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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密陽朴氏) 충간공파(忠簡公派)

기사입력 2019.06.0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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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원재(성산면 원당길 27-5)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박씨(朴氏)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신라(新羅) 시조(始祖)이자 모든 박씨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탄생설화(誕生說話)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B.C 69년) 임자년(壬子年), 3월 초하룻날 육부(六部)의 조상들이 각각 그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군주(君主)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放恣)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德)이 있는 사람을 찾아 그를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떠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개와 같이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뻗고, 흰 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어앉아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 곳을 찾아가 보니 자줏색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얼굴과 자태(姿態)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 아이를 얻었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 : 벼슬의 등급)는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자(天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왕후(王后)을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주변에서 계룡(雞龍)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녀의 얼굴와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을 시키자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 시내의 이름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아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瓠 : 박, 바가지 호〕처럼 생겼다. 향인(鄕人)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성(姓)을 박씨(朴氏)로 하였다. 여자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聖人)의 나이가 13세가 되는 오봉(五鳳) 원년(B.C 57년) 갑자년에 남자아이는 왕으로 세우고 여자아이는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雞井)에서 났으므로 또는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계룡(雞龍)이 상서로움을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하생략 ”

     

    (2) 밀양박씨(密陽朴氏) 시조(始祖)


    시조(始祖)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이다.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이 여덟왕자를 각기 분봉(分封)할 때 8대군 중 맏아들인 박언침(朴彦忱)을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하였다. 본관제도(本貫制度)를 처음 정할 당시에 밀양(密陽)의 옛 지명(地名)이 밀성(密城)이어서 후손들이 밀성박씨(密城朴氏)로 본관(本貫)을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년) “밀양부(密陽府)”로 승격되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였다.

     

    (3) 밀양박씨(密陽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밀양박씨는 724가구, 210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밀양박씨(密陽朴氏) 충간공파(忠簡公派) 후손들은 성산면 용소리 원당(院堂), 덕곡면 본리(本里) 인곡(仁谷), 후암리(後岩里) 지사(志士) 등지에 세거하고 있고 규정공파(糾正公派) 후손들은 대가야읍 고아 2리, 내상리, 연조리, 쌍림면 고곡리, 다산면 호촌리(湖村里) 등지에 분거(分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언부(朴彦孚)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던 박찬행(朴讚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세 있는 신하인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사평림(東史平林)에 기록되어 있다.

    ② 박영균(朴永均)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박대화(朴大和)의 손자이며 병부참정(兵部參政)을 지낸 양효공(良孝公) 박간(朴幹)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지냈고 의천군(疑川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가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③ 박문경(朴文卿)
    자는 성시(聖始)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지낸 박영균(朴永均)의 셋째 아들로 충혜왕 5년(1344년) 태어났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때 파견하는 임시군관직(臨時軍官職)인 충청도(忠淸道)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다.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졸(卒)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묘가 실전(失傳)되어 1966년 후손들이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에 제단(祭壇)을 세워 매년 음력 10월 2일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으며 공을 추모하는 재실(齋室)인 모원재(慕遠齋)를 세웠다.

     

    (2) 조선시대

     

    ① 박민(朴敏)


    자는 신명(愼明)이고 호는 성헌(惺軒)이다. 충청도(忠淸道)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낸 박문경(朴文卿)과 정부인(貞夫人)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공민왕 23년(1374년) 태어났다. 교리(校理)를 지냈다. 태종 15년(1415년) 졸(卒)하였다. 묘는 실전(失傳)되었다.

    ② 박장운(朴長耘)
    자는 사원(思遠)이고 호는 야옹(野翁)이다. 충청도(忠淸道)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낸 박문경(朴文卿)의 손자로 세종 27년(1445년) 태어났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영북면 지역에 자리잡았던 영평현(永平縣)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연산군 1년(1495년) 졸(卒)하였다. 묘는 선영하 좌록(左麓) 임좌(壬坐)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충청도(忠淸道)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낸 충간공(忠簡公) 박문경(朴文卿)의 5대손으로 통덕랑(通德郞) 행(行)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한 박중손(朴仲孫)이 선조 4년(1571년) 선향지(先鄕地)인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고령군 덕곡면 본리(本里) 인곡(仁谷)으로 입향(入鄕)하였다.

     

    4.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박대복(朴大福)
    자는 자성(子誠)이며 호는 운암(雲庵)이다. 고양당(高陽堂) 통덕랑(通德郞) 행(行)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낸 박중손(朴仲孫)과 화(華)의 따님인 공인(恭人) 화순최씨(和順崔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명종 13년(1558년) 고령군(高靈郡) 덕곡면(德谷面) 인곡리(仁谷里) 옛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합천(陜川), 고령(高靈)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키고 고령군 성산면 낙동강변 무계산성(茂溪山城) 무계진(茂溪津)에 이렀는데 이 진(津)이 바로 왜갈항(倭竭項) 속칭 ‘왜갈목(倭竭목)’ 또는 ‘왜갈못(倭竭못)’이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보채(壘砦 : 보루)를 쌓고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보낸 전첨사(前僉使) 손인갑(孫仁甲) 군사와 무계성새(茂溪城塞)에 포진(布陣)중 군량(軍糧)이 떨어져 군병(軍兵)의 사기(士氣)가 땅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기아(飢餓)에 시달린 의병(義兵)들에게 군량미(軍糧米) 이천 석을 내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각오로 독전(督戰)하니 전군(全軍)이 사기충천(士氣衝天)하여 커다란 함성(喊聲)과 함께 일제히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개시(開始)하여 승첩(勝捷)을 거두었다. 적(敵)의 시체(屍體)에 막혀 강물이 흐르지 못했으므로 후인(後人)들은 이곳을 왜갈항대첩지(倭竭項大捷地)로 불렀다. 선조 25년(1592년) 6월 10일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서 진중순사(陣中殉死)하였다.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공의 빛나는 전공(戰功)에 감탄하면서 진중순절(陣中殉節)을 한없이 슬퍼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말하기를 무계대첩(茂溪大捷)은 실로 운암(雲庵) 박대복(朴大福)의 공효(功效)요 당당충의(堂堂忠義)의 고결함은 해나 달과 다툴 만한 일월쟁광(日月爭光)이라고 칭송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贈職)하고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卷)에 “이등공신(二等功臣) 박대복(朴大福) 주부(主簿)”라고 기록하였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선영 아래 해좌원(亥坐原)에 있다. 후손들은 고령군 덕곡면 본리리 인곡에 1991년 문학박사 서수생(徐首生)이 근찬(謹撰)한 병조참판운암밀성박공신도비(兵曹參判雲庵密城朴公神道碑)를 세웠고 1994년에는 재실(齋室)인 운암정(雲庵亭) 건립하여 공의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기리고 있다. 배위는 참봉(參奉) 숙(淑)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이다.

    ② 박세검(朴世儉)
    자는 사일(士逸)이고 호는 미강(彌岡)이다.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된 박대복(朴大福)과 참봉(參奉) 숙(淑)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명종 1년(1546년) 태어났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장사랑(將仕郞)과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광해군 10년(1618년) 졸(卒)하였다. 묘는 선영하(先塋下) 동원(同原) 해좌(亥坐)이다.

    ③ 박영규(朴永奎)
    자는 취오(聚五)이고 호는 용암(龍庵)이다. 묵재(默齋) 박정회(朴挺檜)와 석필(錫馝)의 따님인 고령이씨(高靈李氏) 사이에서 순조 13년(1813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와 돈영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광무 1년(1897년) 졸(卒)하였다. 묘는 성주군 용암면 금계촌 앞 유좌(酉坐)이다.

    ④ 박종해(朴宗海)
    초휘(初諱)는 계흠(桂欽)이고 자는 경화(敬和)이며 호는 죽와(竹窩)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돈영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낸 박영규(朴永奎)의 장남으로 순조 33년(1833년) 태어났다. 백부(伯父) 괴당(槐堂) 박진규(朴震奎)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게 영리하고 슬기로워 학업에 성장이 있었다. 양친을 효도로써 봉양하고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경전(經典)의 뜻을 묻고 토론하였으며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912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성지산 상봉(上峰) 간좌(艮坐)에 있다.

     

    (2) 근·현대인물
    ① 박재근(朴在根 : 1870년)
    진근(瑨根)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자는 영언(韺彦)이고 호는 운석당(雲石堂)이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문하에서 수업한 후 온릉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어 능(陵)을 관리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이하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등과 대한독립(大韓獨立)을 모의(謀議)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 중이던 약국의 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고 고령, 성주, 서울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였다.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선고(先考)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② 박병목(朴炳穆 : 1915년) 성산면 지방의회 의장, 밀성박씨 대종회 이사
    ③ 박승호(朴勝壕 : 1924년) 한국 양산업협회 회장. 평화금속 회장
    ④ 박태원(朴泰元 : 1933년) 감사원 감사관, 노동부 직업훈련원장
    ⑤ 박상규(朴祥圭 : 1934년) 농협 중앙회 대구직할시 및 경북 지회장, 농협 경상북도 연수원장, 경북대 기성회 회장
    ⑥ 박수부(朴秀夫 : 1937년) 대구 명덕초등학교 교장
    ⑦ 박기상(朴琦尙 : 1938년) 신라오릉보존회 이사장
    ⑧ 박영경(朴盈坰 : 1948년) 국세청 사무관, 세무사
    ⑨ 박병련(朴炳鍊 : 1948년) 청송군수, 성주군수, 구미시장, 내무부국장, 경북도 기획실장,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
    ⑩ 박형경(朴炯坰 : 1950년) 대구 중부, 서부, 성주, 포항북부 경찰서장
    ⑪ 박수경(朴秀坰 : 1958년) 육군 중령
    ⑫ 박현탁(朴鉉卓 : 1958년) 박현탁 치과병원 원장
    ⑬ 박기범(朴起範 : 1979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의정부 법원 판사 서울 중앙법원 판사
    ⑭ 박동규(朴東奎 : 1983년) 청주지법 충주지원 판사, 서울 동부 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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