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고령신씨(高靈申氏) 정은공파(靜隱公派)

기사입력 2020.01.03 22:27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모가정> 우곡면 우곡로1146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始祖)
    ① 시조(始祖) 신성용(申成用)의 선조는 신라의 공족(公族 : 귀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지방에서 세력을 누리던 공족(公族)들을 호장(戶長)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던 관례(慣例)에 따라 시조(始祖) 신성용(申成用)도 호장(戶長) 집안에서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내며 이름과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누대(累代)에 걸쳐 고령에 세거(世居)하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왔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나 고려 고종이나 원종 때 사람으로 추정된다.
    ② ‘검교(檢校)’란 고려 말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관직명 앞에 붙인 말이며
    군기감(軍器監)은 병기(兵器)의 제작을 관장하였던 ‘군기시(軍器寺)’의 정4품 관직이다.
    ③ 시조(始祖) 신성용(申成用)의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산주동 산38번지 만대산(萬代山) 유좌(酉坐)에 자리 잡고 있는데 여러 풍수가(風水家)가 흔히 말하는 ‘조선팔대명당(朝鮮八大明堂)’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손들은 이곳에 추모당(追慕堂)을 세워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세향(歲享)을 봉행(奉行)한다.
    (2) 고령신씨(高靈申氏)의 파조(派祖)와 지파(支派)
     7세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분파(分派)하여 13개 지파(支派)가 형성되었다.
    ① 신장(申檣)을 파조(派祖)로 하는 암헌공파(巖獻公派) : 5개파
    - 서윤공파(庶尹公派)·순창공파(淳昌公派)·문충공파(文忠公派)·안동공파(安東 公派),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
    ② 신평(申枰)을 파조(派祖)로 하는 정은공파(靜隱公派) : 3개파
    - 생원공파(生員公派)·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성재공파(省齋公派).
    ③ 신제(申梯)를 파조(派祖)로 하는 감찰공파(監察公派) : 4개파
    - 사성공파(司成公派)·인천공파(仁川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사직공파(司直 公派),
    ④ 신인기(申仁杞)을 파조(派祖)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 1개파
    (3) 고령현(高靈縣) 토성(土姓) 중 족세(族勢) 강성(强盛)
    ①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조선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령지역의 토성(土姓)이 7이니, 신(申)·박(朴)·이(李)·유(兪)·김(金)·백(白)·정(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② 토성(土姓)이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이후 각 지방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유력한 씨족의 성씨집단을 말하며 그 지방 토박이 성씨를 말한다. ‘토(土)’는 본관(本貫)을, ‘성(姓)’은 혈연적인 부계(父系) 혈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령현(高靈縣) 토성(土姓)이라 함은 고령(高靈)을 본관(本貫)으로 쓰는 고령신씨, 고령박씨, 고령이씨 등을 지칭(指稱)한다. 
    ③ 고령신씨(高靈申氏)는 고려 말에 상경종사(上京從仕)하여 5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6세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등이 문과에 급제한 후 현달(顯達)하였고 조선 초기에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의 아들 7세 암헌(巖軒) 신장(申檣), 정은(靜隱) 신평(申枰), 회헌(晦軒) 신제(申梯)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高官)이 되어 잠영세족(簪纓世族)의 반열(班列)에 올라 고령현(高靈縣) 토성(土姓) 중 족세(族勢)가 가장 강성(强盛)하였다.

    (註釋1) 상경종사(上京從仕)
    서울로 올라가 벼슬길에 나아감
    (註釋2) 잠영세족(簪纓世族)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


    (4) 고령신씨(高靈申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고령신씨(高靈申氏)는 102가구 260명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가정공(柯亭公) 휘 신대즙(申大楫), 참의공(參議公) 신경즙(申景楫) 후손은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沙村里)에, 송헌공(松軒公) 신흥즙(申興楫)의 후손은 고령군 운수면 운산1리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신덕린(申德隣)
    자는 불고(不孤)이며 호는 순은(醇隱)이다.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낸 신사경(申思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율정(票亭) 윤택(尹澤)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시학(侍學), 전교령(典校令), 좌사의(左司議),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 서석산(瑞石山)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楷書)·초서(草書)·예서(隷書)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으며 필적은 해동명적(海東名蹟)에 실려 있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 : 본떠서 펴냄)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한다.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의 한사람으로 고령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 공은 포은(團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와 함께 ‘6은(六隱)’이라 칭하였다. 그중 특히 목은(牧隱) 이색(李穡)과는 교의(交誼)가 두터워 목은집(牧隱集)에 ‘억신판서덕린(憶申判書德麟)’ 이라는 시(詩)을 남겨 소개하고자 한다. 

    少年日日苦相邀(소년일일고상요) 소년 시절엔 날마다 애써 서로 맞이하여
    泥醉沈吟放短謠(니취침음방단요) 잔뜩 취하고 깊이 읊어 짧은 노래 불렀는데 
    閑裏草書風雨快(한리초서풍우쾌) 한가할 때의 초서는 풍우처럼 상쾌하였고
    靜中柴立海山遙(정중시립해산요) 홀로 서 있는 청수한 모습은 먼 해산에 있네
    酒樽何日添春暖(주준하일첨춘난) 술동이는 그 언제나 따스한 봄을 더할런고
    鬢髮如今帶雪飄(빈발여금대설표) 귀밑털은 지금에 날리는 눈발을 띠었다오
    契友獨公猶健在(계우독공유건재) 친구 중엔 유독 공만이 아직 건재하니
    可憐老牧政心焦(가련노목정심초) 늙은 목은(牧隱) 애타는 마음 정히 가련하여라 

    ② 신포시(申包翅)
    호는 호촌(壺村)이다. 예의판서(禮儀判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신덕린(申德隣)과 봉은사진전직신(奉恩寺眞殿直臣) 호(扈)의 따님인 광주정씨(光州鄭氏) 사이에서 공민왕 10년(1361년) 태어났다. 포은(團隱) 정몽주(鄭夢周)와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양문(兩門)에 출입하면서 경학(經學)을 강마(講磨)하며 사도진작(斯道振作)에 힘썼다. 우왕 3년(137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우왕 9년(138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동방(同榜)이다. 장남 제학공(提學公) 신장(申檣)이 새 왕정(王政)에 참여하여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 등 집현전(集賢殿) 요직(要職)에서 세종(世宗)의 문치(文治)를 적극보필(積極輔弼)하여 친신(親臣)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노친(老親)을 봉양(奉養)치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양(歸養)할 뜻을 품자 세종이 이를 만류키 위하여 영친(榮親)의 은전(恩典)을 베풀어  내자윤(內資尹)의 벼슬을 내리고 뒤이어 통정(通政)·판전농(判典農)·봉상(奉常)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 10년(1428년) 사간(司諫)으로서 직임을 수행하면서 공법 제정, 신분제, 행정 제도의 문제와 관리들의 비리 척결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의 문물제도의 설행(設行 : 베풀어 행함)에 앞장섰다. 세종 12년(1430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아버지 신덕린(申德隣)처럼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필적은 『해동필첩(海東筆帖)』에 남아 있다. 남원의 두곡사(杜谷祠), 고흥의 충의사(忠義祠) 등에서 향사(享祀)한다.

    (註釋1) 사도진작(斯道振作)
    유교(儒敎)의 도덕(道德)을 떨쳐서 일으킴
    (註釋2) 친신(親臣)
    임금을 매우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뜻한다
    (註釋3) 귀양(歸養)
    집으로 돌아가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함
    (註釋4) 영친(榮親)의 은전(恩典)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을 뜻한다.

    (2) 조선시대
    ① 신평(申枰)
    자는 형부(衡夫)이며 호는 정은(靜隱)이다. 공조참의(工曹參議) 신포시(申包翅)와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議判書) 김충한(金冲漢)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공양왕 1년(1390년) 남원부(南原府) 호촌(壺村)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는 공의 조카이며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어머니가 공의 딸이므로 폐비 윤씨(廢妃 尹氏)에게는 외조부(外祖父)가 되며 연산군(燕山君)에게는 외증조부(外曾祖父)가 된다. 일찍이 백형(伯兄) 암헌공(巖軒公) 신장(申檣)에게 학문(學問)을 배워 세종 16년(1434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司諫院) 정은(正言)에 제수(除授)되었다. 공은 세종 19년(1437년)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비행(非行)을 고하고 그에게 하사한 구사(丘史 : 노비)를 거둘 것을 대간(臺諫)에서 연명하여 상소하는 등 강직(剛直)한 성품을 갖추었다. 단종 3년(1455년)에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여 내놓자 두 임금의 신하가 되지 않는 절의(節義)로서 퇴관(退官)하고 상산(商山 : 지금 상주)의 청동산중(靑銅山中)에서 은거하다가 노경(老境)에 성향지(姓鄕地)인 우곡면 사촌리에 은거하면서 고향인 전라도 옥과현(玉果縣 : 지금 전남 곡성군 옥과면) 가실(柯室)을 그리는 마음에 모가정(慕柯亭)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며 노년에 이르러 성묘차(省墓次) 감회(感懷)가 깊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省楸今日事(성추금일사) 성묘길의 오늘이
    寧復又明年(영복우명년) 또 내년에도 어찌 다시 찾아 뵐 수 있을까?
    玉州千里路(옥주천리로) 옥주(玉州)땅 천리길에
    揮淚向南天(휘루향남천) 남쪽 하늘을 향하여 눈물만 뿌린다네

    (註釋) 옥주(玉州)
    옛 지명은 옥과현(玉果縣)이며 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일대를 말한다.

    끝까지 군왕(君王)께 예(禮)를 드리는 ‘북면(北面)’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시조(始祖) 신성용(申成用)이 현리(縣吏)로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고 그 자손의 사환(仕宦 : 벼슬살이)이 계속되어 고려 말에 상경종사(上京從仕)하면서 마침내 재경세력(在京勢力)이 되어 이거(移居)하였고 성향지(姓鄕地)인 고령(高靈)에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은 없었다.
    (2) 단종 3년(1455년)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에게 물려주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상주의 청동산중(靑銅山中)에 은거(隱居)하다가 노경(老境)에 성향지(姓鄕地)에 환주(還住 : 되돌아와 삶)하여 그 자손들은 우곡면 사촌리, 운수면 운산1리 등지에 560여 년간 세거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신렴(申)
    자는 윤보(允甫)이고 호는 남사(南沙)이다. 신맹정(申孟艇)과 군수(郡守) 상계(尙啓)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세종 9년(1427년) 태어났다. 문종 2년(1452년)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곽산군수(郭山郡守)를 지냈다. 성종 15년(1484년) 졸(卒)하였다.
    (2) 신원종(申元淙)
    자는 간경(簡卿)이고 호는 백당(白堂)이다. 참봉(參奉) 신보택(申普澤)과 군자감정(軍資監正) 정경(正景)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 16년(1561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판관(判官)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신수항(申守沆)
    자는 호숙(灝叔)이고 호는 합곡(合谷)이다. 판관(判官) 신원종(申元淙)과 진사(進士) 세걸(世杰)의 따님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선조 18년(1585년) 태어났다. 중훈대부(中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광해군 13년(1621년) 진잠현감(鎭岑縣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인조 18년(1640년)에 졸(卒)하였다.  
    (4) 신급(申汲)
    자는 여인(汝仁)이며 신경추(申景樞)와 익장(益章)의 따님 고령김씨(高靈金氏) 사이에서 인조 2년(1624년) 태어났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급하자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떼어 피를 내어 약에 타서 드렸다. 어머니의 장례 후에는 무덤아래에서 비바람도 피하지 않은 채 소리내어 서럽게 우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위해 움막을 지어 주고 죽과 마실 것을 마련해 주었다. 영조 5년(1729년)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贈職)되었다. 숙종 21년(1695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조카 신정제(申正濟)와 함께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에 ‘고령신씨 양공 효행비(高靈申氏 兩公 孝行碑)’를 세워 그 뜻을 기린다.
    (5) 신정제(申正濟)
    자는 사징(士徵)이고 호는 초천(樵川)이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신계상(申啓相)과 성구(成龜)의 따님인 인동유씨(仁洞柳氏) 사이에서 숙종 13년(1687년)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동시에 전염병(傳染病)에 걸려 생명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어 회생(回生)하게 하였으며, 입맛을 잃어 음식을 먹지 못하자 얼음 속에서 잉어가 솟아오르고 눈 속에서 토끼가 기어 나오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 그것으로 부모의 입맛을 되찾게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는 일을 그치지 않아 묘 아래에 길이 하나 생겨났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길을 “신효자로(申孝子路)”라고 불렀다. 사림(士林)에서 고을의 감영(監營)에 그의 효행(孝行)을 표창하기를 청하였으며 영조 25년(1749년) 졸(卒)하였다.
    (5) 근·현대인물
    ① 신철휴(申喆休 1898년) : 독립유공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愛國章)
    ② 신명휴(申明休 1926년) : 조일석유상사 사장
    ③ 신은식(申殷植 1936년) : 의학박사
    ④ 신재휴(申宰休 1936년) : 제11대, 12대 국회의원, 대신석유주식회사 대표이사 한국석유협회 부회장, 송원학원 이사장
    ⑤ 신규식(申圭植 1937년) : 한전연구관리사관
    ⑥ 신영휴(申英休 1939년) : 조일석유상사 사장
    ⑦ 신정휴(申正休 1942년) : 서울대 교수, 유기화학박사
    ⑧ 신충식(申忠植 1942년) : 탤런트, 영화배우, 강화군 홍보대사
    ⑨ 신판돌(申判乭 1942년) : 주택은행지점장
    ⑩ 신봉휴(申鳳休 1948년) : 대명석유회사 사장
    ⑪ 신판우(申判雨 1951년) : 화공학 박사, 동양미래대 교수
    ⑫ 신민식(申敏植 1954년) : 제19회 행정고시 합격, 경북대 교수
    ⑬ 신관우(申觀雨 1959년) : 부산CBS방송국 운영이사장
    ⑭ 신종호(申宗浩 1980년) : 제51회 사법고시 합격, 법무법인 예서원 변호사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