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驪州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고양군후예(高陽君後裔) 대종중(大宗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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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고양군후예(高陽君後裔) 대종중(大宗中) 주관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고양군후예(高陽君後裔) 대종중(大宗中) 주관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동평장사(同平章事) 고양군(高陽君) 이헌(李憲)의 위적(偉蹟)을 기리는 현창비(顯彰碑) 제막식(除幕式)이 지난 19일 오전 11시 대가야읍 장기리 산 20-2번지 소재 금산 고양정(高陽亭)에서 가졌다.


이날 이동훈(李東勳) 대종중 회장, 이홍식(李洪植) 부회장, 이동은(李東恩) 총무 등 대종중 회장단과 이영희(李英姬) 고령군의회 의장, 그리고 종중원 및 내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개식선언, 선조영령에 대한 묵념, 내빈소개, 경과보고, 추진위원장(推進委員長) 인사(人事), 이영희(李英姬) 고령군의회(高靈郡議會) 의장 축사(祝辭), 비문낭독,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되었다.


여주이씨(驪州李氏)는 가문의 뿌리가 명확하고 우리나라 성씨집단중 제일 맑고도 순수한 씨족으로 ‘동방정수지세족(東方精粹之世族)’으로 불리워지고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07명, 정승 2명, 판서 6명, 대사헌 7명, 문형(文衡) 3명, 청백리 3명, 호당 2명, 봉군(封君) 6명을 배출하여 벌열(閥閱)을 이루었다.



▣이은백 시조, 이규보 중시조로 세계 이어가


여주이씨는 크게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며, 학문이 심오(深奧)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워졌던 이규보(李奎報)를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며 실학파(實學派)의 중조(中祖)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배출한 교위공파(校尉公派),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며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성리학(性理學)의 거봉(巨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배출한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아래에서 여주이씨(驪州李氏)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 고양군(高陽君) 이헌(李憲)의 가계(家系)와 배출된 직계후손들을 보면, 공의 조부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으며, 진정표(陳情表)로써 수십만의 몽고군을 격퇴하여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이상을 실현했던 고려 최고 문장가인 문순공(文順公)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이며, 아버지는 청현직(淸顯職)인 사간(司諫)을 지낸 이징(李澄)이다.

 공은 고려 고종 44년(1257년)에 태어나서 충렬왕 3년(1277년)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재임 중 함주(咸州) 차유령(車踰嶺)에서 동여진(東女眞)을 격퇴(擊退)한 전공(戰功)으로 고양군(高陽君)에 봉군(封君)되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외교부장관과 교육부장관의 직무를 담당하여 부총리(副總理)에 해당하는 동평장사(同平章事)의 관직에 올랐다.

 충선왕 2년(1310년) 개경(開京) 동부(東部) 봉향리(奉香里)에서 식읍지(食邑地)인 고양(高陽) 즉 고령(高靈)의 수조지(收租地)를 관리하고자 고령에 시거(始居)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고, 이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여주(驪州)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高靈)으로 했으며 고령이씨(高靈李氏)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여주로 환관하기 전 고령이씨로 세계를 이어오다


조선 고종 17년 1880년 예조(禮曹) 완문(完文)에 의거 여주(驪州)로 환관(還貫)하기전까지 후손들은 고령이씨(高靈李氏)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공으로부터 700여 년간 세거하여 망족(望族)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들인 이언(李彦)은 홍건적(紅巾賊)을 평정(平定)한 전공(戰功)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여(女)는 고령박씨(高靈朴氏) 4대 대종손(大宗孫)으로 최초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어 검교흥위위대장군(檢校興威衛大將軍)의 관직에 올랐던 박지순(朴之順)에게 출가(出嫁)하여 박씨(高靈朴氏)와 더불어 여말(麗末)까지 고령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던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군림(君臨)했다.


손자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획책(劃策)한 이성계(李成桂)의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고려(高麗)를 부흥(復興)시키기 위해 충의군(忠義軍)을 일으켜 니산, 덕대산, 운라산성, 상원산 등지에서 항전(抗戰)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사(殉死)하자 후인들이 휘(諱) 산명(山名)을 삼아 종래 상원산(上元山)을  미숭산(美崇山)으로 고쳐 불렀으며 미숭신사(美崇神祠)를 세워 정충대절(精忠大節)을 숭앙(崇仰)했다.


미증유(未曾有)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공의 9세손 이경령(李景齡)은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아장(亞將) 이천령(李千齡)은 고령현 최초 전투인 풍곡리(楓谷里)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寺正)과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除授)받았다. 11세손 이중립(李中立) 이성립(李誠立) 형제는 문과(文科)에 동방급제(同榜及第) 형조좌랑(刑曹佐郞)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13세손 이선태(李宣泰)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전공을 세워 양무원종2등공신(揚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18세손 휘 봉조(鳳朝)는 고령군수(高靈郡守) 서리(署理)를 지낸 후 고령지역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했고 우신학교(又新學校)를 설립, 경신년(庚申年) 대홍수(大洪水) 때 사재(私財)로 수백 명의 이재민(罹災民)을 구휼(救恤)하고 고령향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는 등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현대에 이르러 정·관·학계에 두드러진 인물 많아


현대에 이르러 관계(官界)에서는 19세손 이용수(李龍洙)가 육군 소장(少將)으로 예편하였고, 20세손 이홍직(洪直)은 고령군수(高靈郡守)와 월성군수(月城郡守)를 지냈다. 21세손 이하룡(李河龍)은 청와대(靑瓦臺) 공보비서관과 시애틀 총영사(總領事)을 역임했다.

이규문(李圭文)은 경무관(警務官)에 올랐으며, 22세손 이동석(李東奭)은 국가정보원 부이사관(副理事官)을 지냈고 23세손 이용섭(李龍燮)은 문경군수(聞慶郡守), 이상훈(李相勳)은 조달청(調達廳) 중앙보급창장(中央補給廠長), 25세손 이규효(李圭孝)는 내무부차관(內務部次官)을 거쳐 건설부장관(建設部長官)을 역임했다.


학계(學界)에서는 21세손 이상윤(李相潤) 중앙대(中央大) 부총장(副總長), 22세손 이순탁(李舜鐸) 세계물포럼 운영위원장(運營委員長) 및 영남대(嶺南大) 최초(最初) 석좌교수(碩座敎授), 23세손 이성열(李成烈)은 성균관대(成均館大) 부총장(副總長) 수능출제위원장 성균관대 이준식(李浚植) 교수, 미시시피 주립대학 이승욱(李昇郁) 석좌교수 등 교수 출신이 20여명에 달한다.


의학계에는 서울대 의대 이시욱(李時旭) 교수를 비롯하여 25명이 활약하고 있으며, 언론계에는 23세손 이용우(李勇雨)가 중앙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냈고 이재열(李在烈)이 영남일보 및 대구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그밖에 20세손 이우필(李禹弼)은 3.1 만세운동으로 순국(殉國)한 애국지사(愛國志士)이고 21세손 이대호(李大浩)는 재일동포(在日同胞) 실업가이며, 21세손 이영희(李英姬)는 최초(最初) 여성(女性) 고령군의회(高靈郡議會) 의장(議長)에 선출되었다.


외손 허태열(許泰烈)은 충북지사(忠北知事), 국회의원(國會議員)을 거쳐 대통령(大統領) 비서실장(秘書室長)을 역임하였으며 김대환(金大煥)은 노동부장관(勞動部長官)을 지내는 등 동량지재(棟梁之材)가 속출(續出)되고 있다. 여서(女壻)로는 3선의 경남도 지사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지낸 김혁규(金爀珪),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조일환(曺逸煥), 동국대 총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낸 정재각(鄭在覺) 박사 등이 있다.

 
최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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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주간고령 편집부님에 의해 2018-06-28 11:52:48 특집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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