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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인 명의(名醫),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

기사입력 2021.05.2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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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준 존영.jpg

    허준 존영

     

     

    허 준(1537~1615)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집필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名醫)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허준은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아버지는 함경도 종성부사(鐘成府使) 론(碖)이다.
    선생은 서자로 태어나서 의원이 되는 길을 택하였다. 선조2년(1569) 류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뒤에 내의원 정(正)에 올랐다. 선생은 내의로서 선조는 물론 왕족을 치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이 해에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을 치료한 공으로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반(東班) 현직(顯職)에 제수되었으며, 선조 33년(1600) 양예수(楊禮壽)의 뒤를 이어 수의(首醫)가 되었다. 선조 34년(1601) 어의(御醫)로서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동 37년(1604)에는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제수 받았으나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의 끈질긴 반대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그치고 말았다.
    선조 41년(1608) 임금이 승하하자 수의로서의 책임 때문에 관직이 몰수되고 성 밖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의로 복직되었다.

     

    ▣ 최초 편찬한 찬도방론맥결집성은 한의학의 진맥서로 평가

     

    선생은 의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지식이 담긴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여러 의서를 편찬함으로서 한국의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함은 물론 우리나라 의학의 학문적 업적과 문화적 능력을 세계에 과시하였다.
    선생이 최초로 편찬한 책은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脉訣集成)으로 이 책은 당대 저명한 의원들의 학설과 각종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한 진맥서이다.
    다음에는 선조 29년(1596) 왕명으로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太醫) 양예수 등과 함께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뒤 단독으로 편찬을 계속하여 14년 만인 광해군 2년(1610)에 25권 25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조선과 중국의 많은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한 백과사전적 실용 의서로서 대중의 질병 치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의 실용성과 의서로서의 진가(眞價)가 널리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어 동양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지금도 질병 치료와 의학 연구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 한의학의 큰 업적 이룩하다

     

    작업을 시작한지 햇수로 14년 만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총 25권으로 그 내용은 내경편(內景編, 내과), 외형편(外形篇, 외과), 잡병편(雜病篇, 유행병·급성병·부인병·소아병), 탕액편(湯液篇, 약제·약물), 침구편(鍼灸篇, 침과 뜸 등)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약서를 총망라해서 엮은 것이며 단순한 치료만이 아닌 병의 근본 원인을 살피고 정신수양과 섭생(적당한 운동과 음식물로 건강을 유지하도록 꾀함)에도 중점을 두고 처방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의 체질이나 풍토에 맞지 않는 이론에, 약재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중국 중심의 의학이론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 창의성이 돋보인다. 또 철저한 임상을 통해 그 치료나 복용의 기준을 세웠다는 점이 드러났다.

     

    3. 허준묘소, 파주시 민통선 안쪽.jpg
    허준 묘소(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
     

    ▣ ‘동의보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인류의 건강을 위한 주요 유산인 동의보감은 미래의 의학 자산으로 인정되어, 2009년 7월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그 가치를 전 세계에 알렸다. 또 선조 34년(1601) 왕명으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세 가지 의서를 편찬하여 한글로 간행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후 창궐한 전염병을 치료하고 인구의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편찬된 책들이다.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은 광해군 4년(1612) 악성 전염병의 치료를 위해 편찬한 것이고, 벽역신방(辟疫神方)은 광해군 5년(1613) 전국에 큰 인명 피해를 준 당독역(唐毒疫)의 치료서로 편찬된 탁월한 과학적 의서이다.
    납약증치방(臘藥證治方)은 어의로서 연말에 궁중의 상비약을 준비하기 위해 편찬한 것인데, 영조 때 내의원에서 한글로 간행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선생이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여 그 업적을 기렸다.
    선생은 이러한 공적으로 오늘날 의성(醫聖)으로 추앙 받고 있다. 묘소는 한국전쟁으로 찾지 못하고 있다가 1991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민통선 안쪽)에 소재한 것을 발견한 후 1995년 묘소 주변을 성역화 하였다.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은 안동 김씨이며, 아들은 파주 목사(坡州牧使) 파릉군(巴陵君) 겸(謙)이다.(사단법인 의성허준기념사업회 비문에서 발췌)
     
    ▣ 동의보감 등 8종 의학서적 집필, 의성(醫聖)으로 추앙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데 작용했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은 의학의 길을 택하여 이미 20대에 뛰어난 의술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30세에 어의(御醫)로 선임되었고, 동양 최대의 의서(醫書)라는〈동의보감(東醫寶鑑)〉을 1610년(광해군2)에 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봤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훗날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정1품까지 승급했다.
     
    ▣ 허준은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가 첫 번째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년)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41)까지가 두 번째 삶의 시기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 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1608년(선조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7)까지가 세 번째 삶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해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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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건비
     

    ▣ 중국과 일본에서도 ‘동의보감’ 편찬, 한국에서 드라마로 재조명 되다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 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만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 진외가와 연줄이 닿아 유의태가 사는 산청으로 간 것 아닌가 추정
    허준 선생이 태어난 곳은 김포군 양촌면 공암리 능곡동(오늘날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가 고향에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나이가 들어 경상도 산청에서 의술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할머니 친정이 진주였고, 또 유씨 성을 가졌는데, 산청에는 당시 유명한 의원 유의태가 살고 있어서 진외가와 연줄이 닿아 산청으로 유의태를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신분이 낮은 허준으로서는 일찌감치 중인들이 흔히 직업으로 갖는 서사(書寫, 글씨를 베낌)나 의원, 기술직을 택해 출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승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서자에게 극심한 차별의 굴레를 씌웠다. 그가 서자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무관벼슬을 했을 것이다.
     
    (참고문헌-다음백과,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주니어 김영사 등에서 인용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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