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민희?”“최승호?”“아는 사람이야?”“울 학교 학생회장이에요. 작년에 같은 반이었구.”“…너 술 마셨어?”그 학생회장인지 헤이하치인지가 민희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후다닥 민희를 뒤로 감추면서 말했다. “설마, 술은 나 혼자 먹었어.”학생회장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리고는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의외다, 너? 붙박이처럼 공부만 하더니.”“지는. 공부 머신이 이런 덴 웬일이래? 것두 사복 차림으로.”머신이라는 말에 회장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술 ...
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난 최근엔 계속 야근하느라 집에 들어오면서 씻고 자기 바빴거든. 그래서 드라마는 죄다 놓쳤어. 드라마 이름이 뭐야?”“오후 정원이요.”“ 아, 그거 우리 과 여직원들이 재밌다고 난리던데.”“네, 재밌어요. 진짜루요.”“한 번 봐야겠네.”“꼭 보세요. 안 보시면 후회해요.”“알았어, 알았어, 이제 먹을까?”민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나를 따라 조심스레 눈앞의 잔을 들어 올렸다.“짠 하자.”“넵!”민희는 잔을 세게 부딪치고는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호기롭게 소맥을 벌컥벌...
진금숙(스토리텔링 동화연구가) 비 내리는 여름날낡은 보도블럭에큰 트럭들이 힘주어 지나간다보도블럭 모서리들이 조금씩 부서지더니그 틈 사이로 비가 스며들면서작은 웅덩이들이 태어났다 제각기 웅덩이들은 꿈꾸듯 말을 한다“이렇게 살다 보면 나도 연못이될 수 있을까?”“가을비라도 늦게까지 내려서 물이마르지 않는다면 몰라”“난 내 물을 동동 구르며 한 번만추워보고 싶어”“난 첫 눈을 보며 하얏게 얼어보고 싶어” 이들의 기적은우리들의 일상
독도 물길 이 백리 파도를 타고가면 동해의 가장자리 동도 서도, 섬 가족 옹기종기 살아가는 세상 심해에 뿌리박고 돌 기둥 세워 올려 우레 같은 파도에도 우레 같은 천둥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내다운 섬 조상들이 지어주신 대한봉 우산봉 탕건봉 삼봉을 지붕삼고 촛대바위 촛불 켜고 삼형제 동굴바위 형제우애 두터운 정 가슴에 새긴 한국 령 한국인이 새겼나니 변방에서 부르노라 독도의 노래 변방에서 지키노라 대해에서 싸우노라. * 독도의 날을 기해 부부동반 독도 나들이...
모처럼 이른 퇴근을 하고 내 구두 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번화가를 벗어나 편의점이 있는 골목에 도달했을 무렵, 웬 여학생이 아를 붙들었다. “저기, 언니…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미성년자가 편의점 근처에서 할 부탁이래 봤자 뭐가 있겠는가. 나도 살다 보니 말로만 들어오던 담배 셔틀을 부탁 받는구나 싶어 긴장했다가 여학생의 차림새를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귀밑까지 바짝 자른 똑단발에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기나 꾸민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애의 차림새는 누가 봐도 그림으로 그린...
이병연(고령문협 오픈스터디 회원) 내캉 놀러가자 “아이고 와 이리 덥노”밖에 나가려는데 하늘을 보니햇볕이 잔뜩 화가 나 있다뜨거운 해가 너무 무서워산 너머 어딘가 숨어 있는하얀 친구를 불러본다“뭉개야너 그 친구들 다 데불고 온나내 니캉 가머쪼매 덜 뜨거벌 거 같데이어떻노니 그래 해 줄 기제뭉개야”
서상조(시인·소설가) 그리고 사내는 자물쇠로 잠긴 작은 서랍을 열쇠로 열면서, 차안에 있던 두 사람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이야기 했다.“동백꽃이란다. 편하게 좀 주무시도록 해 드려야겠어.”그 순간 두 사내는 유 목사의 양팔을 하나씩 강하게 잡으며 몸통을 압박했다. 동시에 유 목사도 있는 힘을 다해서 몸부림을 쳤다. 나이에 비해 완력이 보통이 아닌 유 목사였지만, 사내들은 훈련받은 전문가들 이었다. 서랍을 열던 사내가 헬멧처럼 생긴 것을 꺼내더니 머리가 통째로 쑥 들어가도록 씌워 버렸다. 다시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하던...
진금선(동시인/스토리텔링/동화연구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훌라후프 속에살랑살랑 엄마의 엉덩이“빠져라 빠져라 살 빠져라”엄마의 주문은 늘어가지만빙글빙글 춤만 추는 미운 동그라미 통나무 허리에 굴리는 아빠의 훌라후프 윙윙윙윙 돌아가네프로펠러보다 더 빠르게“돌아라 돌아라 계속 돌아라”아빠의 주문도 늘어가지만자꾸만 내려가는 미운 동그라미 동글동글 돌아가는 미운 동그라미아빠는 하하하하암마는 호호호호나는 헤헤헤헤입 모양도 동그랗게 만들어 놓았네
서상조시인·소설가 지난호에 이어 인맥을 과시하듯 오히려 표정이 당당해 보이는 유 목사는 “제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냥 일기를 적듯이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선임자는 서류를 찬찬히 넘겨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일련번호에 따라 내용이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군. 골프채는 아예 별도로 정리가 되어 있구먼. 이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가 완전히 뒤집어지겠어. 이건 보험을 든 게 아니라 독약을 준비한 것과 같은 상황이군.”“자, 목사님을 안전하게 모시도록 해. 나는 좀 더 둘러보고 나갈게.”말이 ...
유윤희(시인) 결혼하면서 당신의 삶은 사라지고나를 낳으시고는 영혼마저 없어.이제 내 머리에 듬성듬성 흰서리 내리고목에 저승꽃이 늘어진 지금에서야광대한 우주 그 보다도 더 넉넉한당신의 사랑을 엿보고는이 아들 어머니에게는 사랑했다는 말 차마 할 수 없어라. 커다란 거울 아래긴 것, 동그란 것, 파랗고 빨간넘어지고 서 있고 이리저리조그만 용기들- 아내만의 소유물평생 봐도 제대로 정리된 적 없다.때로는 삭풍 사납게 몰아쳐고운 두 뺨에 눈물이 흐를 때도이제 그대 머리에도 흰 안개 서려도그칠 줄 모르는 당신의 님 향한 굳은 ...
서상조(시인·소설가) 지난호에 이어 두 개의 가방 중 하나를 열었다. 가방이 꽉 차도록 가득히 채워진 장부가 나름의순서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이 많은 장부의 90%는 나머지 10%를 보호하기 위한 가짜 장부야. 90%의 내용은 어마어마하고 그럴듯한 것들이지만 다만 소설일 뿐이지.” 긴장한 채로 우두커니 곁에 서 있는 양 기사를 바라보며 유 목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가방만큼은 목숨 걸고 지켜야 돼, 알았지?” 가방 앞에서의 유 목사는 승리의 깃발을 든 장수처럼 자신감에 꽉 찬 표정이...
시인 설화영 빗방울 방울방울꽃잎 사이로삼동을 이겨내고 봉오리 맺은 그 자리에눈부신 축복의 보석을매달아 준다꽃향기 흘려강물로 흐르고나는,꽃이 머금은 영롱한 옥수하도 예뻐눈에 넣고가슴에 담아싱싱한 꽃잎 입맞춤고목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