한 부하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註釋7) 복파묘(伏波廟)


후한(後漢) 때의 명장(名將)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은 북방으로 출정하여 흉노(匈奴)를 격파하였으며, 남쪽으로 출정하여 교지(交趾 : 베트남 북부)를 평정(平定)하였다. 복파묘(伏波廟)는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사당(祠堂)이다. 본문에서는 복파묘(伏波廟)를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를 기리는 재실(齋室)인 반곡재(盤谷齋)에 비유(比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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