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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시씨(浙江施氏) 염수재(念修齋)

기사입력 2019.07.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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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재(운수면대평리 805번지)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염수재(念修齋) 유래(由來)

    이 건물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805(흑수길 61-6)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문용(施文用)을 추모(追慕)하기 위한 재실(齋室)이다. 공(公)은 명나라 예부상서(禮部尙書) 시윤제(施允濟)의 아들로 병부좌랑(兵部佐郞)을 지내다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의 명(命)을 받아 절강병(浙江兵) 1,000명을 이끌고 충주, 청주, 보은, 상주, 사천, 가야산 등 각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명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머물면서 귀화(歸化)하였다. 전공(戰功)으로 선조 35년(160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되었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염수재(念修齋)는 헌종 5년(1839년) 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재사(齋舍)이며 1985년 중건(重建)하였고 2001년 기와를 전면 교체하였다.

    2. 건축형태


    염수재(念修齋)는 전면 5칸 측면 1칸 반의 20평 맞배 골기와 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중앙에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재실(齋室) 좌측 윗면에는 전면 1칸 측면 1칸의 별묘(別廟)가 지어져 시문용(施文用)의 불천위(不遷位)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나라에 큰 공훈(功勳)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부조위(不祧位) 라고도 하며 특별히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 또는 ‘별묘(別廟)’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추숭(追崇) 인물(人物)


    시문용(施文用)의 본관은 절강(浙江)이며 자는 종록(宗祿)이고 호는 명촌(明村)이다.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시윤제(施允濟)의 아들로 선조 5년(1572년) 태어났다. 병부시랑(兵部侍郞) 시윤제(施允濟)는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 정곤수(鄭昆壽)가 왕명을 받아 1592년 9월 18일 북경 옥하관(玉河館) 이란 숙소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관사(館舍)에 함께 머물면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권(軍權)을 쥔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도와,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萬曆帝 : 신종)를 설득시킨 인물이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을 맡은 마귀(麻貴)가 6월 명나라 군사 5만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파병되자 황제의 호위와 궁성의 수호를 맡았던 금의위(錦衣衛)에 발탁되었던 시문용(施文用)은 절강병(浙江兵) 1천명을 이끌고 조선에 진군(進軍)하여 1597년 9월 마귀(麻貴)와 함께 참전(參戰)하여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을 직산(稷山)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대파하였으며 직산(稷山) 전투에서 패배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북상(北上)이 좌절됨에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여 울산 서생포(西生浦) 왜성(倭城)으로 후퇴하여 지성(支城)인 도산성(島山城)에서 주둔하면서 두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공(公)은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종군(從軍)하였고 그후 충주, 청주, 보은, 상주, 사천, 가야산 등 각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울산읍지(蔚山邑誌)』[1935년]에 의하면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鎭下里)에는 마귀(麻貴) 제독(提督)이 주둔하였다는 도독동(都督洞)이 있고, 여기에는 대명(大明) 만력(萬曆) 26년(1598년) 중춘(仲春 : 음력 2월) 상순(上旬)에 그의 전공(戰功)을 새긴 마애기(磨崖記)인 ‘동정기(東征記)’를 천조정왜(天朝征倭) 제독중군(提督中軍) 편갈송(片碣頌)이 글을 짓고 제독중군(提督中軍) 시문용(施文用)이 글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 풍우(風雨)로 마멸(磨滅)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후에 명나라 군사들이 철수(撤收)할 때 그는 신병(身病)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성주목(星州牧) 동면(東面) 대동방(大洞坊) 즉 현재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선조는 시문용(施文用)의 전공을 포상(褒賞)하여 도사(都司)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그는 군사(軍事)·풍수(風水)·의술(醫術)에 정통하여 광해군 8년(1616년)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을 받아 성지(性智)·김일룡(金日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인조 원년(1623년)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인 인조 15년(1637년) 청 태종이 조선에 나와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는 말이 있자 시문용(施文龍)은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 깊숙한 산골인 군성산(君聖山) 아래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으며 이때부터 마을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렀으며 여기에 ‘대명단(大明壇)’을 쌓아 놓고 매월 (每月) 삭망(朔望)에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분향(焚香)하며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하였다. 그후 풍우(風雨)로 흙으로 만든 단(壇)이 허물어져 유지(遺址)만 남았으나 ‘대명단(大明壇)’을 중수(重修)하여 지금도 남아있다. 그 후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으로 돌아가 살았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1623년) 3월 14일 갑진 4번째기사에 의하면 “성지(聖智)·시문용(施文用)·김일룡(金馹龍)·복동(福同)은 모두 도망가 숨어 있었는데, 잡아다가 참형(斬刑)하였다”라고 사관(史官)이 기록하였으나 잘못된 기록이다. 당시 시문용(施文龍)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시문용(施文龍)이 중국 군사로 도피(逃避)한 자이며, 정인홍(鄭仁弘)에 의하여 우대, 천거받은 것은 정인홍의 조상이 절강인(浙江人)이었던 점과 풍수(風水)·점복(占卜)에 능한 점을 정인홍(鄭仁弘)이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당쟁(黨爭)에 따른 편견(偏見)일 뿐이다. 시문용(施文龍)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처형(處刑)되었다면 영조 17년(1741년)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훈련원도정(同知義禁府訓鍊院都正)으로 추증(追贈)을 할 까닭이 없고,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17년(1793년) “시문용(施文用)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전교(傳敎 : 임금이 명령을 내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여러 임금 대에 걸쳐 후손들을 녹용(錄用 : 관리로 채용함) 하는 등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던 것으로 보아 광해 15년 (1623년)에 참형(斬刑)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묘갈명(墓碣銘)과 묘비문(墓碑文)의 근거에 의거 공은 인조 21년(1643년) 향년 72세로 고종명(考終命)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묘는 성주군 수륜면 형곡(兄谷) 성주산(聖主山 : 보월동 산 71-1) 곤좌원(坤坐原)에 있다. 그는 다방면에 능하여『병학기정(兵學奇正)』·『감여지남(堪輿指南)』·『의복묘결(醫卜妙訣)』 등을 저술하였다. 후손들은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 1258번지에 풍천재(風泉齋), 성주군 수륜면 보월로 127에 모명재(慕明齋). 고령군 운수면 흑수길 61-6의 염수재(念修齋), 운수면 꽃질1길 46-8의 내화재(迺華齋)를 세워 그를 추모(追慕)하고 있다. 그리고 고령군 운수면 대평동 흑수(흑수길 61-1)에 별묘(別廟)를 지어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으며 헌종 13년(1847년) 공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인 풍천재(風泉齋) 옆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공의 위적(偉蹟)을 기리고 있다.
    (註釋) 마애기(磨崖記)
    자연 암벽에 부조(浮彫)나 선각(線刻) 등으로 조각한 기록을 말함. 주로 시부(詩賦), 불상(佛像) 등을 새겼음.

    4. 염수재기(念修齋記)


    신안(新安 : 星州)의 남쪽 흑수(黑水) 마을 용암리(龍巖里)에 있다. 염수재(念修齋)는 시씨(施氏)의 재실(齋室)로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사람은 나의 스승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선생이다. 시경(詩經)에 이런 말이 있다.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스스로의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聿修厥德). 사람이 가진 덕(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 군자(君子)들이라고 하면 이것을 닦는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덕을 닦는데는 반드시 조상을 생각해야 한다. 왜야하면 조상이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근본(根本)이 되기 때문이다. 나무도 뿌리가 있어야 지엽(枝葉)이 무성하듯이 군자는 덕을 쌓으면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하는 행동은 처음부터 나를 있게 한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닦는다는 것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시씨(施氏)의 선조(先祖)는 절강인(浙江人) 시랑공(侍郞公 : 施允濟)과 도사공(都司公 : 施文用) 두 분이라고 들었다. 절강(浙江)의 남쪽은 월(越)나라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창궐(猖獗 : 부정적인 세력이 세상을 휩쓸어 퍼지거나 날뛰는 것)하여 바다 건너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것이다. 왜란 당시 삼가 소경대왕(昭敬大王 : 선조)은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다. 마침 명나라 황제의 크나큰 은혜로 구원병(救援兵)이 와서 계속되는 왜군의 침입을 섬멸(殲滅 : 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킴)하게 되었다. 당시 시랑공(侍郞公)은 석상서(石尙書 : 石星)의 참모(參謀)로서 조선에 대한 구원(救援)을 적극 도왔다. 임진왜란 때는 이영하(李寧夏)와 마돈황(麻燉煌)이 교대로 군대를 지휘했는데 도사공(都司公)은 격전지(激戰地)에서 적을 섬멸(殲滅)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한 것은 역사 기록에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아!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도다. 이 두 분은 석성(石星), 이영하(李寧夏), 마돈황(麻燉煌)과 같은 사람들도 거의 좌우(左右)할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도사공(都司公)이 혼자 고국인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시씨(施氏)는 이렇게 하여 이 땅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집을 지어 대명동(大明洞)이라 하였으며 매월 초하루 날엔 분향(焚香)하고 정성스럽게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야말로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이 이와 같이 충성스러웠다. 숭정(崇禎)에 신주(神州 : 중국)가 몰락(沒落)할 때 죽은 충신(忠臣)이 약 4천 여명이었으므로 가세주(家世冑 : 대대로 집안에서 녹을 받는 이어 받는 후계자)가 진멸(殄滅 : 무찔러 모조리 죽여 없앰)되었으니 살아남은 자가 그들을 추앙(推仰 :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하며 동락(潼酪 : 우유)을 올렸다. 그건데 오직 시씨(施氏) 자손들만이 깨끗한 땅을 마련하여 견양(犬羊 : 개와 양)의 신하됨을 피한 시랑공(侍郞公)께서 영원히 의귀(依歸 : 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할 곳을 마련했으니 참으로 효성스러운 보가(保家 : 한 집안을 지켜 나감)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때 공(公)에게 재신급(宰臣級 : 재상급)의 고위 관료직을 내리고 공신(功臣)의 반열(班列)에 책록(策錄)하였다. 우리 성조(聖朝 : 당대의 왕조를 백성들이 높여서 일컫는 말)에서 이렇게 성대한 은전(恩典 :  예전에,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을 베푼 것은 시씨(施氏)의 조덕(祖德 : 조부의 덕)이 그 만큼 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손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심(銘心)한다는 것이다. 명심(銘心)한다는 것은 조상(祖上)의 하던 일이나 뜻을 끊지 아니하고 이어간다는 것이니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덕을 닦는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이공(二公 : 시랑공과 도사공)의 효손(孝孫 : 효성스러운 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 옛날에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효자는 상하(上下)에도 통달(通達)하고 유명(幽明 : 내세와 현세)에도 통달하다.”고 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귀(貴)하나 천(賤)하나 같은 것이다. 이 재실(齋室)에 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독경충신(篤敬忠信 : 말과 행실이 착실하며 공손하며 충성과 신의가 있음)함을 기본으로 하여 예악시서(禮樂詩書 : 예법과 음악, 시와 글씨)를 갖출 것이며 종족(宗族)끼리는 돈목(敦睦) 해야 할 것이다. 어진 사람을 업신여기는 불초(不肖)한 사람이 되지 말고 수시로 경서(經書 :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책)의 대의(大義 :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중대한 의리)를 공부하여 항상 참고 견디는 도리(含忍道理)를 알아서 상하(上下)와 유명(幽明)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면 어깨나 등을 두드리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천부적(天賦的)으로 갖추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방법으로 닦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닦아가는 사람은 욕됨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충성스러운 신하(臣下)의 후손들임에랴. 아! 나의 스승도 일찍이 풍천(風泉)의 슬픔을 겪었기에 왜놈 식 이름을 쓰지 말라고 장주(章奏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글)하였다. 여기에 지은 소옥(所屋 집)이야 말로 시씨(施氏) 후손들의 선조에 대한 봉양(奉養)의 정(情)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정석(珽錫)군이 나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한다. 내가 차마 진실로 사양하지 않는 것은 시씨(施氏)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떤 일을 당하여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아닌지 돌이켜 보고 또한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지 생각해 보며 서로 노력한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일문(一門 : 한 가문)의 아름다움과 경사(慶事)일 뿐만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 모두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염수재(念修齋)라고 이름 지은 의미가 아니겠는가.

    벽진(碧珍) 이교준(李敎峻) 적다.

    (註釋) 숭정(崇禎)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 주유검(朱由檢) 때의 연호(年號)이다. 1628년을 원년으로 1644년까지 17년 동안 사용되었다. 실질적으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〇〇년’ 등으로 ‘숭정(崇禎)’ 연호를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 사용하였다.
    (註釋) 풍천(風泉)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匪風)은 《시경(詩經)》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下泉)은《시경》조풍(曹風)의 편명(篇名)이니,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망(衰亡)해 감을 슬퍼한 노래이다. 어떻게 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이 명(明)을 높이고 청(淸)을 배척하고자 하는 정치적 논리를 마련하는 가운데 탄생시킨 신조어(新造語)이다.

    5. 풍천재(風泉齋) 기둥의 주련(柱聯) 시(詩)


    悲歌落日望中原(비가낙일망중원)
    저문 날 슬피 노래하며 중원을 바라보니
    蘇北腥塵滿眼昏(소북성진만안혼)
    소북(蘇北 : 강소성 북부, 북경 주변)의 성진(腥塵 : 비린내 나는 먼지, 청의 지배)이 눈앞에 가득하네
    風煙百月思鄕土(풍연백월사향토)
    바람 연기 속 여러 해 동안 고향 그리며
    冠帶三韓長子孫(관대삼한장자손)
    사대부(士大夫 : 학자 출신의 관리)로 삼한에서 자손 길렀네
    萬曆山河雙壯士(만력산하쌍장사)
    중국의 산하에서 자란 두 장사는
    朝鮮天地大明村(조선천지대명촌)
    조선 땅에 대명촌(大明村)을 이루었도다
    從古東人忠憤在(종고동인충분재)
    옛부터 동방의 사람들은 충성스런 마음이 있어
    欲將盃酒酹英魂(욕장배주뇌영혼)
    한 잔 술 가지고서 영혼께 제사 드리고자 하네

    (註釋) 중국의 산하에서 자란 두 장사는
    시문용(施文用)과 서학(徐鶴) 두 분의 명나라 장수들은 정유재란이 종전(終戰) 된 후 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명촌(大明村)에서 은거하였다. 시문용(施文用)이 귀국을 하지 않은 것은 전투 중 크게 다친 때문으로 전해지고, 서학(徐鶴)은 동료 시문용(施文用)을 이국만리에 홀로 버려두고 갈 수 없어서 의리상 조선에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이 절강시씨 족보(2016년) 및 기타 문헌에 근거하여 집필하였고 최종동(崔鍾東) 국장이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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