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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박씨(高靈朴氏) 현감공파(縣監公派)

기사입력 2019.07.1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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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구정(쌍림면 학동길 72-5)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고령박씨(高靈朴氏) 현감공파(縣監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 박언성(朴彦成)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는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이고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왕자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이며 본관(本貫)의 유래(由來)는 고양대군(高陽大君)의 봉토(封土)가 지금의 고령(高靈)인데 연유(緣由)한다.


    (2) 고령박씨(高靈朴氏) 분파(分派)


    1987년 정묘(丁卯) 대동보(大同譜) 편찬시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와 주부공파(主簿公派)의 상계(上系) 선조명(先祖名)이 실전(失傳)되어 상호 보조를 맞추기 위해 고양대군(高陽大君)의 7세를 기준으로 호장공파(戶長公派),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등 3계종파(三系宗派)로 분류하였으며 그 후 15개 지파(支派)로 분파(分派)되었다.


    (3) 고령박씨(高靈朴氏)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분파(分派)


    17세기에 발행된 씨족원류(氏族源流),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문집인 ‘무민당집(无悶堂集)’에 수록된 세계도(世系圖)를 상고(詳考)하여 보니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의 파조(派祖)로서 고려시대 향직(鄕職)을 지낸 7세 부창정(副倉正) 박환(朴還)의 증손자인 인걸(仁傑) 후손은 사정공파(司正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무숙공파(武肅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등 6개파, 인비(仁庇) 후손은 소윤공파(少尹公派) 1계파로 분파(分派)되었다.
    (註釋) 부창정(副倉正)
    고려시대 지방 행정구역 단위인 주현(州縣)의 재무(財務)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던 향직(鄕職)이었다.


    (4) 고령박씨(高靈朴氏)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派祖)
    조선시대 세종조(世宗朝)에 조산대부(朝散大夫)의 품계를 받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지평(持平)을 거쳐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낸 박진(朴珍)를 고령박씨(高靈朴氏)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派祖)로 한다.


    (5)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의 주도세력


    6세기 전반에 벽송정(碧松亭)을 수호(守護)하고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무너진 풍속을 바로 세워 향속(鄕俗)의 기강(紀綱)을 정립하기 위해 향내(鄕內)에 거주하며 향촌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였던 재지사족(在地士族)을 중심으로 결계(結契)를 한 것이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이었다. 명종 1년(1546년) 작성된 최초의 계안(契案)인 ‘송정입의(松亭立議)’를 보면 고령박씨 현감공파의 박거인(朴居仁), 박율(朴) 등이 남양송씨(南陽宋氏), 양천최씨(陽川崔氏), 청주한씨(淸州韓氏) 문중 인사들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6) 고령박씨(高靈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고령박씨는 186가구 471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호장공파(戶長公派) 중 교수공파(敎授公派)는 쌍림면 백산, 산당, 개진면 직리, 우곡면 사촌리 등지에,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현감공파(縣監公派) 후손들은 쌍림면 하거 1리, 우곡면 대곡2리에, 소윤공파(少尹公派) 후손들은 우곡면 도진리, 쌍림면 하거 1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동신(朴東臣)
    부창정(副倉正) 환(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조에 삼한삼중공신(三韓三重功臣)으로서 동북면찰리사(東北面察里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실전(失傳)이다.


    ② 박인걸(朴仁傑)
    금오위(金吾衛)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세영(世英)의 아들로서 정의대부(正議大夫)의 품계를 받고 도성 문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은 감문위(監門衛)의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것으로 고령박씨 대동보(1987년)에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고종 23년(1236년)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이임수(李林壽)와 박인걸(朴仁傑)이 각각 100여 인을 이끌고 나뉘어서 몽고군 진영으로 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야별초(夜別抄)의 지휘관인 지유(指諭)를 역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합천군 묘산면 휴암(鵂岩) 해좌(亥坐)이다.


    ③ 박광순(朴光純)
    찬성사(贊成事) 수견(守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성규의시중보조공신(輸誠揆義侍中輔祚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는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육권(育權)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해좌(亥坐)에 있다.


    ④ 박우생(朴雨生)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광순(光純)과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육권(育權)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순충양절동덕찬화공신(純忠亮節同德贊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지냈다. 배위는 예빈령(禮賓令) 윤신(允愼)의 따님인 정신택주(貞信宅主) 단산장씨(丹山張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당3리에 있다.


    ⑤ 박임귀(朴林貴)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우생(雨生)과 예빈령(禮賓令) 윤신(允愼)의 따님인 정신택주(貞信宅主) 단산장씨(丹山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를 지냈다. 배위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대사동(大寺洞 : 한절골) 간좌(艮坐)에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및 전거(轉居)


    (1)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를 지낸 박임귀(朴林貴)와 배위 이천서씨(利川徐氏) 부부 묘소가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대사동(大寺洞 : 한절골)에 있는 것으로 보아 1300년 초반에 이미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가장 먼저 고령지역에 입향하여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일대에 시거(始居)한 것으로 추정된다.


    (2) 박임귀(朴林貴)의 장남 박간(朴)은 처음 고령에 시거(始居)하다가 합천으로 이거하여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맏집인 사정공파(司正公派)를 이루고 ‘벽한정(碧寒亭) 고령박씨 문중’이란 이름으로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일명 이사리) 일원에 집성촌으로 세거하고 있으며 차자인 박진(朴珍)은 현감공파(縣監公派)를 이루고 고령에 정착하였다.


    (3) 그후 주손가(冑孫家)는 쌍림면 하거1리, 송림리, 우곡면 대곡2리 하라(河羅) 등지에 세거하고 있고 18세 승관(承瓘)의 후손들은 거창(居昌) 용산(龍山), 21세 홍발(弘發)의 후손들은 순천(順天) 낙안(樂安), 21세 사원(士元) 후손들은 김해로 전거(轉居)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박간(朴)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 임귀(林貴)와 원일(遠一)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서령(署令)을 지내다가 여말(麗末)에 은퇴(隱退)하여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桃津里)에 일시 은거하면서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청주인(淸州人) 한철충(韓哲沖), 중랑장(中郞將) 광산인(光山人) 김유(金維), 고령인(高靈人) 박경(朴景), 박용수(朴龍壽) 형제 등과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지키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종유(從遊)하였다. 그후 합천으로 이거하였다.
    (註釋) 망복(罔僕)의 절의(節義)
    멸망한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조선왕조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② 박진(朴珍)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 임귀(林貴)와 원일(遠一)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산대부(朝散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지평(持平)을 거쳐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가곡 백호등 건좌원(乾坐原)에 있다.


    ③ 박수산(朴壽山)
    영산현감(靈山縣監) 진(珍)과 숙부인(淑夫人) 안인고씨(安仁高氏) 사이에서 세종 23년(1441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의흥위(義興衛) 부장(部將)을 지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고 묘는 조고(祖考) 묘 아래에 있다.


    ④ 박장(朴璋)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의흥위(義興衛) 부장(部將)을 지낸 수산(壽山)과 울산군수(蔚山郡守) 징(澄)의 따님인 안인(安人)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직대부(中直大夫) 행(行)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고령군 서송림(西松林) 청룡녹(靑龍鹿)에 있다.


    ⑤ 박승수(朴承璲)
    자(字)는 윤수(潤叟)이고 하양현감(河陽縣監) 장(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 양시(兩試)에 동시 입격(入格)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선고(先考) 아래에 있다.


    ⑥ 박승일(朴承)
    도총도사(都摠都事) 서(瑞)와 장령(掌令) 계(繼)의 따님인 의인(宜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 4년(1498년) 무과에 급제한 후 중종 1년(1506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중종 12년(1517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배수(拜受)되었고 중종 14년(1519년) 사천현감(泗川縣監)을 거쳐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고 묘는 선고(先考) 아래에 있다.


    ⑦ 박거(朴)
    남해현령(南海縣令) 승일(承珒)과 숙인(淑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자에 대한 강학(講學)과 시위(侍衛)의 일을 함께 관장하였던 세자익위(世子翊衛)를 지내고 중종 1년(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고 묘는 신동(新洞) 우록(右麓) 경좌원(庚坐原)에 있다.


    ⑧ 박율(朴)
    내금위(內禁衛) 부장(部將) 승전(承琠)과 숙인(淑人) 인동류씨(仁同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고 묘는 기동(己洞) 임좌(壬坐)에 있다.


    ⑨ 박대임(朴大任)
    자(字)와 호(號)는 전하지 않는다. 세자익위(世子翊衞) 거()와 공인(恭人)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고령군 쌍림면 용담(用淡 : 현재 송림리)에서 태어나 재종숙(再從叔)이자 현감공파(縣監公派)의 종손(宗孫)이며 단천군수(端川郡守) 거인(居仁)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령에서 창의(倡義)할 때 아들 경란(景鸞)과 함께 동참(同參)하였다고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전투에 참전(參戰)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관직은 만호(萬戶)를 지낸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생졸년(生卒年) 및 묘소 미상(未詳)이다. 대구광역시 망우당공원내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嶺南護國忠義壇)에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註釋) 재지사족(在地士族)
    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을 일컫는 말을 의미한다.


    ⑩ 박언임(朴彦任)
    자는 중보(重甫)이며 장기현감(長鬐縣監) 율()과 세근(世根)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소속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아들 번(蕃)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 세보(2009년)를 상고(詳考)하니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현손(玄孫)으로서 금모포(黔毛浦) 만호(萬戶)와 훈련원(訓練院) 판사(判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서 전공을 세운 김성률(金聲律)을 사위로 삼았던 기록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나 묘는 기동(己洞) 임좌(壬坐)에 있다.


    ⑪ 박치정(朴致貞)
    자는 태이(太異)이고 호는 둔암(遯庵)이다. 처사(處士) 환(寰)과 인엽(寅燁)의 따님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중종 27년(1532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종조(明宗朝)에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다. 오로지 시(詩)와 예(禮)에 마음을 쏟고 세상의 명리(名利 : 명예와 이익)를 구하지 않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슬픔을 머금고 있다가 추복(追服)을 입으니 사림(士林)들이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가 박씨 문헌록과 행장(行狀)을 근찬(謹撰)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현 동산(東山) 신좌원(辛坐原)에 있다.
    (註釋) 추복(追服)
    상례(喪禮) 의식의 하나로써, 부모가 돌아갔을 때 나이가 어렸거나 또는 어떤 사고로 인하여 상복(喪服)을 입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⑫ 박경란(朴景鸞)
    만호(萬戶) 대임(大任)의 둘째아들로 고령군 쌍림면 용담(用淡 : 현재 송림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가 의령에서 창의(倡義)할 때 부자(父子)가 함께 동참(同參)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및 묘소는 미상(未詳)이다.


    ⑬ 박사추(朴士樞)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 치정(致貞)과 수의부위(修義副尉) 계종(繼宗)의 따님인 상주주씨(尙州周氏) 사이에서 선조 18년(1585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과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지냈다. 졸년(卒年) 미상(未詳)이며 묘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 있다.


    (2) 근·현대인물


    ① 박태곤(朴泰坤 : 1966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근무
    ② 박차곤(朴且坤 : 1972년) 이학박사, 금오공대 조교수
    ③ 박삼곤(朴三坤 : 1981년) 중소기업체 경영

    자료제공 : 문중 박종률(朴鐘律)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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