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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박씨(順天朴氏) 판윤공파(判尹公派)

기사입력 2019.08.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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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덕와(운수면 유리 139번지)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순천박씨(順天朴氏) 판윤공파(判尹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


    박영규(朴英規)는 승주(昇州 : 순천의 옛지명)사람으로 견훤(甄萱)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견훤(甄萱)의 장군(將軍)이 되었다. 신검(神劒)이 반역(反逆)을 일으키자 견훤(甄萱)이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투항(投降)하였다. 태조 19년(936년) 2월에 박영규(朴英規)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귀순(歸順) 의사를 밝히고 태조 19년(936년) 9월 태조(太祖)가 신검(神劒)을 토벌할 때 내부에서 은밀하게 내통(內通)하여 백제를 멸망시키자 박영규(朴英規)를 좌승(佐丞)에 임명하고, 밭 1,000경(頃)을 하사하였으며 역마(驛馬) 35필(匹)로 집안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으며 박영규(朴英規)는 뒤에 관직이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졸(卒)하여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고 한다. 박영규(朴英規)는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딸은 태조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고 나머지 두 딸은 정종(定宗)과 사돈을 맺어 정종의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


    (2) 순천박씨(順天朴氏) 중시조(中始祖) 박숙정(朴淑貞)


    ①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 이후의 계대(系代)가 분명하지 않고 고려 정승(政丞)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군(封君)되었던 후손 박난봉(朴蘭鳳)과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박숙정(朴淑貞) 대(代)에 이르기까지 세수실전(世數失傳)으로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② 고려사(高麗社) 우산절(禹山節) 열전(列傳)에 의하면 “박숙정(朴淑貞)은 충숙왕 때 김목경(金牧卿)이 밀성부사(密城副使)가 되었을 때 찰방별감(察訪別監)으로 재직시 김목경(金牧卿)의 탐욕스러움과 포악함을 탄핵하여 그를 파면시켰다”라고 기록되어 공의 성품이 강직(剛直)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그후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의 벼슬에 올랐으며 근재(謹齋) 안축(安軸)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공은 풍류(風流)가 있어 충숙왕 13년(1326년)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가 되어 관동지방(關東地方)의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에 누대(樓臺)를 지었는데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즉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사선정(四仙亭), 울진의 취운루(翠雲樓) 등을 모두 창건(創建)하였다.


    (3) 판윤공파(判尹公派)의 분파(分派)


    ① 가선대부(嘉善大夫) 개성판윤(開城判尹)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박가권(朴可權)의 장남 유성(柳星)은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내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로, 차남 두성(斗星)은 진사(進士)에 올라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② 그후 목사공(牧使公) 유성(柳星)은 인손(仁孫), 예손(禮孫), 신손(信孫) 삼형제를 두어 장남 인손(仁孫)은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차남이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장인 예손(禮孫)은 사맹공파(司猛公派), 삼남 신손(信孫)은 주부공파(主簿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4) 순천박씨(順天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순천박씨는 87가구, 2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문목공(文穆公) 박가실(朴可實)의 후손 중 정목공파(靖穆公派)는 우곡면 사촌리에 세거하고 있고 판윤공(判尹公) 박가권(朴可權)의 후손 중 진사공파(進士公派)는 쌍림면 용2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원룡(朴元龍)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숙정(淑貞)과 대언(代言) 시(蒔)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여 근재(謹齋) 안축(安軸)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종유(從遊 : 학덕이 있는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으며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조정(朝廷)이 부패하고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지자 만년(晩年)에는 영동 천마산에 들어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북 영동군 양강면 청남리에 영사재(永思齋)를 세우고 향사(享祀)한다.


    ② 박천상(朴天祥)
    이부시랑(吏部侍郞) 원룡(元龍)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 무과에 등제하여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는데 이숭인(李崇仁), 하륜(河崙) 등과 함께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판별하였는데 무고(誣告)에 연좌(緣坐)되어 유배(流配)되었다가 밀직(密直)과 제조(提調)에 올랐으며 조선 창업 후에는 화령윤(和寧尹)을 지냈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③ 박가권(朴可權)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천상(天祥)과 검교시중(檢校侍中) 경원공(敬元公) 포(褒)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재덕(才德)을 겸비(兼備)하였다. 공평하고 청렴개결(淸廉介潔 : 청렴하고 성품이 깨끗하고 굳음)하여 화려한 관직들 두루 역임하고 개성판윤(開城判尹)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로 칭송을 받았다. 고려의 운명이 다할 때 절의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와 태조 2년(1393년) 성주 가야산(伽倻山)자락인 죽백리(竹栢里)에 복거(卜居)하고 그의 수양(修養)이 윤리(倫理)를 지키고 있음을 나타내었다고 하여 방명(坊名 : 동네 이름)을 수륜동(修倫洞)이라 칭한 것에 유래되어 오늘날 수륜면(修倫面) 수륜리(修倫里 : 倫洞)가 되었다고 한다. 태종 이방원이 정경(正卿)으로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세종 8년(1426년) 임종(臨終)할 때 그의 아들에게 비갈(碑碣)을 쓸 때 “조선의 벼슬인 정경(正卿)을 쓰지 말고 고려의 관직인 개성판윤(開城判尹)을 쓸 것”을 당부하였고 또 자제들에게 “나는 나의 왕을 위한 것이오(我爲我王) 너는 너의 왕을 위하라(爾爲爾王)”라는 유훈(遺訓)을 하여 자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고 자손들에게는 조선 왕조에 나아가 벼슬할 것을 권면(勸勉)하였다. 가야산에 소재한 판윤공(判尹公)의 유적지(遺蹟地)는 은둔지소(隱遯之所)인 지동암(志同巖), 짚신 신고 지팡이 집고 지동암(志同巖)을 오르내리실 때 이곳에서 쉬어가며 망국지탄(亡國之歎)의 분(憤)을 삭이던 장구지소(杖屨之所), 불이문(不二門) 등이 남아 있다. 공을 향사(享祀)하였던 덕봉서원(德鳳書院)은 훼철(毁撤)되어 현재 ‘성인당(成仁堂)’ 이라 하여 재사(齋舍)로 사용되고 있으며 묘우(廟宇)인 죽백사(竹栢祠)가 남아 있다.


    (2) 조선시대


    ① 박유성(朴柳星)
    개성판윤(開城判尹) 가권(可權)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언수(彦修)의 따님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종 9년(1409년) 태어났다. 세종 23년(1441년) 김종서(金宗瑞) 등이 장수(將帥)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게 되니 부정(副正)인 공이 천거(薦擧)되어 호군(護軍)으로 변방에 근무하였고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재직 중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덕망(德望)을 칭송하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청백리(淸白吏)로 인정하여 단서(丹書 : 조서)를 내리고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제수하였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것이 예(禮)에 지나쳤을 때 국가에서는 서쪽 변방에 외적의 침입이 있어 다시 특명을 내려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갈 것을 명하여 길을 떠나다가 중도에 병이 들어 48세로 졸(卒)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고 특별히 후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개성판윤(開城判尹) 박가권(朴可權)의 차남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두성(斗星)이 세종 18년(1436년)경 성주에서 고령군 쌍림면 미숭산(美崇山) 기슭 용2리에 입향하여 후손들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약 58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2) 개성판윤(開城判尹) 박가권(朴可權)의 내손(來孫 : 5대손) 복재(復齋) 박양좌(朴良佐)가 합천(陜川) 남교촌(藍橋村 :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옛 숭산 마을)에서 선조 16년(1583년) 고령 용담리(龍潭里 :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로 이거하였다가 광해군 11년(1619년) 고령 위곡(蝟谷) 성사동(聖賜洞 : 운수면 유리)으로 옮겨 살았다. 그후 숙종 44년(1718년) 전가족이 괴질(怪疾)에 전염되어 4살된 아들과 모부인(母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를 제외하고 모두 작고(作故)하자 모부인(母夫人)의 친정인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丹溪里)로 전거(轉居)하여 용담공파(龍潭公派)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3)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사위가 된 주부공파(主簿公派) 박산립(朴山立)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전에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 사위가 장가들어 아내 집에 머물러 사는 것)의 습속(習俗)에 따라 성주에서 고령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박두성(朴斗星)
    개성판윤(開城判尹) 가권(可權)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언수(彦修)의 따님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종 9년(1409년) 태어났다. 재기(才器)가 숙성(夙成)하여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경상도 감사 박규(朴葵)가 해청(海靑 : 매) 1연(連 : 쌍)을 바치니, 성주(星州) 사람 박두성(朴斗星)이 잡은 것이다. 관찰사와 성주 목사에게 의복을 각각 한 벌씩 내리고, 두성에게 의복·갓과 면포(綿布) 15필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뜻과 기개(氣槪)가 호탕(豪宕)하여 구차(苟且)하게 속유(俗儒)가 되지 않고 매사냥을 즐겨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② 박이현(朴而絢)
    자는 여수(汝粹)이며 호는 창애(蒼涯)이다.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지낸 대영(大榮)과 공인(恭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39년(1544년)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포의(布衣)로서 족제(族弟) 용담(龍潭) 이장(而章)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진중(陣中)에서 찬획(贊劃)과 방수지책(防守之策)을 마련하였으며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 보루(堡壘)를 마련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대교평(大橋坪) 전투에서 순사(殉死)하였다. 인조 2년(162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영조 18년(1742년) 의민(毅愍)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덕봉서원(德峯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③ 박이장(朴而章)
    자는 숙빈(叔彬)이며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이다. 승지(承旨) 복재(復齋) 양좌(良佐)와 별좌(別坐) 은(垠)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사이에서 명종 2년(1547년) 태어났다. 23세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 되었고 27세 때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사승(師承)관계를 맺고 기철학(氣哲學)을 수용하였다. 선조 19년(1586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1591년)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량의 보급과 유랑민(流浪民) 구휼(救恤)에 최선을 다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10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쳤다. 선조 34년(1601년)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과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고 호군(護軍)·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냈다. 선조 41년(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논계(論啓 :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따져 아룀)하였다. 광해군 1년(1609년)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1617년 고령 용담리(龍潭里)로 돌아가 향약(鄕約)과 동규(洞規)를 지었고 그후 고령군 운수면 연봉촌(延鳳村)으로 옮겨 살면서 강학지소(講學之所)인 모덕와(慕德窩)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광해군 14년(1622년) 향년 76세로 초계(草溪)에서 졸(卒)하였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④ 박산립(朴山立)
    증(贈) 공조참의(工曹參議) 자의(子儀)와 증(贈) 숙부인(淑夫人) 신천강씨(信川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부(妻父)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창의(倡義)하자 동심기의(同心起義)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졸(卒)하였다.


    ⑤ 박홍원(朴弘遠)
    자는 모숙(模叔)이다. 유생(儒生) 응규(應圭)와 잠(涔)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선조 5년(1572년) 태어났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효도와 우애로 미루어 나갔다.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지냈다. 몰년(沒年)은 미상(未詳)이다.


    ⑥ 박공구(朴衢)
    자는 자룡(子龍)이며 호는 기옹(畸翁)이다.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용담(龍潭) 이장(而章)과 참판(參判) 응복(應福)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충주박씨(忠州朴氏) 사이에서 선조 20년(1587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광해군 4년(1612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되고 학행(學行)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받은 후 관찰사(觀察使)가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스승으로 천거(薦擧)하므로 사부(師傅)로 임명되어 수년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다수의 충분시(忠憤詩)를 남기었으므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稱)하였다. 효종 9년(1658년) 3월 18일 유시(酉時)에 작고(作故)하시니 효종이 친히 5척(五尺)의 비석(碑石)에 ‘조산대부(朝散大夫) 대군사부(大君師傅) 박공지묘비명(朴公之墓碑銘)’ 이라는 비석문(碑石文)을 써서 주었으니 이것이 고령지역의 최초 어필(御筆) 비문(碑文)이었다.


    ⑦ 박일원(朴一元)
    자는 천극(天極)이다. 유생(儒生) 홍량(弘量)과 고령김씨(高靈金氏) 사이에서 선조 30년(1597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인조 23년(1645년) 4월 10일 향년 49세로 졸(卒)하였다.


    (2) 근·현대인물


    ① 박응규(朴應圭 1933년) : 고령, 예천군수, 경북도 농정국장, 안동시장
    ② 박노숙(朴魯淑 1935년) : 담수회 부회장
    ③ 박영길(朴永吉 1940년) :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④ 박근규(朴根圭 1942년) : 명동의류회장, 신라FnC 회장
    ⑤ 박기진(朴基瑨 1945년) : 성주 부군수, 경북도의회 제8,9대 의원
    ⑥ 박장규(朴章圭 1948년) : 육군 22사단장,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차관급)
    ⑦ 박헌규(朴軒圭 1948년) : 성주 부군수
    ⑧ 박길규(朴吉圭 1948년) : 오륜농산 대표
    ⑨ 박종원(朴鍾遠 1953년) : 새마을금고연합회 대구시지부 지부장
    ⑩ 박현수(朴鉉秀 1954년) : 성주군 수륜농협 조합장 3선
    ⑪ 박화진(朴華瑨 1960년) : 수원지검 안산지청 수사과장
    ⑫ 박  수(朴  洙 1967년) : 육군 준장
    ⑬ 박종형(朴鍾亨 1968년) : 육군 준장 

    자료제공 : 후손 박종호(鍾浩), 박종진(鍾鎭),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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