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이수정(대가야읍 벽화길 62-8)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밀양박씨(密陽朴氏) 시조(始祖)


시조(始祖)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이다.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이 여덟왕자를 각기 분봉(分封)할 때 8대군 중 맏아들인 박언침(朴彦忱)을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본관제도(本貫制度)를 처음 정할 당시에 밀양(密陽)의 옛 지명(地名)이 밀성(密城)이어서 후손들이 밀성박씨(密城朴氏)로 본관(本貫)을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년) “밀양부(密陽府)”로 승격되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였다.


(2) 밀양박씨(密陽朴氏) 중시조(中始祖)


박언부(朴彦孚)이다. 공은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던 박찬행(朴讚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세 있는 신하인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에 있다.
(3)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파조(派祖)박현(朴鉉)으로 자는 공숙(功肅)이다.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5세손이며, 관조(貫祖)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의 16세 손이다. 고려 태사(太師) 문정공(文靖公) 밀성군(密城君) 박흥(朴興) 아들로 고종 40년(1253년)에 태어났다.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오르고 무열(武烈) 시호(諡號)를 받았으니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의 중조(中祖)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여 학문에 힘써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뛰어나 그 이름을 떨쳤고, 절의(節義)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충혜왕 1년(1340년) 졸(卒)하니 수(壽) 87세이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밀직(密直) 함(涵)의 따님이다. 공민왕 16년(1367년)에 대사성(大司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과 대사간(大司諫) 박상충(朴尙衷) 등의 상서(上書)에 이르기를 “박현(朴鉉)은 청백리(淸白吏)로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忠孝)의 사상을 널리 보급한 사람으로 가위(可謂)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을 만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건대, 공의 높고 밝은 큰 덕과 가르침으로 말하면 그 업적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과 같이 높고 어지니 이들과 함께 숭의전(崇義殿)과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여 제사하게 하소서”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 사헌부(司憲府) 규정공(糾正公) 휘 (諱) 현(鉉) 제단기(祭壇記)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묘(墓)는 실전(失傳)되어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산(鳳棲山) 봉서재(鳳棲齋) 뒷산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원당) 박재궁(朴齋宮) 윗자락에 공(公)의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분파(分派) 중 규정공파(糾正公派) 후손들이 가장 번성(繁盛)한 것으로 파악된다.


(4) 밀양박씨(密陽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밀양박씨는 724가구, 210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규정공파(糾正公派) 중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 후손들은 대가야읍 고아 2리, 내상리, 연조리, 쌍림면 고곡리에 세거하고 있고 선곡공(仙谷公) 박안현(朴顔賢) 후손들은 다산면 호촌리(湖村里)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사경(朴思敬)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박문유(朴文有)와 밀직사(密直使) 대(玳)의 따님인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우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威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고양군 원당읍 선교리 두응촌 능골 계좌(癸坐)에 있다.
② 박침(朴沈)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박사경(朴思敬)과 수선(守善)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충혜왕 3년(1342년)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전의판사(典儀判事)를 거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망복지의(罔僕之義)를 지키며 우국(憂國)의 세월을 보내며 아래와 같은 시를 읊조리고 정종 1년(1399년) 졸(卒)하였다.
 
“共出北門碧瀾渡(공출북문벽란도)
 북문을 같이 나와 벽란을 건넜으니
 損益三友君且吾(손익삼우군차오)
 지조를 지킨 이 그대와 나뿐일세
 鵠嶺山下迷歸路(곡령산하미귀로)
 곡령산 기슭에서 헤매는 길손이여
 西指首陽問橫島(서지수양문황도)
 수양산 가리키며 횡도야 어디메고”

묘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자좌(子坐)에 있다.

(註釋1) 망복지의(罔僕之義)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의리(義理)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註釋2) 손익삼우(損益三友)
《논어》계씨편(季氏篇)에 공자가, “유익한 벗이 셋을 가르켜 정직한 사람과 벗하고 성실한 사람과 벗하고 박학 다식한 사람과 벗하면 유익하다”고 하였다.
본문 시에서는 지조를 지킨 사람을 말한다.
③ 박강생(朴剛生)
자는 유지(柔之)이고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다. 호조전서(戶曹典書) 박침(朴沈)과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산박씨(密山朴氏) 사이에서 공민왕 18년(1369년) 태어났다. 공양왕 2년(139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補職)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태종 8년(1408년)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자에 대하여 보고를 잘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게 하고 돌아와 태종으로부터 미두(米豆)를 하사받았다.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거쳐 태종 9년(1409년)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그후 지인주사(知仁州事)·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세종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세종4년(1422년) 졸(卒)하였다. 세종 6년(1424년) 딸이 세종의 후궁인 귀인박씨(貴人朴氏)가 됨으로써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름이 높았다. 저술로는『배불론(俳佛論)』이 있다. 묘는 조부 박사경(朴思敬) 묘하(墓下) 계좌(癸坐)에 있다.


(2) 조선시대


① 박중손(朴仲孫)
자는 경윤(慶胤)이고 호는 묵재(默齋) 또는 백당(栢堂)이다.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낸 박절문(朴切問)과 영복군(永福君) 왕고(王高)의 따님인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태종 12년(1412년) 태어났다. 세종 17년(1435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박사(博士)가 되고,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지병조사(知兵曹事)·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 (都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고 단종 2년(1454년)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된 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세조 1년(145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그후 형조판서(刑曹判書)·호조판서(戶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세조 7년(1461년)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 12년(1466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는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 879번길 194 계좌(癸坐)이다.
② 박건(朴楗)
자는 자계(子啓)이고 호는 연봉(蓮峰)이다.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과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낸 문승조(文承祚)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남평문씨(南坪文氏) 사이에서 세종 16년(1434년)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동년(同年)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비롯한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쳤다. 예종 1년(1468년)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성종 3년(1472년) 진하사(進賀使)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와 이듬해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17년(1486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연산군 1년(1495년)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라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추관(推官)이 되어 일처리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우찬성(右贊成) 등을 역임하였다. 판중추(判中樞)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중종 1년(1506년)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策錄)되고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묘는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해좌(亥坐)이다.
③ 박승환(朴承煥)
자는 언문(彦文)이며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 박건(朴楗)과 부평부사(富平府使) 최균(崔)의 따님인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서 단종 3년(1455년)에 태어났다. 성종 11년(1480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지냈다. 졸년(卒年) 및 묘는 미상(未詳)이다.
④ 박안현(朴顔賢)
자는 기백(畿伯)이고 호는 선곡(仙谷)이다. 진사(進士)를 지낸 박신원(朴愼元)과 임수건(林守建)의 따님 사이에서 선조 7년(1574년) 태어났다. 선조 36년(1603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저작(著作)·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낸 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후 이조좌랑(吏曹佐郞)·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임피현령(臨陂縣令)·사간(司諫)·성천부사(成川府使)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 8년(1616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 후손
선조 14년(1581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후환(後患)을 피해 선향지(先鄕地)인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서 박한녕(朴漢寧)이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에 입향(入鄕)하였다고 전해진다.
(2) 선곡공(仙谷公) 박안현(朴顔賢) 후손
1700년대 초반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선곡공(仙谷公) 박안현(朴顔賢)의 고손자(高孫子)인 다계(茶溪) 휘윤(輝潤)이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로 입향(入鄕)하여 후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박한녕(朴漢寧)
자는 익수(益秀)이고 처사(處士) 박동(朴蕫)과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중종 32년(1537년) 태어났다.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세상에 드러났으나 은둔자적(隱遁自適)하면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명성(名聲)과 현달(顯達)함을 구하지 않았던 산림처사(山林處士)이었다. 선조 37년(1604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등(七嶝) 자좌(子坐)에 있다.
② 박남철(朴南喆)
처사(處士) 악습(惡濕) 박세항(朴世恒)과 김일황(金一黃)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순조 26년(1826년)에 태어났다. 순위청(巡衛廳) 순위장(巡衛將)을 지냈으며 향중(鄕中)에 중망(重望)이 있었다. 고종 24년(1887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3리 쾌쾌곡 뒷산 기좌(己坐)이다.
③ 박지화(朴之華)
처사(處士) 박병재(朴炳再)와 유중기(兪重基)의 따님인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고종 18년(1881년)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민중 계몽을 위해 조직되었던 고령청년회 부회장을 맡아 노동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에 기여하였으며 고령금융조합장을 역임하였다. 1936년 고령향교 전교(典校)를 지내면서 향촌(鄕村)의 기강(紀綱)을 진작(振作) 시키는 등 다방면에 걸쳐 지역사회에 공헌하다가 1954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2리 안산(案山) 신좌(辛坐)에 있다. 
(2) 근·현대인물
① 박  암(朴  巖 : 1905년) 인천세관장, 내무부 이사관, 외무부 차관
② 박광수(朴光壽 : 1910년) 광신상회 경영, 고령 상무사 좌사계 반수(班首)
③ 박기원(朴基元 : 1942년) 송재학원 사무국장, 대가야고 서무과장, 대구지방법원 고령법원 조정위원장
④ 박삼태(朴三台 : 1944년) 나산실업 사장, 연합통신 기자, 개진면 명예면장
⑤ 박지수(朴址洙 : 1945년) 지방행정서기관, 고령군 기획감사실장
⑥ 박수용(朴壽龍 : 1948년) 한국자유총연맹 고령군지회 회장
⑦ 박종옥(朴鍾玉 : 1952년) 포항중학교 교장, 경북과학교육원 교수부장
⑧ 박석규(朴錫圭 : 1955년) (주)동국토건 대표, 부촌농원 대표, 고령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⑨ 박봉석(朴鳳石 : 1955년) 고령청년회의소 회장, 고령JC특우회장
⑩ 박  혁(朴  赫 : 1957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의정부지방법원 부장판사, 법무법인 두우&이우 변호사 
⑪ 박지택(朴址澤 : 1960년) 대가야고등학교 교장
⑫ 박원수(朴元洙 : 1961년) 현대제철 포항공장 상무
⑬ 박정현(朴正炫 : 1962년) 고령군의회 의원, 경북의회 도의원
⑭ 박성호(朴成鎬 : 1976년) 울산지방법원 판사

 

자료제공 : 밀양박씨 규정공파 후손 박기원(朴基元),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