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경주김씨(慶州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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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직장공파(直長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그 세 번째로 경주김씨(慶州金氏) 직장공파(直長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시조는 신라 초기의 최고 관직으로, 지금의 수상에 해당하는 대보(大輔)를 지낸 김알지(金閼智)로 65년 금함(金櫝)에서 나왔다. 김알지(金閼智)는 ‘금궤(金櫝)안에서 태어난 아기’라는 뜻이다.

(2) 탄생(誕生) 신화(神話)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출전 : 삼국사기 제1권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9년


(3)신라 임금을 최다(最多) 배출한 명문가(名門家)
① 경주김씨는 김알지의 6세손인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서 후사없이 승하(昇遐)하시니 처삼촌인 제12대 점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 신라 13대왕으로 오르면서부터 신라의 왕성(王姓)이 되었다.
② 따라서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손국(遜國)하고 천년사직을 고할 때까지 신라 56왕 중에서 38왕을 배출하여 삼한(三韓)의 대표적인 성씨가 되었다.
(註釋) 손국(遜國)
전쟁의 항복이 아니라 평화시대에 왕위를 물려준다는 뜻이다.
 
(4) 군내 경주김씨 파별 세거 현황
① 직장공파(直長公派) : 대가야읍 지산1리 모산골
② 계림군파(鷄林君派) : 다산면 벌지리
③ 수은공파(樹隱公派) : 쌍림면 송림1리
2. 경순왕(敬順王)의 아홉 왕자의 분관(分貫) 현황
① 1남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부안김씨(扶安金氏)
② 2남 김굉(金)→나주김씨(羅州金氏)
③ 3남 김명종(金鳴鍾)→경주김씨(慶州金氏) 영분공파(永芬公派)
④ 4남 김은열(金殷說)→경주김씨(慶州金氏) 은열공파(殷說公派)
⑤ 5남 김석(金錫)→의성김씨(義城金氏)
⑥ 6남 김건(金鍵)→강릉김씨(江陵金氏)
⑦ 7남 김선(金鐥)→언양김씨(彦陽金氏)
⑧ 8남 김추(金錘)→삼척김씨(三陟金氏)
⑨ 9남 김덕지(金德摯)→울산김씨(蔚山金氏)

3.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은열(金殷說)
한림대 교수 김용선의 역주(譯註)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 기록된 묘지(墓誌)에 의하면 김은열(金殷說)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설(殷說)이 현종 19년(1028년)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추(錘)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그리고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직장공파(直長公派)는 대파(大派)로 경주김씨(慶州金氏) 은열공파(殷說公派)에 속한다.


② 김장유(金將有)
신라 경순왕의 13세손이며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고려 후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판도사(版圖司) 소속의 정3품 관직인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말기에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보은저답금평각리저돈론(報恩猪畓今坪角里猪敦論)으로 내왕한 후 충북 보은군 종곡리로 옮겨 대대로 살았다. 부인은 삼산이씨(三山李氏)이니 판도판서의 벼슬을 사임하기 전에 귀향하셨고 송고(松固)의 딸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직장공파(直長公派)는 중파(中派)로 경주김씨(慶州金氏)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에 속한다.


③ 김중남(金仲南)
중시조(中始祖) 김장유(金將有)의 아들로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의 문인이다. 고려 말 정5품의 무관직(武官職)인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겸하여 감찰사(監察司)에 속한 종6품 벼슬로 대관(臺官)인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다. 1389년경 진자성(陳子誠)의 패거리가 고려 말의 학자 신현(申賢)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 엮은 책인 화해사전(華海師全) 등 서적과 역사책 들을 몰수하여 소 각(燒却)하자 공은 정몽주(鄭夢周), 원천석(元天錫), 신덕린(申德隣) 등과 더불어 사귀면서 탄식하기를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의 도학(道學 : 성리학)은 천지의 유물(囿物 : 사물)과 같고 그 아들 간재(簡齋) 신용희(申用羲)의 학문은 사시(四時)의 절후(節侯 : 절기)와 같거늘 어찌 광란(狂亂)하는 반역배(叛逆輩)가 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고 일월생(日月生) 즉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이 어두워졌으니 후세(後世)의 백성들은 그 빛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하였다. 홍무(洪武) 25년 공양왕 4년(1392년) 고려가 멸망하자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고수(固守)하였다.

(註釋) 망복(罔僕)의 절의(節義)
멸망한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조선왕조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4. 고령(高靈) 입향(入鄕)


입향조(入鄕祖) 김을당(金乙)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겸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낸 김중남(金仲南)의 셋째 아들로서 조선시대 빈객(賓客)의 연향(宴享)과 종실(宗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인 예빈시(禮賓寺)의 종7품 직장(直長)을 지내고 여말선초(麗末鮮初) 즉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정치적 격동기(激動期)의 혼미(昏迷)한 정국(政局)을 피하여 조선 태종 10년(1410년) 선향지(先鄕地)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鍾谷里) 북실마을에서 낙남(落南)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1리 월기촌(月器村)로 이거(移居) 및 정주(定住)하여 망족(望族)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후손들 중 장파(長派)인 생원공파(生員公派)는 달성군 옥포면 강림리에, 중파(仲派)인 기재공파(棄齋公派)는 고령군 일원에, 둔와공파(遯窩公派)는 의성군 금성면 구연리에, 숙파(叔派)인 참봉공파(參奉公派)는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에 계파(季派)인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는 성주군 용암면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5.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공(金供 : 생졸년 미상)
자는 정옥(庭玉)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 김숙문(金叔文)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 2년(1496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② 김수옹(金守雍 : 1513년∼1559년)
자는 경화(景和)이고 호는 기재(棄齋)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낸 김공(金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31년(1536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후 연서찰방(延曙察訪), 평안도 평사(評事), 예안현감(禮安縣監), 경상도 도사(都事)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예안현감(禮安縣監) 재직시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다스리고 공평 정직한 정무(政務)를 수행하였던 목민관(牧民官)이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관인(官人)과 백성이 그를 존경하며 추종(追從)하였다. 명종 1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합천의 숭산(崇山)에 들어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여 지동암(志同岩) 밑에 허물어진 두 선생의 강학지소(講學之所)를 중수(重修)하고 삼수정(三樹亭)이라는 학당을 지어 문풍(文風)을 진작시켰으며 명종 3년(1548년)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고 탁마(琢磨)하는 장소 즉 강마도의지소(講道義之所)인 향림정(香林亭)을 창건하고 고령지역 최초로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의 4가지 덕목(德目) 중 실천가능한 10조를 엄선(嚴選)하여 향약(鄕約)으로 계(稧)를 만들어 규약(規約)을 세우고 생활화(生活化) 하도록 힘껏 가르치니 향풍(鄕風)이 교화(敎化)되었다고 향중(鄕中)이 모두 선생을 더욱 존경하였다. 아버지가 와병(臥病) 중일 때 단지진혈(斷指進血)하는 등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따라 정성을 다하였다.
(註釋) 단지진혈(斷指進血)
부모님이 병중에 있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도록 하는 효도방법이다.


③ 김내옹(金乃雍 : 1513년∼?)
자는 언화(彦和)이고 호는 둔와(遯窩)이며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낸 김공(金珙)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35년(1540년) 경자(庚子)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과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중종 38년(1543년)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형과 아우를 두고 세상에서는 한 쌍의 옥 즉 ‘연벽(聯璧)’이라고 일컬었다. 공이 과거에 급제하자 기재 김수옹(金守雍)은 동생에게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고 경계하였는데 평생 명심하고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해남현감(海南縣監)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과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갈벌(지금의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공의 학행과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의성군 금성면 구련2리에 유허비(遺墟碑)와 재실인 무민재(无憫齋)가 세워져 있다. 평생 맏형인 김수옹(金守雍)을 따르고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여 사제간(師弟間)과 다름이 없었다.


④ 김응정(金應井 : ?∼1600년)
초휘(初諱)는 응두(應斗)이고 자는 천경(天經)이며 호는 둔재(遯齋)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김치옹(金致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조 16년(1583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봉직랑(奉直郞)의 품계를 받고 조선시대에 의식(儀式)에 쓰이는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한 관청인 전설사(典設司)의 별좌(別坐)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배종관(陪從官)으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무사히 호종(扈從)한 공로로 호성원종2등공신(扈聖原從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이덕형(李德馨), 정곤수(鄭崑壽)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청병(請兵)하는데 공을 세웠다.


⑤ 김영달(金永達 : 1569년∼1614년)
자는 시언(時彦)이며 호는 고양거사(高陽居士)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김감(金戡)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 선생의 증손(曾孫)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치헌(恥軒) 류세훈(柳世勛), 구주(鷗洲) 강대적(姜大適) 등 인근 지역의 명유(名儒)들과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청금록(靑衿錄)’에 학문(學問)이 능달(能達)하여 사림(士林)이 추중(推重)하였으며 덕행(德行)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2년(1610년)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외생질(外甥姪)인 박이립(朴而立)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모함하여 무고(無辜)하게 성주옥(星州獄)에 갖히는 경술지옥(庚戌之獄)이 발생하였을 때 18제현(諸賢)이 상소(上疏)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던 한강변정(寒岡辨正)에 공도 참여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상덕(金尙德 : 1891년∼1956년) 
자는 현여(玄汝)이며 호는 영주(令洲)이다. 김돈희(金敦熙)의 5남으로 대가야읍 저전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선생의 내곡서당(乃谷書堂)에서 한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12년 고령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田大学) 경영학부(經營學部)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8일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동경의 기독교회관에서 도코 2·8 독립선언 실행위원으로 선언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1920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만주로 옮겼다. 1927년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朝鮮獨立運動者後援會)를 결성하여 창립위원으로 김좌진(金佐鎭)과 합세(合勢)하여 한국독립단 간부에 피선(被選)되어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혁명대표자회의(東方革命代表者大會)에 참석하고 주중청년회대표(駐中靑年會代表)로 활약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옮김에 따라 부주석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사천성(四川省) 손가화원(孫家花園)으로 이주하였다. 1945년 3월 문화부 부장이 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하였다. 1946년 미군정(美軍政)의 과도입법의원(過渡立法議院) 입법위원장(立法委員長)에 당선되고 1947년∼1948년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위원 선거에 민족통일본부(民族統一本部) 후보로 고령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후 1948년 10월에는 친일파(親日派) 청산(淸算)을 위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위원장(委員長)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과아(瓜牙) 2명을 방유(放宥)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일축(一蹴)하였다. 1950년 6·25 때 납북(拉北)되어 1956년 4월 28일 평양에서 졸(卒)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이 추서(追敍)하였으며 1992년 11월 애국지사 현창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주산 등산로 대가야교육원내 옆에 ‘광복지사(光復志士) 영주(令洲) 김상덕(金尙德) 선생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註釋1) 과아(瓜牙)
날카로운 발톱과 어금니를 뜻하니 심복(心腹)인 부하를 말한다.
(註釋2) 방유(放宥)
죄인을 석방하여 용서하여 주는 것을 뜻한다.

② 김수익(金守翼)→38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법제처 행정법제국 법제심의관
③ 김긍호(金肯鎬)→대구직할시 중구청장 역임
④ 김실경(金實慶)→고령, 대구 중부 경찰서장 역임
⑤ 김영옥(金永玉)→제5대 고령군의회 의원
⑥ 김재권(金在權)→제24대 청주세관장 역임
⑦ 김영신(金永信)→고령군청 기업경제과장
⑧ 김유미(金裕美)→서울지법 동부지원판사
⑨ 김영욱(金永旭)→성균관대 의대 교수, 삼성서울병원 심혈관센터장
⑩ 김영국(金永國)→영천시청 사무관 역임
⑪ 김한국(金漢國)→구미, 포항, 경주경찰서 과장(경정) 역임
⑫ 김점순(金点順)→경북대 법대 교수 역임
⑬ 김지은(金智恩)→2014년 행정고등고시 합격,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

(자료 제공) 종손 김영신(金永信),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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