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회 의원에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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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군의회 의원에게 바란다

                         김 년 수​

고령군 의회의 의장단이 구성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면면을 보면 상당히 유능하고 젊은 진용으로 구성이 되었음을 보게 한다. 그러나 3선 의원을 제치고 초선 의원이 군 의회 의장으로 선출이 되는 이러한 이변은 지역 국회의원의 개입과 몇 의원들의 협작으로 밝혀졌다면서 불만을 표출하고 탈당사태까지 간 군 의회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바 있다.


군 의회 운영은 전문성과 함께 신뢰를 바탕으로 행정부를 견제하며 투명하게 운영하여 고령군  발전에 기여하고 군민들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런데 작은 명예에 빠져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을 뒤로 하고 삐걱거리는 군 의회의 의원들을 군민들은 어떻게 믿고 기대를 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를 단순히 정략과 배신에 의한 쿠데타적 산물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들과 함께하는 지도력의 부족이거나 함량미달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고령군의회는 개원되었고 앞을 향하여 전진을 해야 하며 제 역할을 다 해야 한다. 배신을 당한 쪽이나 배신을 한 쪽은 군 의원으로서의 명제를 곱씹어 보며 화해의 손길을 잡아야 하고 본분을 지키는 자세로 군민들의 필요 사항을 완수해야 한다. 군민들은 의원들이 결연히 나서서 본분을 다해 준다면 지금의 사태를 새로운 도전과 개혁의 출발임을 알리는 신선한 신호탄일 것으로 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군 정책 입안과 집행에 대하여 앞으로 군 의회가 어떻게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과정과 성과를 감시하는 군민들이 많다. 그래서 새롭게 구성된 의회에 대해서는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군의회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게 개혁되고 변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책 입안에서부터 예산 편성과 집행에 있어서 개혁적인 사고가 필요하며 구체적으로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이 세워지고 집행이 되어 고령의 백년대계를 세워 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활기찬 젊은 세대로 채워진 군 의회는 인기에 영합하지 말고 진정으로 군민을 위한 자세로 진솔하게 업무에 충실하기를 기대하면서,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의 어부사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굴원은 높은 학식과 뛰어난 정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굴원은 정치세력에 의한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좌천되어 그 마지막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굴원이 마지막에 죽은 장소는 멱라수라는 장소로 동정호로 흘러들어가는 강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이 장소는 훗날 조선의 시나 소설에서도 끊임없이 언급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굴원의 절개, 결백, 떳떳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주인공들이 자신의 떳떳함을 증명하기 위해 멱라수로 몸을 던지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언급되는 한국 작품으로는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있다. 즉, 예로부터 굴원이라는 인물 자체는 결백, 떳떳함과 같은 상징적 의미로 대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 이유는 굴원이 자살을 택하기 직전에 지었던 어부사라는 시 때문이다.


어부사에서는 굴원이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시가 시작된다. 굴원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것은 길 끝에 펼쳐진 강이다. 그 순간 굴원 앞에 어부가 나타나 굴원에게 "그대는 삼려대부인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소?" 라고 하니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흐려 있는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들은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어 쫓겨났소."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임이 없으니 세상일 흐름 따라 흘러가니. 세상사람 모두가 흐려 있다면 어찌 뻘 속에서 함께 뒹굴며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며, 뭇사람 모두가 취해 있다면 술지게미로 배불리 먹고 변변찮은 술이나마 실컷 마시지 않고, 어째서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굴어 스스로 쫓겨난 것이오?"


굴원이 대답하기를 "듣자 하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갓의 먼지를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이는 옷을 털어 입는다 했으니. 어찌 이 깨끗한 몸으로 저 더러움을 받을 수 있으리오?. 차라리 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희고 깨끗한 내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오?" 라고 하니 어부는"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라고 말하면서 사라진다.


굴원은 어부사를 짓고 난 후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굴원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과 깨끗함을 말하고 있고, 어부는 계속해서 정치란 원래 더러운 것이니 적당히 타협하라며 종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굴원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하자 어부는 떠나가고 남은 것은 굴원의 죽음뿐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들이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지키는 신념을 위해 고단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갖 조롱을 당하는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모두가 취한 세상에서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모두가 취한 세상에서 취하지 않고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굴원이 후대에 이름을 남긴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세상과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의 방식과 개인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고통을 감수하는 삶의 방식이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전자는 노자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깊고, 후자는 소수의 사회 지도계층이 견지해온, 정의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맹자의 유가 사상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양극단에 치우친 삶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는 개인적 이익이 절대 가치로 승격한 현대 사회에서 부조리한 사회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자칫 시류에 영합하는 포퓰리즘과 보신을 위한 기회주의로 전락할 유혹을 배제하기 어렵고,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비판적 사고가 함몰될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후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개인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이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한갓 독선과 독단의 교조(敎條)에 빠질 수도 있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면 집단이나 조직에서 배척당하는 왕따를 당할 수 있고, 개인의 고결함을 견지하지 못하면 자존감 상실과 개인의 존엄성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양극단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난 중도(中道)를 찾는 것이다. 이는 먼지가 자욱한 세상과 더불어 살되, 독야청청의 자세를 버리고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일반의지를 실천하는 일이다.


* 사외(社外)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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