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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達城徐氏) 현감공파(縣監公派)

기사입력 2019.11.3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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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① 세대가 멀고 문적(文籍)에 증거가 없고 보책(譜冊)에 이르기를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는 서진(徐晋)으로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피봉(被封)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② 다만 공주(公州) 만성보(萬姓譜)에 이르기를 “판도판서(版圖判書)는 중랑장(中郞將) 한(閑)의 증손이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신(愼)의 손이고 밀직사사(密直司使) 무질(無疾)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서진(徐晋)의 출생연도는 고려 원종에서 충렬왕 사이인 1260년 ∼ 1280년으로 추정된다.

    (2) 대구부지(大丘府誌)에 기록된 서진(徐晋)의 시(詩)

    “대동강(大同江) 부벽루(浮碧樓)가 한 폭의 그림인데 도장구(倒裝句) 생가(笙歌)에 취(醉)코 묻혀서 오래 못 돌아와 함께 노는 사람들아 나를 장군(將軍)으로 보지 말아라. 이내 이래뵈도 경연(經筵)의 검토관(檢討官)일세”

    (3) 달성서씨(達城徐氏) 분파(分派)

    달성서씨(達城徐氏)는 7세를 기준으로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석령(錫苓) 진사공파,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개 파로 대별된다.

    (4) 달성서씨(達城徐氏)와 대구서씨(大丘徐氏) 관계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을 시조로 하고 있다. 달성서씨는 향파(鄕派)로 대구서씨는 경파(京派)로 부르기도 한다. 달성서씨는 서한(徐)의 증손으로 추측되는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대구서씨는 시조 서한(徐)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어서 고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7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로 모시고 대동보(大同譜)를 서로 달리하고 있다. 달성서씨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라 하고 대구서씨는 ‘소윤공파(少尹公)’라고 갈래 지운다. 두 파는 숙종 28년(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고 그 발문(跋文)에 “기원(其源)이 동일파야(同一派也)”라고 기록하여 근원(根源)이 동일(同一)함을 밝히고 있으나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하기 어렵다. 영조 12년(1736년)에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5) 분파(分派) 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달성서씨는 239가구 70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낸 서제(徐濟)의 후손인 현감공파(縣監公派)는 다산면 곽촌(藿村), 개진면 오사1리, 성산면 고탄리, 쌍림면 산당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성균관(成均館) 권지학유(權知學諭)를 지낸 서도(徐渡)의 후손인 학유공파(學諭公派)는 대가야읍 연조리에 세거하고 있고, 감찰공파(監察公派)는 대가야읍과 개진면 반운리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서섭(徐涉)의 후손인 판서공파(判書公派)는 성산면 기족리, 어곡리, 삼대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서기준(徐奇俊)
    승봉랑(承奉郞) 도관좌랑(都官佐郞)을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 달천군(達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② 서영(徐穎)
    호는 노남(櫓南)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문원(文苑 : 문인 사회)에 거(居)하사 인재를 장진(獎進 : 권장하여 끌어 올림)하고 문장(文章)과 훈업(勳業)으로 명망이 높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서균형(徐鈞衡)
    자는 상경(商卿)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찬성사(贊成事) 영(穎)과 승동정(承同正) 경안공(景安公) 영유(永儒)의 따님인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충혜왕 1년(1340년) 태어났다.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의 문인이다. 공민왕 9년(1360년) 정포은(鄭圃隱)·이석탄(李石灘)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 15년(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우왕 6년(1380년) 우대언(右代言)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는데, 우왕이 시부(詩賦)의 제목을 보려고 하자 누설(漏泄)을 문제삼아 거절하였으며 이여량(李汝良) 등 99명을 뽑았으며 우왕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았다. 창왕 1년(1388년) 문하평리(門下評理) 신분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광우(兪光祐)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에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호인(胡人)들을 평정하여 보새(寶璽 : 옥새)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공양왕 1년(1389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왕명을 받아 우왕을 강릉에서 참수(斬首)하였다. 공양왕 2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 조준(趙浚)·이지(李至) 등과 함께 세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3년(1391년)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로 재직 중 졸(卒)하였다. 시호는 정평(貞平)이다. 순조 33년(1833년) 대구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2) 조선시대

    ① 서침(徐沈) : 5세
    자는 성묵(聖)이고 호는 구계(龜溪)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균형(均衡)과 전의부령(典儀副令) 영리(英利)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포은(鄭圃隱)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였고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연산도호부사(延山都護府使)·갑산군수(甲山郡守)·상호군(上護軍)·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을 지냈다. 세종조에 공의 거주지인 달성(達城) 즉 현재 달성공원을 나라에 바치면 자손대대로 국록(國祿)을 내려 준다고 하였으나 공은 그것을 사양하고 본읍백성(本邑百姓)들이 나라에 바칠 조세(租稅)에 대하여 매석당(每石當) 오승식(五升式 : 5되) 삭감하여 줄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혀 조선말까지 이 제도가 존속하였다.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 숙종 44년(1718년) 귀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워 공을 봉향(奉享)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② 서문한(徐文翰) : 6세
    호는 쌍죽당(雙竹堂)이며 일호(一號)는 남강(南岡)이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침(沈)과 동궁첨사(東宮詹事) 을방(乙芳)의 따님인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승사랑(承仕郞)의 품계를 받았으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광흥창(廣興倉)의 부승(副丞)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③ 서제(徐濟) : 7세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 문한(文翰)과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 봉조(鳳朝)의 따님인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냈으며 현감공파(縣監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④ 서필(徐弼) : 9세
    충순위(忠順衛) 맹원(孟元)과 영산신씨(靈山辛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와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이다.


    ⑤ 서함(徐涵) : 11세
    자는 징원(澄源)이고 응기(應期)와 찰방(察訪) 사림(士林)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30년(1535년)에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선조 30년(1597년)에 졸(卒)하였다.


    ⑥ 서혜(徐憓) : 13세
    자는 자화(子和)이고 호는 서암(棲巖)이다. 증(贈) 장악원정(掌樂院正) 사건(思建)과 주부(主簿) 응룡(應龍)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선조 26년(1593년) 태어났다.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문인이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고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숙종 1년(1675년)에 졸(卒)하였다.


    ⑦ 서신(徐愼) : 13세
    자는 여기(與幾)이고 호는 성은(城隱)이다. 북산의병장(北山義兵將)으로 추대된 사진(思進)과 충순위(忠順衛) 림(霖)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선조 18년(1585년) 태어났다. 시례지가(詩禮之家)의 가문을 이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정세(精細)하고 깊어 유학(儒學)에 통달한 권위있는 학자(學者)인 유종(儒宗)으로 칭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증직(贈職)받았다. 인조 19년(1641년) 졸(卒)하였다.

    (註釋) 시례지가(詩禮之家)
    논어 <계씨(季氏)> 제13장에 나오는 고사(故事)로 공자가 아들 리(鯉)에게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고(不學詩 無以言)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不學禮 無以立)”라고 말씀하시므로 시(詩)와 예(禮)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을 말한다. 가전시례(家傳詩禮)와 비슷한 말이다. 흔히 집안에서 전해져 오는 유학의 전통을 말한다.


    ⑧ 서유태(徐惟泰) : 14세
    자는 계백(啓伯)이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혜(憓)와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민홍(民洪)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영양이씨(永陽李氏) 사이에서 인조 22년(1644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 숙종 34년(1708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하양현감(河陽縣監) 서제(徐齊)의 현손(玄孫)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함(涵)의 장남 사진(思進)의 후손은 성산면 고탄리, 어곡리 등지에, 차남 사건(思建)의 후손은 개진면 오사1리에, 삼남 사수(思洙)의 후손은 다산면 곽촌리에 세거하고 있다. 아래에서 입향조, 입향경위, 입향시기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용강공(龍江公) 12세 서사수(徐思洙)가 대구에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대구에서 다산면 곽촌(藿村)으로 입향하였다.

    (2) 입향경위 미상이며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17세 서필(徐珌)이 숙종 26년(1700년)경 대구(大邱)에서 개진면 오사1리에 입향하였다.


    (3) 입향경위 미상이며 19세 서황(徐榥)이 순조 17년(1817년) 대구(大邱)에서 성산면 고탄리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서사수(徐思洙)
    초명(初名)은 사수(思遂)이며 자는 군중(君仲)이고 호는 용강(龍江)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함(涵)과 부장(部將) 한수(漢壽)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진양하씨(晋陽河氏) 사이에서 명종 4년(1549년) 태어났다.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내고 다산의 용암(龍岩)에 살면서 약초를 캐고 물에 낚시하면서 시사(時事 : 세상일)를 잊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용암처사(龍岩處士)라 칭(稱)하였다. 광해 6년(1614년) 졸(卒)하였다. 1961년 후손들이 용강재(龍江齋)를 세워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있다. 


    ② 서명필(徐命弼)
    초휘(初諱)는 필원(弼元)이고 자는 자직(子直)이며 호는 다은(茶隱)이다. 순택(順澤)과 해주오씨(海州吳氏) 사이에서 영조 26년(1750년) 태어났다. 효행이 남달라 부모님 병(病) 중에 눈 속에서 씀바귀를 캐고 날아가는 꿩이 집으로 들어오거늘 공양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어드렸으며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공의 효행록은 세간(世間)에 유포(流布)되었다. 정조 1년(1777년) 졸(卒)하였다. 후손들이 공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소재 용강재(龍江齋) 좌측에 효행비(孝行碑)를 세웠다.


    ③ 서남교(徐南敎)
    자는 순화(舜和)이고 관명(官名)은 시동(始東)이다. 장사랑(將仕郞) 참봉(參奉)을 지낸 정학(正學)과 경찬(敬贊)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고종 25년(1888년) 태어났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칙임(勅任 : 칙명으로 벼슬을 시킴)되었고 주임관(奏任官)에 서용(敍用 : 등용)되었다. 1955년 졸(卒)하였다.


    ④ 서준규(徐俊奎)
    자는 영서(永瑞)이고 광조(光祚)와 재곤(在坤)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철종 13년(1862년) 태어났다. 종사랑(從仕郞) 행(行) 충의위(忠義衛) 참봉(參奉)을 지냈다. 1939년 졸(卒)하였다.


    ⑤ 서재명(徐載明)
    자는 봉서(逢瑞)이고 광옥(光玉)과 규상(圭相)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1902년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소대신 닭을 잡고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남다른 효행이 세상에 전해졌다. 1986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인물

    ① 서희수(徐喜洙 1909년) : 성산면장
    ② 서건일(徐健一 1938년) : 서울신문 편집국장, 중소기업연구원 상임고문
    ③ 서정윤(徐正倫 1944년) : 대구시 남구 구의원
    ④ 서정흠(徐正欽 1949년) : 안동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원장
    ⑤ 서정은(徐正殷 1952년) : 경북북도 공무원교육원 교육지원과장, 서기관
    ⑥ 서준교(徐俊敎 1959년) : 경영학박사
    ⑦ 서성건(徐盛健 1960년) : 변호사, 법조윤리협의회 사무총장
    ⑧ 서인환(徐仁煥 1964년) :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박사
    ⑨ 서남교(徐南敎 1968년) : 행정고시 합격, 행정안전부 주민참여협업과 과장
    ⑩ 서정욱(徐正栯 1970년) : 행정 및 사법고시 합격, 법무법인 민주 변호사
     

    자료제공 : 후손 서창교(徐昌敎)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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