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정시인 / 소설가 “더는 안 돼!”엄마가 딱 잘라 말했어요.“딱 한 개만! 응, 엄마!”겨울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어요.“그게 얼만데?”잠시 마음이 흔들린 엄마가 값을 물었어요.“만 칠천 원이요!”“뭐? 만 칠천 원? 무슨 팽이가 그렇게 비싸!”엄마의 눈이 동그래졌어요.“날개가 달라요. 엄청 크고 튼튼하거든요.”“오나돼! 그렇게 비씬 물건은 사줄 수 없어. 안 그래도 할머니 때문에 정신없는데 팽이 사달라는 말이 나오나? 그건 그렇고 아까 학습지 하라고 한 건 다 했어?”엄마가 말을 돌렸어요.“아, 아직…….”“숙제...
서상조시인, 소설가 적도가 온다 사과나무는 왜 북극이 그리울까차츰 차츰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 한라봉도 따라가고적도가 고향인 바나나도 뒤를 따른다 나도 버티고 버티다가 언젠가는 저 나무들의 뒤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적도가 밀려오고 있으니 올해 여름은 더 덥다
문성희시인 한 잔 술에 추억을 부으면어둠 속에 빛나는 별빛이 내려앉네 지나가던 가녀린 바람 손길이 느티나무 가로수를 연주하네 내 사랑 쉴 곳은 어디인가구름에 실려 가는 달무리 술잔에 추억이 풀리네그 향기에 취해 가슴은 젖네 온몸 떨리던 그 밤의 기억맑은 두 눈에 담겨 오는 그녀의 그리움
최종동 대한웰다잉협회 고령군지회장 나는 죽었다. 지금 나는 관 속에 누워 있다. 삼베 수의를 입고 손과 발은 하얀색 끈으로 꽁꽁 묶인 채 600x1900x450mm 크기의 나무로 만든 관 안에 누워 있다. 관 뚜껑이 닫히고 세 차례의 못 박는 망치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의 귓전을 친다. 귀청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관 뚜껑과 관 사이에 가느다란 빛이 새 들어왔다. 아주 캄캄한 어둠은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 뚜껑 위로 어떤 천이 덮이는 듯 하더니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아! 여기가 바로 무덤이구나. 밖과 안...
우종율수필가 우후죽순이라 했던가. 여기저기 빈틈없이 장악했다. 러시아군 탱크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침공하듯, 며칠 전 새 넝쿨손이 울타리 전체를 덮어버렸다. 이대로 둔다면 온 밭 전체가 녀석의 줄기로 싹쓸이할 게 틀림없다. 낫을 들고 녀석들의 줄기를 자른다. 녀석들은 억울하단 말조차 하지 않는다. 철면피다. 경계가 있는 곳에 함부로 뿌리를 내리면 주거 침입죄에 해당이 된다. 도대체 어디서 온 녀석일까.닷세 동안 텃밭을 찾지 않은 게 이유라면 이유다. 그동안 우기가 길기도 하고 일상에 푹 빠져 다른 곳에 눈을 둘 여유조...
강기철시인 꽃 지는 치마산 펼쳐진 분홍 치마폭그 수줍은 가랑이 사이로 뱀 한 마리 기어 들어간다저거 저거 치마를 들춰야 하나치마를 아니 저 뱀을 어떡하나 흘깃 흘깃 조마조마그 여자 열 오른 얼굴 아래점점 짧아지는 치마폭만 바라본다내 봄날이 다 지나간다
곽호영시인 도로 아미타불 시간이 흐르면서악몽 같던 상황이 수습되기 시작했다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던 것도시간이 흐르면서였고그를 이해할 수 있는 관용도시간이 준 선물이었다구차하다고 생각했던 삶을꽤 괜찮게 살 수 있게 해준 것도시간이 흐르면서였다 대책도 없이그와 마주쳤다모든 상황이 원위치 되는 데 걸린 시간은삼 초면 충분했다
이길호시인/고령문협 낭송분과위원장 DB(동부)화재 소장 어느 죽음 한 사나이가 죽었다고 하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몇 년 동안 걸치더니 독이 되었던 것일까 권력이란 것이 철없는 자들의 장난에 불과하고 진정 존재하는 것이 아닐진대 그 착각의 독배로 인하여 때 아닌 죽음을 맞았네 어디 한 사람뿐이랴 지금도 세인의 욕을 딛고서 그 유혹으로 죽음의 행보를 하는 자가 있을 것이네
여명시인 찔레꽃 향기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장사익의 목젖 바이브레이션 따라 도포자락 소매끝동이 파르르 떤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이해인 수녀의 ‘사랑한다는 말은’ 그, 낭송이 끝나는 싯구 끝가지께로 벌새 한 쌍이 사뿐히 날아든다.
진금선(동시인 / 스토리텔링 동화 연구가) 비닐 대신 시장바구니로장을 보시는 엄마도세재 대신 밀가루 풀어설거지하는 아줌마도 뱅글뱅글 이리저리 다녀도벗겨지지 않는 비닐 목에 건 돌고래가 야금야금 먹었던 플라스틱배 속에 쌓여 죽어가는 동물들이 생길까 봐 하는작지만 위대한 노력들 말하지 않고표정도 없는데알 수 있는 동물들의 슬픔 그 슬픔이 우리들의 슬픔으로 이사하지 못하도록 천년만년 친환경‘참 잘했어요’ 도장 꾸욱
서상조시인·소설가 남편은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만 영순에게 만큼은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단정한 눈빛이 다른 모든 부분을 휘감아 감추듯 했다. 그래서 영순은 남편을 마주할 때는 고향의 운봉산이 생각났다.비가 온 뒤에는 머리만 내어 놓고 하이얀 모시를 두른 것처럼 운무를 휘감고 있는 그 모습이 남편을 보면 생각났던 것이다.한 마을에 사는 시부모의 간섭도 남편은 철저히 차단시키고 영순과 자신의 영역을 분명히 해 오고 있었다. 차츰 자신을 마비시켜 오는 병과의 싸움 중에서도 정상인에게 찾아볼 ...
진금숙(동시인/스토리텔링 동화연구가) 쾌락의 오물로 창조되어기어이 뚫고 나온 매립지 위꽃 한 송이 거친 줄기마다 피가 맺히고시커먼 토양과 함께 찢겨 나온 꽃잎들은오물의 양분을 빨아 먹고독하게 돋아 올랐다 꽃 입술이 열릴 때면썩은 향기로 날아올라코끝을 마비시키는 매력 추악한 벌레들이난잡하게 꽃으로파고들게 하는 견인력 거대한 꽃절정의 꽃이 시대의 걸작시체 꽃 한 송이가아름답게아름답게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