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5)
대가야읍 전경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다섯 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 김수옹(金守雍)지난호에 이어(김수옹)아버지가 와병중일 때 단지헌혈(斷指獻血)하는 등 소학의 가르침을 따라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봉양했다.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직 시 퇴계 이황으로부터 홍시(紅柿)를 대접받고 그 감씨를 얻어 와서 고향인 모산골에 심어 유명한 고령 수시(水柿:물감)를 보급시켰으며 후에 임금님의 진상품(進上品)이 되었다.명종 14년(1559년) 기미년 4월 10일 월기 재사(齋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7세였고,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건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이조참판 우암(寓巖) 선생 인규(仁奎)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이다. 지방 유림이 공의로 기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릴 것을 청하여 영조 12년(1787년) 청건되어 우곡면 사촌리에 소재한 영연서원(靈淵書院)에 기배향(旣配享)된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 외에 추향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후 직장공파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중종실록
◆ 김수문(金秀文)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장(成章)이고 호는 양촌(陽村)이다.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증직 받았던 수(銖)와정부인 강양이씨(江陽李氏) 사이에서 연산군 10년(1504년)에 태어났다. 재종숙 진사 임(銋)에게 출계하였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야인(野人:女眞人)들이 함경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납치해 가자 중종 30년(1535년)에 영건만호(永建萬戶)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명종 1년(1546년) 동래현령(東萊縣令)이 되어 그해 관리로서 근면, 절검하고 특히 치민(治民)에 힘써 가자(加資)되었다. 1549년에는 김해부사가 되어 구황(救荒)에 힘써 왕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고 함허정(涵虛亭)을 중건하니 남명 조식이 기문(記文)하였다. 명종 6년(1551년) 염근인(廉謹人)으로 녹선(錄選)되었다. 경원부사로 이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축성했는데 모해(謀害)로 파직되었다가 명종 10년(1555년)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남해안에 침입하여 대패하고 쫓겨 가던 1천여 명의 왜적이 제주를 기습하자 제주목사로서 정예병 70명을 뽑아 적진에 돌입시켜 용전을 벌이게 함으로서 많은 적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전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제주에 망경루(望京樓) 누각을 창건했다. 이듬해 6월 다시 왜적선 5척이 침입하자 이를 격침하고 적의 머리 130여 급을 벤 공으로 또 가자되었으며, 1558년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어 도순변사로 제수되어 경상(慶尙)·전라(全羅)의 군사를 장악하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창안하여 시행했다. 1565년 한성판윤에 특진되고, 같은 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여러 번 호인의 침입을 격퇴하여 북변방어에 공을 세웠다. 선조 1년(1568년) 7월 24일 향년 65세로 졸했다. 3대추작지은(三代追爵之恩)을 받았다. 묘소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신양촌 좌록(左麓) 축좌(丑坐)에 있다. 배위는 진(震)의 딸인 창녕성씨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 선조신록, 노성읍지, 고령김씨족보(갑술보)
◆ 김수징(金壽徵)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치홍(致洪)이다. 지간(之幹)과 창녕성씨 사이에서 인조 6년(1630년)에 태어났다. 무과에 올라 참산수문장을 거쳐 병절교위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장등(長嶝)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사재감(司宰監) 참봉을 지낸 기(奇)의 따님인 숙인 안악이씨(安岳李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 김승현(金承賢)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임진왜란 때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선조 임금을 피난길에 시위(侍衛)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삼등(宣武原從功臣三等)에 녹훈된 몽상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선조 37년(1604년) 태어났다. 통정대부 행 연일현감을 지냈다. 현종 15년(1674년)9월 9일 향년 71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양군 선산아래 유좌(酉坐)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참고문헌 :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김녕김씨 대동보(경오보)
◆ 김양묵(金養默)
본관은 일선이며 자는 선오(善五)이고 초자(初字)는 의열(義悅)이고 호는 적우당(赤憂堂)이다. 아버지 상엄(相儼)과 의찬(宜贊)의 딸인 성산여씨 사이에서 순조 24년(1824년) 태어났다. 고종 2년(1865년) 식녀(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正言)·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묘소는 합천군 율곡면 신기리촌(新基里村) 후산(後山) 중위(中位) 임좌에 있다. 초취는 유진(裕晋)의 딸인 숙인 연일정씨이고 재취는 숙인 문화류씨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6년), 고령군지(1996년), 국조방목(國朝榜目)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세보(기축보)
◆ 김임(金銋)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평경(平卿)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장생(莊生)과 훈련참군 승주의 따님인 정부인 가수노씨(嘉樹魯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성종 11년(1480년) 태어났다. 당숙 양생에게 출계되었다. 성균진사를 지냈고 아들 수문(秀文)이 전공(戰功)으로 가자(가자)되는 귀(貴)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명종 16년(1561년) 졸했다. 묘소는 논산시 노성면 화곡 신양산 임좌에 있다. 초취는 여보(汝輔)의 따님인 정부인 창녕성씨이고 재취는 사증(思曾)의 따님인 순천박씨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언제(金彦悌)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경원(敬源)이다. 중종 때 생원과 장사랑을 지낸 취명(就明)과 정랑의 딸인 전의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중종 35년(1540년)에 태어났다. 문종 1년(1450년) 무과에 급제한 후 제요감정과 원주목사를 지낸 수광(秀光)의 현손이다. 임란 때 의병도대장을 지낸 송암 김면의 부친인 김세문(金世文)이 공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연고로 명종 15년(1560년) 창원 산남 즉 현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산남리에서 고모의 시가인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로 이거해 김해김씨 순찰공파 고령입향조가 되었다. 조선 초·중기에 근간을 이루었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해 있던 종6품의 무산계의 관계명인 병절교위를 거쳐 각 도의 군비태세를 살피던 순찰사를 지냈다. 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송천(送泉)에 있다. 배위는 진사를 지낸 문균의 딸인 밀양박씨이다.※ 참고문헌 : 김해김씨 판서공파보, 송암 김면과 의병활동, 고령세거성씨편람, 성종실록, 국조문과방목
◆ 김용기(金用起)
본관은 의성이다. 고려 말 판사를 지낸 수덕(修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얹은활(張弓)을 잘 쏘았다. 왜구가 양광도에 침입했을 때 밀직사에 속한 벼슬아치인 동생을 따라 참전하여 영주(寧州:평안북도 안주)의 고상 아레에서 군사를 만나 백여 급을 참획하여 토벌했다.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형제가 함께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무절(무절)이다. 생몰년 미상이다. 묘소는 매락곡 상등 간좌이다.註) 참획(斬獲) : 목을 베거나 사로잡음※ 참고문헌 : 의성김씨 참의공파보(임신보), 고령세거성씨편랍
◆ 김위(金渭)
본관은 경주이다. 강진현감을 지낸 충서(忠瑞)와 통임랑 응복의 딸인 숙인 청주한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사과(司果)를 지냈다. 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실전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파보(정유보)
◆ 김응정(金應井)
본관은 경주이며 초휘는 응두(應斗)이고 자는 천경(天經)이며 호는 둔재(遯齋)이다. 참봉을 지낸 치옹(致雍)과 성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조 16년(1583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봉직랑(奉直郞)의 품계를 받고 조선시대 의식에 쓰이는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한 관청인 전설사(典設司)의 별좌를 지냈다. 임란 때 배종관(陪從官)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무사히 호종한 공로로 호성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덕형, 정곤수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청병하는데 공을 세웠다. 묘소는 합천군 야로면 석사촌후 건좌에 있다. 초취는 공인(恭人) 고양백씨이고 재취는 장사랑을 지낸 종의 딸인 안동권씨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후 직장공파보(무자보)
◆ 김익용(金翊龍)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군우(君遇)이다. 군자감 주부를 지낸 수(洙)와 열(烈)의 딸인 숙인 평산신씨 사이에서 선조 15년(1582년) 7월 6일 태어났다. 조선시대 오위에 두었던 정육품의 군직(軍職)인 사과(司果)를 지냈다. 선조 36년(1603년) 11월 2일 향년 22세로 조했다. 묘소는 고령현 서쪽 고곡면 부곡현암 동서좌에 쌍분이다. 배위는 선략장군을 지낸 옥(沃)의 딸인 의인(宜人) 고령김씨이다. 묘소는 고령현 서쪽 고곡면 부곡현암 동서좌에 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파보(정유보)
◆ 김자숙(金子肅)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효순(孝順)이다. 홍산군수를 지낸 사행(士行)과 참판 정의 딸인 숙부인 한양조씨 사이에서 세종 24년(1442년)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손으로서 고토(故土)의 선영을 수호하고 후세를 교회(敎誨 :잘 가르쳐서 잘못을 뉘우치게 함)하는 일에 전념하고 조정에서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자손들이 귀하게 되어 통정대부참의를 증직 받았다. 초취는 영상 영(嶺)의 딸인 숙부인 영양남씨이며, 재취는 비민(庇民)의 딸인 숙부인 의령전씨이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산 23의 7번지 칠동산 신좌에 삼위 함폄이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장생(金莊生)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가진(可珍)이다. 형조참의를 증직 받은 자숙(子肅)의 차남으로 세종 30년(1448년)에 태어났다. 연산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진잠현감, 하양현감, 강령현감을 거쳐 사헌부 감찰을 끝으로 나에게는 부와 귀는 부운(浮雲)과 같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쌍림면 안림리에 은거하면서 세상인연을 멀리하고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뜻을 구하는 ‘병적사세두문구지(屛跡謝世杜門求志)’의 생활을 일생토록 했다.중종 19년(1524년) 6월 6일 향년 칠십칠수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 선고묘하 유좌에 있다. 제주목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 재임 시 공을 세운 손자 수문(秀文)의 귀로 가선대부 병조판서 겸 지중추부사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훈련참군 승주의 딸인 정부인 가수노씨이다. 묘소는 합폄이고 증손 연(演)이 묘갈명을 찬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재철(金載喆)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희천(希天)이다. 아버지 총(寵)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서 영조 13년(1735년)에 태어났다. 순조 13년(181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몰년은 미상이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신기촌후(新基村後) 신좌(辛坐)에 있다. 배위는 영인(令人) 청도김씨이다.※ 참고문헌 : 김해김씨 판서공파보, 고령군지(1996년), 계유무과방목
◆ 김준(金準)
본관은 일선이며 자는 치준(致準)이고 호는 묵와(默窩)이다. 아버지 두진(斗振)과 필탁(必卓)의 딸인 성주도씨 사이에서 순조 25년(1825년)에 태어났다. 재종숙인 용진(鏞振)에게 출계하였다. 철종 3년(1852년)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전적(典籍)·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가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천성이순수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위풍 당당한 모습이었으나 철종 4년(1853년) 향년 29세로 졸하였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가곡(佳谷) 검등(黔嶝) 곡변곡(谷邊谷) 오좌(午坐)에 있으며 합폄이다. 배위는 원성(源誠)의 딸인 숙인 성산이씨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파보(정유보)
정리 최종동 기자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