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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끔찍했던 그날의 악몽 평생을 따라다녀”

기사입력 2019.06.2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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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보훈의 달’, 매년 이맘때면 동족상잔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내 몸 돌볼 새도 없이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 호국영웅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70여 년 전 참전 유공자들이 한 분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어 당시의 처참했던 생생한 소식을 듣는데도 이제 시간이 없다. 평생을 전쟁의 악몽에 시달려 오신 우곡면 객기리 호국영웅 서정열(88) 어르신으로부터 긴박했던 당시의 얘기를 들어본다.  -편집부-

     

    우곡면 객기리 호국영웅 서정열 어르신 

    - 기억에 남은 6.25한국전쟁 얘기를 들려주세요

    △이제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서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날의 끔찍했던 악몽이 평생을 따라다닐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특히 M1고지 탈환 위해 우리 대대원 5분지 4를 희생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백마고지 전투’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 전쟁 얘기의 단골 메뉴지만, 정작 그 부근에서 벌어진 내가 경험했던 ‘M1고지 전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 때때로 서운할 때도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통신병이다. 전투병인 소총부대가 제일 선봉에 서고, 그 뒤를 지휘관과 함께 행동하는 2선이 통신병인데 상부에서 하달되는 그날의 암호를 지휘관을 통해 부대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다.
    전쟁에서 암호는 곧 생명과 직결된다. 가령 적에게 암호가 노출됐을 땐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없다.
    M1고지를 사이에 두고 낮에는 적군 수중에 있고, 밤이면 아군에서 탈환해 교두보 형성이 오래기간 지속됐다. 고지 탈환을 위해 밤새 계곡을 이용해 올라가다 보면 이미 적군이 점령하고 있고, 아군 비행기에서 조명탄을 밝혀놓고 전투를 벌여 날이 밝을 무렵이면 고지가 아군 수중에 들어온다.
    이러한 전투가 몇날 며칠을 반복하다 보니 고지는 완전 민둥산이 되고 흙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한번은 부대원 전체가 수십대의 차량으로 적진에 들어갔는데, 전투가 끝나고 나올 때는 불과 서너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나왔으니 대대병력 5분지 4가 전사했던 아픈 기억이 평생을 따라 다녔다.
    다시는 이땅에 그러한 전쟁이 없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 언제 입대 하셨습니까?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10일 징집이 됐다. 군용 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갔다. 제주도 훈련소로 가기 위해 화물 수송선(LST)에 몸을 실었으나 때마침 풍랑 때문에 출항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1주일 이상을 출발도 못하고 일렁이는 뱃속에서 꼼짝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한참 지난 후에 출항은 했지만 파도가 심해 뱃멀미로 여기저기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눠준 주먹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고생을 거쳐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 도착해 훈련에 들어갔다. 보통 때면 2개월 이상 훈련해야 하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 1개월도 안된 기간에 훈련을 마치고 전방에 투입하기 위해 또다시 배를 탔다. 파도를 뚫고 항해한 지 이틀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도착한 곳은 속초항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미군 트럭으로 옮겨 타고 대관령을 넘어 어느 들판에 내려졌다. 막사는커녕 들판에 건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벙커를 만드는 작업이 가장 먼저였다. 때마침 겨울철이라 꽁꽁 언 땅을 파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사방에서 간간이 포성이 들려오는 전선이라 불평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장 먼저 까칠봉이라는 격전지에 배치됐다가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M1고지로 이동해 전투를 벌이게 됐다.
    휴전 후 조치원에 있는 예비사단에서 군 생활 5년만인 1957년 1월 제대했다.

    - 전후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북한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경험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평화무드가 조성돼는 것처럼 보여 두고 볼 일이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되겠다는 것이 전쟁을 경험해 온 세대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3년여 동안 밀고 밀리는 전쟁을 치루면서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이 희생되었고 우방국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참극 이라는 표현 밖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생생한 전쟁 경험들을 후세들에게 전해서 실상을 알게 해야 되겠지만 대부분 구십세 전후여서 이제 몇 사람 남지 않았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다.
    또한 현재까지 살아 있는 그 세대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가족관계를 소개해 주세요

    △부인 김옥연(82세)과 슬하에 3남 1여를 뒀지만 아들 하나는 먼저 세상을 뜨고 현재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현재 우리 내외와 손녀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는데, 아이들도 모두 어렵게 살고 있어서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
    특히 할머니가 허리와 무릎 수술 후 다리를 전혀 쓸 수가 없고, 어려움이 많아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럽다고 배석한 이종명 어르신이 귀띔한다.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생활은 어떻게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논이 조금 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직접 농사를 할 수가 없어서 남에게 줬는데 곡수 조금 받고, 나라에서 주는 노령연금으로 생활하지만 늘 쪼들린다고 한다.
    최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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