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나라> 잔소리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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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필나라> 잔소리하는 사회

정아경(수필가)

서울을 다녀왔다. 여럿이 가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무리 속에서 정신없이 보내는 나날이 많다보니 홀로 열차를 타는 시간의 여유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해서 읽고 싶어 사두었으나 읽지 못했던 제법 두툼한 책까지 챙겨 밀회를 떠나듯 기차를 탔다. 열차는 생각보다 조용하지는 않았다.


지인과 나란히 앉아 다닐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 승객들의 담소보다는 규칙적으로 알리는 안내방송이 귀에 거슬렸다. 그것은 모처럼 내면이 안정되어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들렸을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읽고 있었던 칼럼의 한 구절 때문일 수도 있다. 슬라보에 지젝은 “유럽의 레스토랑에서는 바닥에 침을 뱉지 마세요. 음식을 버리지 마세요 등의 문구가 적힌 곳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강요받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당연한 상식을 강요하는 사회는 어딘가 누구에겐가 권위를 부여하고 일반 대중은 여전히 계몽과 선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다시 서울에서 잡지사 사무실까지 가는 길에서 내가 살핀 것은 당연한 소리를 하는 문구들이었다. 그리고 이 원고를 쓰는 몇 시간 전까지 내 관심사는 우리 사회가 하고 있는 잔소리 문구를 찾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내어지르는 잔소리는 경고의 수준을 넘어 공해다. 문제는 사회적 잔소리에 무덤덤하고 지리멸렬해져 누구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세요. 기차의 안내방송,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 라고 적힌 지하철 노약자석의 안내문, 화장실 내부에 나붙은 다양한 문구는 더더욱 당연한 상식의 요구다. 낙서를 하지 마세요, 담배꽁초 휴지 껌 등을 변기에 넣지 마세요, 사용 후에는 물을 내려주세요…. 게다가 기대면 추락 위험. 손대지 마세요, 라는 엘리베이터 안의 경고문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마주친다. 영화관에 갈 때마다 앞자리를 차지 마세요, 휴대폰을 꺼주세요 등의 문구가 먼저 눈에 띈다. 너무나 상식적인 것들을 왜 이리 호들갑스럽게 강요하는 것인가.


잔소리는 싫다. 당연한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는 것이 잔소리다. 우리사회 곳곳에 잔소리가 넘쳐난다. 지키지 않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다. 우리의 시민의식이 그렇게 후진적일까. 그렇다면 기분이 더 나쁘다. 잔소리 때문에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집안뿐만 아니라 집밖에서 무수히 들어야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 대부분이 다 지당하신 말씀들이다. 다 옳다. 하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개인의 자율성을 제어하는 투의 지시는 도리어 역작용을 일으킨다. 방만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우리의 자식을 또 우리의 시민성을 믿지 못하는 저 권위의 실체는 무엇일까. 똑같은 말들만 반복재생산하는 사회가 걱정스럽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다면 믿고 놔두시면 어떨는지.

차라리 그 자리에 명문장이나 그림 한 점 걸어두면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어제 어떤 빌딩의 화장실에서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사랑의 시체가 말했다//가장 잘 자란 나무 밑에는/가장 잘 썩은 시체가 누워있다고//가장 큰 사랑의 눈에는/가장 깊은 슬픔의 눈동자가 있다고//봄나무에게서 꽃이 피는 너에게
-김수복, ‘꽃이 피는 너에게’

불편했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봄이 그냥 오는 것은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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