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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星山李氏) 인주공파(仁州公派) 문산재(文山齋)

기사입력 2019.12.2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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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재(대가야읍 내상길 188-5)

     

     1. 문산재(文山齋) 유래(由來)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영(陣營)에 참여하여 자기의 재물을 군량(軍糧)으로 내어 놓는 등 창의토적(創義討敵)한 전공(戰功)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던 이득춘(李得春)과 무과별시(武科別試)에서 급제한 후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제수(除授)받았던 그 아들 이동길(李東吉) 부자(父子)를 기리기 위하여 1973년 후손들이 문수산(文壽山) 의 이름을 따서 문산재(文山齋)라 명명(命名)하고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길 188-5에 세운 재실(齋室)이며 경내(境內)에는 문산재 신축 기념비가 있다.

    (註釋1) 창의토적(創義討敵)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함
    (註釋2)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조선 선조 38년(1605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9천 60명에게 내려 준 공신의 칭호(稱號)를 말한다
    (註釋3) 녹훈(錄勳)
    공신(功臣)들의 훈공(勳功)을 문서에 기록함

    2. 건축형태

     건물 입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1칸의 정문이 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깔았다. 좌측에는 ‘수경실(修敬室)’이라고 편액(扁額)한 관리사(管理舍)가 있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1) 이득춘(李得春)

     조선시대 빈객(賓客)의 연향(宴饗)과 종실(宗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官署)인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을 지낸 언함(彦涵)과 진사(進士) 탕우(湯佑)의 따님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성격(性格)과 도량(度量)이 엄격하고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뛰어나게 크고 씩씩하고 훌륭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나아가서 존재(存齋) 곽준(郭遵), 모계(茅溪) 문위(文褘),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등과 함께 적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서로 충의(忠義)와 용맹(勇猛)을 다하였다. 공은 자기의 가산(家産)을 모두 의병(義兵)의 군량미(軍糧米)로 헌납(獻納)하고 방략(方略)과 계획(計劃)을 논의하고 도와 무계(茂溪), 정진(鼎津) 전투 등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여러 번 은혜를 입고 모범이 될 만한 본보기로 장려되고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평정(平靖)된 후 고령향안(高靈鄕案)을 제일(第一) 먼저 창설(創設)하여 선비의 기풍(氣風)을 바로 잡았다.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의 탁계선생문집(濯溪先生文集) 중 임계별록(壬癸別錄)에 의하면 “선조 26년(1593년) 계사년 정월 15일 아들 우(雨)와 군관(軍官) 몇 명을 데리고 곽가수(郭假守) 율() 이내장(李內將) 대기(大期) 김충의영(金忠義瑛) 등과 함께 송암(松菴) 김면(金沔) 도대장(都大將)을 아림(娥林) 진중(陣中)으로 찾아가서 뵙고 성주(星州) 소모관(召募官) 이홍우(李弘宇)와 배응곤(裵應坤), 고령(高靈) 이득춘(李得春), 전영기(全永期) 등이 모두 와서 회동(會同)하여 기밀(機密)을 요하는 군무(軍務)를 모의(謀議)하였다”는 기록과「송암실기(松菴實記)」 중〈임진창의시동고록(壬辰倡義時同苦錄)〉의 제의사(諸義士) 명단에 공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공의 행적(行蹟)을 가히 상고(詳考)할 수 있다. 둘째 아들 동길(東吉)도 공을 따라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창의(倡義)에 동참(同參)하였다. 부자(父子)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기병(倡義起兵)하면서 진충보국(盡忠報國)한 것은 희귀(稀貴)한 사례(事例)로 세인(世人)들의 추중(推重)받았다. 공은 혼인으로 인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館洞)에서 1585년경 내상리(內上里)로 옮겨 살아 성산이씨(星山李氏) 고령(高靈) 내곡파(內谷派)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모전(茅田) 자좌원(子坐原)에 있다고 하나 묘의 차례가 분명하지 않아(兆次難) 후손들이 설단(設壇)하였으며 비명(碑銘)은 방손(傍孫) 성훈(星勳)이 삼가 지었다. 후손들이 1973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문산재(文山齋)를 건립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득춘(得春)과 봉사공(奉事公) 동길(東吉)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다.

    (註釋) 아림(娥林)
    아림(娥林) 현재 경남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梁項里) 속칭 전촌(箭村 : 살목골)을 뜻한다.

    (2) 이동길(李東吉)

     자는 경원(景元)이며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던 득춘(得春)이며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공은 기개(氣槪)와 도량(度量)과 재지(才智)가 출중(出衆)하여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이 앞장서서 창의(倡義)하자 공은 아버지를 배행(陪行)하여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을 배견(拜見)하니 공을 보고 재지(才智)가 뛰어나다고 말씀하시고 군관(軍官)으로 삼았다. 김산(金山), 개령(開寧), 하노(賀老), 죽현(竹峴) 등지의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군량(軍糧)을 아주 많이 조달(調達)하였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이 전염병을 만나자 강대익(姜大翼), 류보춘(柳報春)과 함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도리(道理)를 다하였다. 김산진중(金山陣中)에서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의 죽음을 듣고 급(急)히 돌아가 비밀히 하여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고 갑자기 왜병(倭兵)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북을 쳐서 전진시키니 왜적이 패주(敗走)하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 류여백(柳如栢)이 지은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의 만시(輓詩)를 소개하고자한다.

    “鼓鳴司馬走(고명사마주)
    북을 울리면서 사마(司馬 : 군정(軍政)을 맡아보았던 벼슬)가 떠나가니
    琴斷子期亡(금단자기망)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자기(子期)가 죽었네”라고 하였다

    공은 군정(軍政)을 맡으면서 도리와 책임을 다하였다. 선조 27년(1594년) 갑오년에 실시된 무과별시(武科別試)에서 급제한 후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제수(除授)받았다. 묘는 2012년 12월 30일 대가야읍 신리 띠밭곡에 조성된 600여 평의 성산이씨 내곡(乃谷) 묘원(墓園)내 선고(先考)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묘소 옆 임좌(壬坐)에 있으며 배위 어모장군(禦侮將軍) 림(琳)의 따님인 공인(恭人) 강양정씨(江陽鄭氏)와 합폄(合窆)이다. 묘갈명(墓碣銘)은 방후손(傍後孫) 헌주(憲柱)가 삼가 지었다.

    (註釋1) 배행(陪行)
    모시거나 또는 데리고 따라가거나 오거나 함
    (註釋2) 배견(拜見)
    절하고 뵘
    (註釋3) 패주(敗走)
    싸움에 져서 달아남
    (註釋4)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자기(子期)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鍾子期)는 음조를 잘 이해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은 뒤에 자기의 음조를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지극하고 참되게 알아 주는 지기(知己)의 벗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4. 성산이씨(星山李氏) 문산재기(文山齋記)

     고령군청의 서쪽 십리정도의 가까운 곳에 문수산(文壽山)이 있고 그 산기슭 심원(深遠)한 곳에 하나의 골짜기를 이루고, 그 골짜기 천류(川流 : 냇물의 흐름)의 좌우(左右)에 풍치가 아름답고 비옥(肥沃)한 토지가 둘러 쌓인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네다섯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 내상(內上)이라 일컫는 마을은 다 이씨(李氏)가 살고 있는 마을로 기억하더라. 그 이씨의 선조는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휘(諱) 득춘(得春)이며 공은 관동(館洞)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복거(卜居)하여 스스로 장수유식(藏修遊息)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義兵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과 함께 의병(義兵)를 일으켜 종군(從軍)하였으며 진중(陣中)에 자기의 재물을 군량(軍糧)으로 내어 놓아 공적을 많이 이루었으며 임진왜란이 평정(平定)되자 고령현의 향안(鄕案)을 창작(創作)하여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고 그 아들 봉사공(奉事公) 휘 동길(東吉) 또한 충의(忠義)와 용맹(勇猛)이 있어 전투할 때마다 항상 공을 크게 이루니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이 그 재능을 인정하고 사랑하였다. 현재 10여대에 이르도록 자손들의 생계가 청빈(淸貧)하여 의례적(儀禮的)인 문장을 갖출 수 없어 이에 이르러 서로 같이 의논하여, 마을 가운데에 세운 집을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휘(諱) 득춘(得春)과 봉사공(奉事公) 휘 동길(東吉)을 추모하는 곳으로 재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받들고 이윽고 종회(宗會)를 열어 여러분들의 뜻을 모아 재실의 명칭과 그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거늘 나는 그 산의 이름을 따서 문산재(文山齋)라 하고 이 일을 기록한다. 아! 대저 두 분의 공은 충심(忠心)을 간직한 채 정의(正義)로써 일을 행하고, 국가에 공훈이 있고 그 은택(恩澤)이 모든 백성에게 미치고 자손들은 그 음덕(蔭德)을 입어서 삭제(削除)할 수 없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을 쇠체(衰替)하여 떨치고 펴지 못하니, 이 어찌 운수가 나쁘다고 도저히 알려질 수가 없을까? 그러나 이른바 성(盛)함과 쇠(衰)하는 일이 마땅히 일정한 일이 있으리오. 어떤 사람은 번성(繁盛)해서 쇠잔(衰殘)에 이르고 그 번성과 쇠잔한 일은 처음부터 유래가 없지 아니하고, 이에 인사(人事)의 득(得)과 실(失)이 있으니, 고(故)로 사람이 능히 부지런하여 검소하고 척려(惕厲)하면 곧 쇠잔한 일을 당하더라도 때로는 어려움이 없이 사물이 이루어지고, 편안하게 놀며 즐기고 게으르고 거만하여 버릇이 없으면 바야흐로 번성한 일을 당하더라도 때로는 뒤엎어질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 이 일은 필연(必然)적인 이치이니 나쁜 운수를 당하면 능(能)히 참고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현재 이씨는 대대로 농업을 독실(篤實)히 이용하여 검소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생존(生存)과 졸거(卒去)를 보살펴 관리하면서 능히 적소성대(積小成大)하고서 선도(善導)하여 가문(家門)을 성하게 하고, 이제야 햇빛이 넓게 비치는 전원(田園)에 재실(齋室)을 크게 성취하고 지금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궁구(窮究)하며 추원(追遠)하여 그 은공(恩功)에 보답하고자 섬겨서 이씨가 다시 한번 번성하니 이제야 조상(兆祥)이 있어 보이노라. 다만 이로부터 더욱 분발하여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행하면서 조상을 참된 마음으로 받드니 원근(遠近)의 일족(一族)들에게 일러 모두 화목(和睦)의 도리를 다하며 앞으로 번성(繁盛)할 일을 거듭하는 그 역량(力量)이 모범으로 삼게 할 것이다. 생각건대 나는 가계(家系)의 후손으로서 선조를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칭송(稱頌)하지 못하고 대체로 모사(模寫)하되 오로지 바로잡아 서술하니 이 기문(記文)을 게판(揭板)하고서 평상시 이 재실(齋室)에 있는 사람은 이 글을 살펴보고 서로 힘써 일할 것이니라.

    계축년(1973년) 입하절(立夏節) 
    방계후손(傍系後孫) 헌주(憲柱) 삼가 짓다

    (註釋1) 복거(卜居)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註釋2) 장수유식(藏修遊息)
    공부(工夫)할 때는 물론 쉴 때에도 학문(學問)을 닦는 것을 항상(恒常) 마음에 둠
    (註釋3) 향안(鄕案)
    조선시대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士族)의 명단. 원래 지방에 거주하는 품관(品官)의 명단으로서 경재소(京在所)에 비치된 <경안(京案)>에 대칭하여 쓰인 명칭으로 보인다
    (註釋4) 의례(儀禮)
    형식(形式)을 갖춘 예의(禮儀)
    (註釋5) 쇠체(衰替)
    쇠하여져서 다른 것으로 바꿈
    (註釋6) 척려(惕厲)   
    군자가 하늘을 두려워하여 몸을 수양하는 일
    (註釋7) 졸거(卒去)
    졸서(卒逝)와 같은 말이며 죽어서 멀리 감
    (註釋8) 적소성대(積小成大)
    작거나 적은 것도 쌓이면 크거나 많아짐
    (註釋9) 선도(善導)
    올바른 길로 이끔
    (註釋10) 궁구(窮究)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함
    (註釋11) 추원(追遠)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추모하고 숭배하는 것
    (註釋12) 은공(恩功)
    은혜와 공로
    (註釋13) 조상(兆祥)
    어떤 징후(徵候)나 또는 징조(徵兆)를 경험(經驗)함
    (註釋14) 게판(揭板) 
    시문(詩文)을 새겨 누각에 걸어 두는 나무 판을 말한다
    (註釋15) 입하절(立夏節)  
    입하(立夏)를 명절(名節)로 이르는 말이며 입하(立夏)는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들어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양력으로 5월 6일 무렵이고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른다.

    자료제공 : 성산이씨 인주공파 내곡문중 회장 이기환(李基桓), 향토사학자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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