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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기사입력 2021.01.0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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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
    ① 『선원계보(璿源系譜)』·『태조실록(太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의하면,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 : 뒤에《목조(穆祖)》로 추존)-행리(行里 : 뒤에《익조(翼祖)》로 추존)-춘(椿 : 뒤에《도조(度祖)》로 추존)-자춘(子春 : 뒤에《환조(桓祖)》로 추존)-성계(成桂)로 이어졌다. 이한(李翰)의 선대(先代)가 언제부터 전주(全州)에 세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한(李翰) 이후 전주(全州)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②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는 원래 전주(全州)사람이었는데 그곳 지방관(地方官)과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그 지방관이 다시 삼척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로 가서 원나라의 지방관인 다루카치(達魯花赤)를 지내고 증조부인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조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은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追贈)받았으며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은 고려조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다.
    ③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각 본관(本貫)의 시조(始祖) 또는 파조(派祖)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始祖)로 한다는 사실이다.


    ④ 시조(始祖)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純宗皇帝)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 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⑤ 옛날 전주(全州)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完山)은 원래 전주(全州)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全州府)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2) 전주이씨(全州李氏) 분파(分派)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 번창했다.


    (3) 전주이씨(全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전주이씨(全州李氏)는 413가구 1,1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의 후손은 개진면 신안리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은 쌍림면 귀원리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은 우곡면 연동, 덕곡면 백리, 운천군(雲川君) 이인(李寅)의 후손은 쌍림면 평지리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은 개진면 생리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양(李穰)의 후손은 쌍림면 송림리에, 담양군(潭陽君) 이거(李) 후손은 대가야읍 내곡리 등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①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초명은 이호(李祜)이고 자는 선숙(善叔)이며 호는 연강(蓮江)이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제(霽)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조 5년(1396년) 태어났다. 태종 7년(1407년) 효령군(孝寧君)에 봉해지고, 태종 12년(1412년) 효령대군(孝寧大君)으로 진봉(進封 : 봉작(封爵)을 더 높여 주던 일)되었다.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태종(太宗) 을 따라 항상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형인 양녕(讓寧)이 세자에서 폐위(廢位)되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忠寧)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하여『법화경(法華經)』,『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언해(諺解)하고 관악사(冠岳寺)를 삼창(三創)하고 무위사(無爲寺), 백련사(白蓮寺)를 중창(重創)하였으며 수륙재(水陸齋)를 개최하는 등 호국불사(護國佛事)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향헌(鄕憲)56조’를 제정하여 대민강론(對民講論)으로 백성들의 윤리도덕(倫理道德)과 의식교화(意識敎化)에 헌신하였다. 또, 효(孝)에 대한 이론(理論) 정립(定立)과 권계(勸戒 : 타일러 훈계함)할 목적으로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를 사경(寫經 : 정성껏 불경을 베끼는 일)하였다. 성종 17년(1486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정효(靖孝)이다. 고종 2년(1865년)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의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註釋1) 향헌(鄕憲)56조
    선목(善目) 21조와 악목(惡目) 35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목(善目)은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 할 선행(善行)이며 악목(惡目)은 백성으로서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되는 악행(惡行)이다.

    (註釋2)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가를 내용으로 하는 경)과 장수태골경(長壽胎骨經 :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진리를 말씀하여 무병장수를 얻게 하는 내용의 경)을 합부(合部 : 구분을 합침)하여 천안시 광덕사(廣德寺)에 사경(寫經)하였다.

     

    ② 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
    자는 자홍(子弘)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와  좌찬성(左贊成) 역(易)의 따님인 해주정씨(海州鄭氏)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종 11년(1411년) 태어났다. 세종 6년(1424년) 의성군(誼城君)에 봉해졌다. 왕족(王族)이면서도 담백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학문을 좋아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여 세종이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겨 내장(內藏)의 서책(書冊)을 내려주었다. 세종 13년(1431년)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세종 16년(1434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세종 25년(1443년) 경주(慶州)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수용(睟容)이 봉안될 집경전(集慶殿)이 완성되자 수용(晬容) 봉안사(奉安使)가 되었으며, 세종 26년(1444년) 봉군제도(封君制度) 개정에 따라 소덕대부(昭德大夫)에 개수(改修)되고, 1450년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대전관(代奠官)을 맡은 다음 흥록대부(興祿大夫)에 특가(特加)되었다. 성종 20년(1489년)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올랐다. 성종24년(1493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호민(胡敏)이다.

     

    (註釋1) 가자(加資)
    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品階)를 이르는 말.

    (註釋2) 수용(睟容)
    임금의 화상(畫像). 어진(御眞)을 말한다.

    (註釋3) 대전관(代奠官)
    제전(祭奠)에서 임금을 대신하여 신위(神位)에 제주(祭酒)를 드리는 제관(祭官).

    (註釋4) 특가(特加)
    특별히 등급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③ 이속(李涑)
    자는 백연(伯淵)이고 명선대부(明善大夫) 삼계부정(森溪副正) 정손(貞孫)과 주부(主簿) 신손(信孫)의 따님인 신인(愼人)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성종 5년(1474년) 태어났다. 재종숙(再從叔)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에게 수업(受業)하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페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문제(復位問題)에 얽혀서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피하여 동생 탁(涿)과 함께 남하(南下)하여 인동(仁洞) 약목리(若木里)에 복거(卜居)하다가 만년(晩年)에 성주 남면 청파방(靑坡坊) 신당촌(新塘村) 현재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 은거(隱居)하면서 덕성(德性)을 함양(涵養)하였다. 음서(蔭敍)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제용감(濟用監) 주부(主簿)·의영고영(義盈庫令)·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함흥부(咸興府) 판관(判官)·함흥진관병마절제도위(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歷任)하였다. 명종 4년(1549년) 졸(卒)하였다.


    ④ 이희운(李希雲)
    자는 공망(公望)이고 함흥부(咸興府) 판관(判官) 속(涑)의 장남으로 연산군 9년(1503년) 태어났다. 충의위(忠義衛) 진위장군(振威將軍)·건공장군(建功將軍)을 거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명종 22년(1567년) 졸(卒)하였다.


    ⑤ 이승(李承)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청휘당(晴暉堂)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사운(思雲)의 아들로 명종 7년(1552년) 인동현(仁同縣) 약복리(若木里)에서 태어나 백부(伯父) 희운(希雲)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두 분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다. 37세인 1588년에 선공감(繕工監) 가감(假監)에 천거(薦擧)되어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38세인 선조 22년(1589년) 5월 정한강(鄭寒岡), 이옥산(李玉山), 김송암(金松菴), 이낙빈(李洛濱), 박대암(朴大庵), 이육일헌(李六一軒) 등 낙강칠현(洛江七賢)이 모여서 범주포산지금산하(泛舟苞山之金山下)에서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7자를 분운제영(分韻題詠)하였는데 경(頃)을 ‘운(韻)’으로 하여 시를 지었다. 41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에 김면(金沔)과 더불어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성주기군장(星州起軍將)을 맡아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 김산(金山), 지례(知禮)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해 성주목사(星州牧使)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討伐)하였다. 선조 31년(1598년) 졸(卒)하였다.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에 증직(贈職)되었고,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인조 7년(1629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증직되었다.『청휘당실기(晴暉堂實紀)』 1책이 전한다.


    ⑥ 이육(李堉)
    자는 사후(士厚)이며 호는 심원당(心遠堂)이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된 지낸 청휘당(晴暉堂) 승(承)과 승지(承旨)를 지낸 경명(景明)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선조 5년(1572년) 태어났다. 동생 이숙(李)·이학(李)·이경(李坰) 등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 양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다. 학문과 행의(行誼)로 당세(當世)의 중망(重望)을 입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매번 덕천(德川)에서의 일에 직접 가지 못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공을 보내어서 다녀오게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집 교정에 대한 일을 논의함에 있어 매우 명확하였다. 인조 15년(1637년) 졸(卒)하였다. 신계서원(新溪書院)에 추배(追配 : 추가하여 위패를 모심)되었다.


    ⑦ 이숙(李)
    자는 사후(士厚)이며 호는 산거재(山居齋)이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된 지낸 청휘당(晴暉堂) 승(承)과 승지(承旨)를 지낸 경명(景明)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돌째 아들로 선조 13년(1580년) 태어났다.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 양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다. 학행(學行)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인조 7년(1629년) 졸(卒)하였다. 신계서원(新溪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


    ⑧ 이학(李)
    자는 사응(士凝)이며 호는 인암(認庵)이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된 지낸 청휘당(晴暉堂) 승(承)과 승지(承旨)를 지낸 경명(景明)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선조 18년(1585년) 태어났다.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 양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다. 공은 학행(學行)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아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가 임금께 천거(薦擧)하여 왕명(王命)을 띤 벼슬아치가 역마(驛馬)를 잡아타고 교지(敎旨)를 전달하였으나 병(病)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19년(1641년) 졸(卒)하였다. 신계서원(新溪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


    ⑨ 이경(李坰)
    자는 사야(士野)이며 호는 순백당(旬白堂)이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된 지낸 청휘당(晴暉堂) 승(承)과 승지(承旨)를 지낸 경명(景明)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네째 아들로 선조 21년(1588년) 태어났다.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세 분의 형과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 양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다. 공은 학행(學行)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아 “네 선비(四士)”라고 일컬었다. 인조 16년(1638년) 졸(卒)하였다. 신계서원(新溪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세손 숙()의 묘소가 고령군 덕곡면 서월촌(鋤月村)에 있고 아들 익전(益銓)의 묘소가 고령군 쌍림면 쌍림면 평지리에, 손자들의 묘소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등에 있어 1600년대 초반 고령에 입향(入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숙()의 장증손(長曾孫) 석륜(石綸)이후 후손들의 묘소가 백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공이 1600년대 중반 고령군 덕곡면 백리에 입향(入鄕)하여 정착(定着)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익전(李益銓)
    자는 자평(子平)이며 호는 치치당(耻耻堂)이다. 부사과(副司果) 숙()과 어모장군(禦侮將軍) 응성(應星)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선조 39년(1606년) 태어났다. 효행(孝行)이 있어 죽으로 연명(延命)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예학(禮學)을 숭상하여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예의문답(禮疑問答) 7권을 찬술(纂述 : 저술하다)하여 자기 집에 보관하였다. 현종 15년(1674년) 졸(卒)하였다.


    ② 이석경(李石經)
    자는 대징(大徵)이고 호는 초은재(草隱齋)이다. 충의위(忠義衛) 하()의 장남으로 현종 3년(1662년) 태어났다. 국량(局量 : 도량과 재간)이 넓고 깊으며 재주와 행실이 높아 숙종 22년(1696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영조 8년(1732년) 졸(卒)하였다.


    ② 이석기(李石紀)
    자는 미징(美徵)이고 호는 삼암(三岩)이다. 충의위(忠義衛) 하()의 차남으로 현종 8년(1667년) 태어났다. 학문이 일찍 드러나고 재주와 행실이 높았다. 숙종 28년(1702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경종 4년(1724년) 졸(卒)하였다.


    ③ 이명로(李命老)
    자는 천수(天叟)이고 호는 정온재(靜蘊齋)이다. 충의위(忠義衛) 징(澂)과 상인(尙仁)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현종 8년(1667년)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강하고 문장이 아담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였다. 영조 15년(1739년) 졸(卒)하였다.

     

    자료제공 : 후손 이준재(李俊宰)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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