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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섭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부농의 꿈 이뤄

기사입력 2018.09.0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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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한 씻으려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는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쌍림면 매촌리 토박이인 김태섭(金泰燮, 73, 일선인)씨의 인터뷰 첫머리의 일성(一聲)이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얘기가 함축되어 있는 듯 했다.


    김씨는 어린 시절 가난의 한을 풀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때로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구두쇠 소리도 감수하면서 일과 가족 외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김씨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합천 쌍책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머니가 엄마인줄 알았다. 형들의 학교 때문이기도 했고, 여럿형제 중 입하나 줄이는 뜻이라는 것을 성장 후에야 어렴풋이 알았다.


    일찌감치 부산에서 간장제조 가내공업을 하시는 삼촌 밑에서 일을 도왔고, 전권을 가지고 경영했다. 돈이 모이는 대로 그저 고향에 땅 사는데 투자했다.


    부산에서 결혼도 했고, 첫 아이가 태어나고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공장으로 돌아갔지만 대기업에 밀려 간장공장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2~3년 후 고향 매촌리로 돌아왔다. 그간 마련해 둔 2천여 평의 땅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해야 하는 마늘농사를, 비교적 재배가 쉬운 오이 농사로 전환했다. 재산이 점차 느는 것에 재미가 붙어 억척으로 일만 했다.


    이제는 딸기재배로 전환했다. 대형하우스 16개 동에서 딸기를 생산했다. 억척스럽게 일한 탓인지 4년 전 심장에 이상이 왔다. 심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서울신문 독일 뮌헨특파원으로 있던 며느리가 심장을 구해 급거 귀국, 국내 최고 권위자인 의사 선생님을 주선해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시아버지를 살렸다.


    4년이 지났지만 현재 건강에 이상은 없다. 효부 며느리의 권유로 농사를 조금 줄여 현재 딸기 대형하우스 10동을 짓고 있다. 그사이 땅이 8천5백여 평으로 늘었고, 도시에 있는 부동산 등을 합치면 재산이 많이 불어났다.


    이제는 어려운 이웃도 챙기고 베풀면서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면서 조금씩 실천으로 옮기고 있어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종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김태섭씨는 문강공(文康公)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4남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형으로 진사시에 입격한 후 청송교수(靑松敎授)와 찰방(察訪)을 지낸 과당공(瓜堂公) 김종유(金宗裕)의 자손으로 일선김씨(一善) 명문가의 후손이다.


    김태섭씨의 형제 우애는 남다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형의 대학 뒷바라지를 했고, 지금은 막내 남동생과 이웃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김씨의 부인 이상임(70, 성주인)씨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외아들은 현재 영주에서 교직에 있고, 며느리는 매일신문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는 언론기자다. 두 딸도 결혼해 대구에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있다고 귀띔한다.

    최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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