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驛) 시인·한문지도사 이재천 그 옛날경주역 앞에는 눈먼 장님 한분이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문호숫가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는 어느 봄날 한 신사분이 동전 몇 잎만 담긴 장님의 구걸함에일만원,오천원 두장을 넣고는큰 글씨로 이렇게 쓰고 돌아갔답니다. “봄이 와도 저는 꽃을 보지 못합니다.내 생애 단 한번이라도 봄꽃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라고……그 뒤 장님의 구걸함이 좀 넉넉해졌는지는아직도 알지 못...
장마비 시인·시조시인 春江 이종갑 세상의 뜻이려나 하늘의 뜻이려나억수 같은 장대비는 풀잎마저 찢어놓고그칠 줄 모를 장마에 할퀴고 뜯긴 산야 하늘도 묻어버린 내 삶의 터전위에시커먼 바위 하나가 우두커니 앉아있다구름을 곱하고 나누다 소수점만 남은 빗물 광화문 앞 시위대처럼 수마로 변하더니몽고인 침범 때 같이 흔적조차 쓸어갔네그립다 젊음의 태양 낭만의 저 바다가
돌아가는 길 서상조시인/소설가 한 세월을 다 채운 사람이돌아가셨다네요돌아서 가려면 살아온 만큼그 길이 멀 텐데요귀신 걸음으로 가도삼일장은 모자라겠네요어쩌면 돌아가다가첫사랑을 나누었던포플러나무 밑에 닿아서한참을 머무를지도 모를 일이지요돌아가는 길은 시간을 좀 더느긋이 해야 되겠네요돌아가면 모든 것이 끝인데길목마다 한 번씩 짚어 보고아기 때에까지 이르러다시, 어머니젖가슴의 포근한 향기도느끼고 갈 수 있도록시간을 조금은 더 줘야 되겠네요 서상조시인/소설가
시인 김청수 공벌레 한 마리빌딩 길모퉁이 앉아 먹이를 이리저리 굴린다 잠시 바람이 쉬어갈 뿐 파지에 가려진 손수레공처럼 비틀비틀길을 피해 길을 간다 몸집보다 몇 배나 큰 먹이를 굴리며사막을 걸어간다 시인 김청수
정글의 총소리도 조용해지고멀리서 포성 소리만 쿵쿵 들리는 오후 한나절더위에 시달리던 전우들에게 하얀 이슬비가 내린다 무거운 철모도 방탄조끼도 벗어 던지고 온몸으로맞이하던 하얀 정글의 이슬비…정글의 고요가 찾아오면 그리움이 쌓이는 젊은 날의추억들, 죽음이 무엇인지 두려움을 모르던 그때의그 기백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총알보다 더 무서운 고엽제를 온몸으로 맞으면서전우가 죽어가는 그 속에서 우리는 조국 건설을노래하였다 아프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외로움도 없는 날은우리는 얼마나 남았을까.서서히 죽어가는 우리들...
이종갑시인·시조시인 대 가 천 어디서 시작 되었나옥수(玉水) 같은 물빛이다무흘구곡(武屹九曲) 풍경지고 하(河)를 찾아 가는 길에양(兩) 남도(南道) 길 트는 회천교 교각아래 쉼표 찍으면 이천년 무딘 서정대가야 혼이 서린사요(史要)에 걸린 말씀 고분군(古墳群)이 얼비치고그 젖줄 대(大) 서사시(敍事詩)로 낙동강이 열린다 뭇별이 걸어가는한 떨기 묵란(墨蘭) 속을가야금 그 한가락 환청(幻聽)에 낭자(狼藉)하여왜가리 바지를 걷고 첨벙첨벙 춤을 춘다.
서상조서인·소설가 그때를 후회하시나요이젠 때가 늦어어찌할 수가 없지요때늦지 않은 그때가 있다면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어요?……그렇다면 지금이 그때예요훗날엔 어차피 지금 이 순간을 그때라고 부를 테니까요지금, 사랑하세요다 뿌리치고이젠 자신을 사랑하세요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내 마음을 송두리째 맡기는 일이니자칫 껍데기로 남을 수도 있어요자신의 사랑보다 더 미더운 사랑은 없을 테니자신과 사랑을 나누세요후회 속의 그때도그렇게 보상 받는 것이에요 작가 프로필 2000년 ‘문예사조’시부문 등단2001년 ‘대구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