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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星山李氏) 미산정(薇山亭)

기사입력 2019.06.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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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산정(薇山亭) 유래(由來)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으나 그후 후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종전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요구하면서 세폐(歲幣 : 예물로 해마다 보내는 물품)도 대폭 늘리고 정병(正兵)까지 무리하게 요구해 왔으나 조선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인조 14년(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 누루하치가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을 감행하자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이 고령에 의병소(義兵所)를 설치하자 동생인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이 백형인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을 도와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각지에 통문(通文)으로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재촉하여 북진(北進)하던 중 ‘성하(城下)의 맹세(盟誓)’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와 이로부터 세상에 더욱 뜻이 없어 대가야읍 관동리 미산(薇山)아래에 미산정(薇山亭)이라 이름하고 정자의 가에 밭을 일으켜 국화를 심어 국포(菊圃 : 국화밭)로 자호(自號)하고 추용만절(秋容晩節 : 가을 국화)의 감회(感懷)를 느꼈다.

    (註釋1) 성하(城下)의 맹세((盟誓)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쟁을 하였던 인조가 항복하고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서 성 밑인 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仁祖)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하는 방식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의식을 행하여 신하(臣下)의 맹세를 하였던 굴욕적인 맹세를 뜻한다.

    2. 미산정(薇山亭) 연혁(沿革)

    (1)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성하(城下)의 맹세(盟誓)’가 있자 통곡하고 돌아와 세상에 뜻을 버리고 강학지소(講學之所)로 미산정(薇山亭)을 창건(刱建)하였으니 창건시기는 인조 15년(1637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2)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락(頹落)하였던 시기는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찬(撰)한 미산정•국포재기(薇山亭•菊圃齋記)에 의하면 숙종 20년(1694년)이다


    (3) 미산정(薇山亭)을 중건(重建)한 것은 정자를 폐(廢)한 후 220년이 지난 1914년 음력 10월이다.

    3. 미산정(薇山亭) 건물구조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리 265-5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건물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측 1칸과 우측 2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놓았다.

    4.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선조 초에 유일(遺逸)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했던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선조 17년(1584년) 9월 14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의 학문을 따르다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죽포(竹圃)이현룡(李見龍),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 매포(梅圃) 이택룡(李澤龍) 등 삼형제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문학과 숭고한 절조(節操)로 세상에 추중(推重)을 받으니 ‘강문삼포(岡門三圃)’라 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형(伯兄) 이현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아래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處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동호(東湖) 이서,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 기옹(畸翁) 박공구(朴羾衢)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효종 6년(1655년) 12월 26일 향년 72세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기산동 뒤쪽 임좌(壬坐)에 있다. 문집 2권이 있으며 후손 진상(震相)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참찬(參贊) 곽종석(郭鍾錫)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아래와 같이 명(銘)하고 칭송하였다.

     

    “ 維山有薇(유산유미) 聞伯夷之風歟(문백이지풍여)
      오직 산에 고사리가 있었으니 백이(伯夷)의 바램이냐?
      維菊在圃(유국재포) 誰識潯陽之龍歟(수식심양지용여)
      국화가 밭에 있었으니 누가 심양(潯陽)의 용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배위는 참봉(參奉) 취해(就海)의 따님인 진양하씨(晋陽河氏)이다.

    5. 미산정•국포재기(薇山亭•菊圃齋記)

    옛날 은(殷)나라에서 대로(大老 : 세간(世間)에서 존경을 받는 어진 노인)인 고죽자(孤竹子 : 백이숙제의 아버지)는 은나라가 망하자 서산(西山 :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일생을 마치니 후세에 절의(節義)의 선비가 많이 그 이름을 사모하여 칭찬하여 말했다. 영천(靈川 : 고령) 관아(官衙)의 북쪽 6,7리에 산이 있는데 청수(淸秀 : 모습이 깨끗하고 준수함)하고 상명(爽明 : 시원하고 밝음)하여 우뚝하게 덕기(德氣 : 어질고 도타운 마음씨)를 높이 받드는 것 같은 것을 미봉(薇峯)이라 말한다. 우리 이씨(李氏)가 그 동쪽에 집을 지어 살면서 세세(世世)로 높은 벼슬을 답습(踏襲)하고 현인(賢人)과 석학(碩學)을 서로 바라보았으니 나의 9대조 국포(菊圃) 선생 같은 분이 즐겁게 근재(謹齋 : 諱 東禮)공과 죽포(竹圃 : 諱 見龍)공이 부형(父兄)이 되고 옥산(玉山 :  諱 起春) 당조(堂祖)와 용담(龍潭 : 諱 朴世豪) 외부(外傅 : 가정밖에서 가르치는 스승)의 가르침에 복습(服襲 : 이어 받음)하고 관감(觀感 :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낌)하여 마침내 사양문(泗陽門 : 한강 정구의 문하)에 올라 학덕(學德)을 성취하니 사양문(泗陽門)의 제자(諸子)가 미산처사(薇山處士)라 칭송한 것이 이 때문이다. 광해군(光海君)의 혼조(昏朝 : 임금이 혼미하여 국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조정)를 만나 권세(權勢)있고 간사(奸邪)한 신하가 정권을 잡음에 선생의 거슬림을 보고 세상에 나아가지 아니 하더니 장릉(長陵 : 인조)의 창성(昌盛)할 즈음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장차 일을 할 것 같았는데 불행히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에 오랑캐의 병란(兵亂)이 두 번이나 일어나는 바람에 국가는 천하만고(天下萬古)의 환란(患亂)을 만나 선생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백선생(伯先生 : 죽포 이현룡)을 따라 의려(義旅 : 의로운 군사 즉 의병)를 움직였는데 황황(煌煌 : 번쩍번쩍 밝게 빛나는 모양)의 격문(檄文 :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하려고 쓴 글)은 모두 선생의 수중(手中)에서 나온 것이다. 열군(列郡 : 여러 고을)의 용사가 감발(感發 : 감동하여 분발함)함이 있어 다투어 일어났는데, 어찌 성맹(城盟 :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함)이 별안간 이루어져 선생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통곡하고 방황하여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게 하였던고? 이로부터 세상에 뜻을 버리고 미산정(薇山亭)이 이루어지고, 정자의 가에 밭을 일으켜 국화를 심고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대개 서산(西山 : 수양산)에서 이루어진 채미(採薇 : 고사리를 캠)한 것을 본받고자 함이요. 진처사(晋處士 :  중국 남조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동리(東離 : 동쪽 울타리) 만절(晩節 : 국화)이 또한 마음에 느껴 닿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선생의 시문(詩文 : 시가와 산문)을 품평(品評)하는 은덕군자(隱德君子 : 덕을 숨기고 살다간 군자)가 말하기를 소쇄산림지풍(蕭灑山林之風 :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산림의 풍도)이라 하였으나 이 어찌 선생의 미의(微意 : 깊이 속마음에만 있고 겉에는 변변하지 못하게 드러나는 뜻)를 모두 얻었다 하겠는가? 세대(世代)가 오래되고 화환(禍患 : 재앙과 환난)이 이어져서 정자를 보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선생의 고풍탁절(高風卓節 : 고상한 풍채와 높은 절개)은 다시 영향이 없게 되었다. 지난 태상(太上 : 고종) 을해년(1875년)에 두훈(斗勳)이 작고(作故)한 종형(從兄) 광훈(光勳)씨와 상제(庠弟) 영훈(英勳)과 더불어 제선장로(諸先長老 : 덕행과 학식이 높고 나이가 많은 집안 원로)에 품의(稟議)하여 한 되 한 말의 곡식을 수합(收合)하고 협력하여 늘였음은 대개 오로지 선사(先事 : 조상을 위하여 일함)의 미비한 것을 다스리려 함이다. 수 십년래 수갈(竪碣 : 비석을 세움)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을 때 홀연(忽然 : 갑자기)히 또 문운(文運)이 비색(否塞 : 운수가 꽉 막힘)하여 대종(大宗 : 대종가의 계통)의 의창(義倉)사업이 폐지되고 소종(小宗 : 대종가에서 여럿으로 갈려 나간 방계)의 재산도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무릇 경영한 바가 허사(虛事 : 헛일)로 돌아갔다. 지난해 계축년(1913년)에 종질(從姪 : 사촌 형제의 아들) 달근(達根)이 개연(慨然 : 억울하고 원통하여 몹시 분하게)히 선정(先亭 : 선대의 정자)을 근심하여 남은 재산을 수습하고 쓰여지는 재목과 기와를 구비하고 현로(賢勞 :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홀로 힘써 수고함)를 홀로 맡고 심력(心力 : 마음과 힘)을 쌓아 옛터에 나아가 주망(楱莽 : 무더기로 더부룩하게 난 초목)을 개척하고 비로소 4칸 정자를 세우니 북반(北半 : 일정한 지역을 남북으로 반씩 나누었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부분)은 실(室)이요, 남반(南半 : 일정한 지역을 남북으로 반씩 나누었을 때, 남쪽에 해당하는 부분)은 당(堂)이라. 서산(西山)을 등지고 동하(東下 : 동쪽 아래)에 작은 밭이 있으니 바로 옛날 국화를 기르던 땅이다. 고사(庫舍 : 곳집)와 원장(垣墻 : 울타리)은 또한 바야흐로 차례로 정돈하여 낙성(落成 : 건물을 완성함)하였는데 미치지 못하고 종질(從姪)이 별안간 천고(千古)에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었으니 하늘이 효자 자손에 보시(報施 : 베풀어 은혜에 보답함)하는 것이 이 같은 것이냐? 모든 종족(宗族)이 비탄(悲歎)해하며 드디어 간략하게 규획(規劃 : 꾀하여 정함)을 정하고 따라서 추원(追遠 :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추모하고 숭배하는 것)하는 감회(感懷)를 펴고 또 망인(亡人)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였다. 아! 정자가 폐(廢)했다가 부흥(復興)함이 이에 220년간의 상거(相距 : 서로 떨어져 있음)가 있어 자손의 조령(凋零 : 경제적인 형편이, 차차 쇠하여 보잘것없이 됨 )함이 이때보다 더 심(甚)함이 없었으니, 이 정자는 반드시 또한 때가 있음을 기다린 것이리라. 정자는 이미 일어났으니, 무릇 정자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먼저 선조의 업적이 눈부시게 빛남을 생각하고 물러나 충(忠)을 강론(講論)하고 효(孝)를 책임지며 시(詩)를 일으키고 예절을 세워 우리 세덕(世德 :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미덕)을 저버리지 아니한 후에야 하늘에 계시는 우리 선조의 영령(英靈)이 비로소 즐겨 말씀하시기를 “나도 자손이 있다”고 하실 것이다. 만약 수간(數間 : 몇 칸) 옥자(屋子 : 건물)를 중건(重建 :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함으로써 스스로 책임을 다했다 하고 긍구(肯構 : 아버지가 이룩한 일을 아들이 잘 이어받음)한 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일(前日 : 전날)의 국화가 무초(茂草 : 무성한 풀)가 되는 것을 더불어 무엇으로 분별(分別)하겠는가? 이제 천하는 이미 육지가 잠기었다. 일부 양추(陽秋 :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별칭)를 다시 강송(講誦 :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욈)할 땅이 없었는데 우리 정자가 마침 이루어 졌으니, 우리 선조의 대의(大義 :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장차 다시 세상에 밝아 질 것이니, 내가 기문(記文)을 짖는 것을 어찌 그만 두겠는가? 곽징(郭徵 : 면우 곽종석)군이 일찍 묘비에 명(銘)을 지어 말하기를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백이(伯夷)의 바람을 들었던가? 국화가 밭에 있으니 누가 심양(潯陽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옛성의 이름)의 용(龍)을 알았던가”하였으니 지언자(知言者 :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진의를 잘 파악하는 사람을 말한다)가 칭송한 것이다. 뒤의 사람이 이를 보고 마음에 강개(慷慨 :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정의심이 복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함)한 바가 있을 것이리라.

    갑인(甲寅 : 1914년) 소춘절(小春節 : 음력 10월)


    9세손 두훈(斗勳)은 관수(盥漱 : 양치질하고 세수함)하고 삼가쓰다

    (註釋1) 서산(西山)에서 이루어진 채미(採薇)한 것을 본받고자 함이요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데 왕위를 서로 양보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를 토벌하자 천자(天子)를 공격한 신하라며 섬기기를 거부하고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죽어서 충신(忠臣)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註釋2) 동리(東籬) 만절(晩節)


    도연명(陶淵明, 陶潛)의 음주시(飮酒詩)에
    “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저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라는 한 구절이 보이는데, 이 시는 은거해 사는 자  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표출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동쪽 울타리에 국화꽃을 가꾸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국포공(菊圃公)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註釋3) 의창(義倉)

    고려와 조선시대에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를 말한다.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저장한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던 구호기관이다.
     
    - 자료 제공 인주공파 유사 이종태(李鍾台),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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