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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시씨(浙江施氏)

기사입력 2019.11.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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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재(운수면대평리 805번지)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중국 시씨(施氏)의 연원(淵源)


     시(施)씨는 원래 중국에서 희(姬)라는 성(姓)으로 BC 1800년 경 은민칠족(殷民七族) 중의 한 성(姓)으로 내려오다가  BC 1100년 경 희창(姬昌)은 아들 희발(姬發)과 함께 중국을 평정하여 주(周)나라를 세워 희창(姬昌)은 문왕(文王)이 되고 희발(姬發)은 무왕(武王)이 되었다. 문왕(文王)의 9세손 노혜공(魯慧公)의 아들 시부(施父)의 5대손 미생(尾生)을 시백씨(施伯氏)라 하였는데 비로소 시성(施姓)이 되었다. 이로부터 시씨(施氏)가 시작되었다. 시부(施父)의 8세손이 시지상(施之常)이며 춘추(春秋) 말기에 공자의 제자로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중 한 사람이다.
    (註釋) 은민칠족(殷民七族)
     은나라 백성인 7족 곧 “도씨(陶氏), 시씨(施氏), 번씨(繁氏), 기씨(錡氏), 번씨(樊氏), 기씨(饑氏), 종규씨(終葵氏)”를 말한다.


    (2) 한국 시씨(施氏) 시조(始祖) 시문용(施文用)


     자는 종록(宗祿)이고 호는 명촌(明村)이다. 명나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윤제(允濟)의 아들로 융경(隆慶 : 명나라 연호) 6년 즉 조선 선조 5년(1572년) 5월 5일 절강성(浙江省)에서 태어났다. 시윤제(施允濟)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 피난)하여 대사간(大司諫) 정곤수(鄭昆壽)를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명나라에 파견하여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병부시랑직(兵部侍郞職)에 있으면서 접반사(接伴使)로서 조선사신(朝鮮使臣)을 맞아 당시 명나라 군권(軍權)을 쥔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도와,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만력제(萬曆帝)인 신종(神宗)를 설득시켜 조선에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4만명 구원병(救援兵)을 파견시켰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군사와 물자를 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이다. 일찍 금의위(錦衣衛)에 발탁되어 벼슬이 도사(都司)에 이르렀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을 맡은 마귀(麻貴)가 6월 명나라 군사 5만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파병되자 황제의 호위와 궁성의 수호를 맡았던 금의위(錦衣衛)에 발탁되었던 시문용(施文用)은 호절병(湖浙兵) 1천명을 이끌고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조선에 진군(進軍)하여 1597년 8월 마귀(麻貴) 제독(提督)과 함께 참전(參戰)하여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을 직산(稷山)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대파하였으며 그 후 울산 도산전투(島山戰鬪)에서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참전한 후 1598년 봄 명나라에서 3만명의 추가 지원병을 거느리고 나온 유격장군(遊擊將軍) 남방위(藍芳威)부대의 유격중군장(遊擊中軍將)으로 참전하여 충주(忠州), 청주(淸州), 보은(報恩), 상주(尙州), 등 각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 때 공은 유격장군(遊擊將軍) 남공방위(藍公芳威)와 함께 합천가야(陜川伽倻) 산하(山下)에서 적을 무찌르는 대공(大功)을 세워 선조대왕께서 공을 위로하는 글인 ‘게서위문(揭書慰問)’을 내렸다. 1597년 울산, 사천, 순천, 수군 사로(四路)로 총공격할 때 공은 진주 사천 선진리성(船津里城) 전투에 참전하였다. 선조 26년(1598년) 2월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鎭下里)에 그의 전공(戰功)을 새긴 마애기(磨崖記)인 ‘동정기(東征記)’를 제독중군(提督中軍) 편갈송(片碣頌)이 글을 짓고 유격중군(遊擊中軍) 시문용(施文用)이 글을 써서 기록하였지만, 현재 풍우(風雨)로 마멸(磨滅)되었다. 선조 32년(1599년) 1월 공은 신병(身病)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선조 35년(1602년) 공의 전공을 포상(褒賞)하여 도사(都司)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그는 군사(軍事)·풍수(風水)·의술(醫術)에 정통하여 광해군 8년(1616년)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을 받아 성지(性智)·김일룡(金日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공이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거지인 도진리에 배가 떠가는 주행형(舟行形)의 터를 보아주었다는 문중일화로 전해온다. 인조 21년(1643년) 졸(卒)하여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 형곡후산(兄谷後山) 성주동(聖主洞) 곤좌(坤坐)에 예장(禮葬)하였다. 영조 17년(1741년)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으로 추증(追贈)되었다. 후손들은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1258(문명1길 198-6)에 풍천재(風泉齋), 성주군 수륜면 보월2리 360(보월로 127)에 모명재(慕明齋).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805(흑수길 61-6)의 염수재(念修齋), 운수면 화암리 291(꽃질1길 46-8)의 내화재(迺華齋)를 세워 그를 추모(追慕)하고 있다. 그리고 고령군 운수면 대평동 흑수(흑수길 61-1)에 별묘(別廟)를 지어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으며 헌종 13년(1847년) 공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인 풍천재(風泉齋) 옆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공의 위적(偉蹟)을 기리고 있다.


    (3) 성산이씨(星山李氏)와 절강시씨(浙江施氏) 사이의 역사적 인연


     시문용(施文用)은 의학과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兵學奇正)』·『감여지남(堪輿指南)』·『의복묘결(醫卜妙訣)』등을 저술하였다. 그에게 병법(兵法)을 배운 대표적인 인물이 이사룡(李士龍)이다. 공의 본관이 성산(星山)이며 자는 사중(士中)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한 공으로 무과(武科)에 올랐던 정건(廷建)의 아들로 광해 4년(1612년)에 태어나 향년 29세 인조 18년(1640년)에 졸(卒)하였다. 공은 인조 18년(1640년) 금주위(錦州衛) 싸움에 청(淸)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우리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자 포수(砲手)로 징발되어 동북 지방의 전투에 출전 하였는데 이듬해의 명(明)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치하고 있다가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여 명군(明軍)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해 그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다. 죽음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의리,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켰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연 탓으로 성산이씨(星山李氏)와 절강시씨(浙江施氏)는 우의가 두텁다. 이사룡(李士龍)은 정조17년(1793)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추증(追贈)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4) 정조실록에 기록된 시문용(施文用) 후손에 대한 예우(禮遇)


    ① 시문용(施文用)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 것이며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토록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전교(傳敎 : 임금이 명령을 내림)하였다.
    ②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시문용(施文用)의 6대손 유영(有榮)과 7대손 한익(漢益)에게 식량을 마련하여 떠나보냈다.
    ③ 증(贈) 참판(參判) 시문용(施文用)의 후손에게 급료를 주며 활쏘기를 권장하게 한 것도 관직을 추증(追贈)하신 거룩한 뜻을 받들어 모시려는 뜻에서 발표된 것인데 역시 제대로 시험을 치르었으니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똑같이 일내(一內)에 직부(直赴)토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註釋1) 일내(一內)
    임금의 호위와 궁중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군대 조직인 내금위(內禁衛)를 말한다.
    (註釋2) 직부(直赴)
    조선 시대에, 권무과(權武科 : 조선시대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무과자격시험)·외방별과(外方別科 : 지방에서 시행한 특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곧바로 무과의 전시(殿試 : 왕이 친히 보이던 과거)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던 일을 말한다.


    (5) 절강시씨(浙江施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절강시씨(浙江施氏)의 현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현재 약 50여 가구가 사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운수면 대평리, 화암리 꽃질마을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① 시유영(施有榮)
    자는 여화(汝華)이고 초휘(初諱)는 한성(漢成)이다. 인택(仁澤)과 상추(尙秋)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영조 12년(1736년) 태어났다. 정조 때 도백(道伯 : 관찰사)이 왕의 뜻에 따라 호송(護送)하여 금군(禁軍)에 예속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賜第)로 벼슬에 나아가 음서(蔭敍)로 선전관(宣傳官)에 발탁되었다. 정조 17년(1793년) 9월 2일 정조실록에 의하면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장계(狀啓)하기를 시문용의 6대손 유영(有榮)과 7대손 한익(漢益)은 식량을 마련하여 떠나보냈습니다."라고 기록하여 조정에서 부조미(扶助米) 즉 늠식(廩食)를 받았다. 일찍이 왕이 환구단(圜丘壇 :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에서 친히 제사지내는 날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다. 순조 4년(1804년) 졸(卒)하였다.
    (註釋1) 사제(賜第)
    임금의 특명(特命)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던 일
    (註釋2) 음서(蔭敍)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敍用)하는 제도이다.


     ② 시유정(施有鼎)
    자는 중삼(衆三)이고 재걸(再杰)과 실감(實鑑)의 따님인 문화류씨(文化柳氏) 사이에서 영조 10년(1734년) 태어났다. 영조 40년(1764년) 충량과(忠良科)에 급제한 후 종6품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냈다. 정조 말(末)에 졸(卒)하였다.
    (註釋) 충량과(忠良科)
    조선 영조 때 실시하였던 특수과거의 하나로써 임진왜란 뒤에 우리 나라로 귀화(歸化)한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과 병자·정묘호란에 척화순절(斥和殉節)한 사람의 자손을 위하여 특별히 실시한 과거로, 영조 40년(1764년)에 처음으로 행하여 동왕 46년과 48년 두 차례 시행되었고, 영조 이후로는 실시되지 않았다가 고종 때에 실시되었다. 


    ③ 시한익(施漢翼)
    자는 사군(四君)이다.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 유정(有鼎)의 아들로 영조 29년(1753년)태어나 삼종숙(三從叔)인 유영(有榮)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정조 17년(1793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訓練院)의 종4품 관직인 훈련첨정(訓鍊僉正)에 제수(除授)되었다. 순조 19년(1819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명촌공(明村公) 휘 문용(文用) 사후(死後) 후손들이 세거하였던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에서 공의 7세손으로 주손(冑孫)인 시치권(施致權)이 정조 20년(1796년)경 가구수가 늘어나고 산세(山勢)가 협소한 선향지(先鄕地)를 떠나 토지가 비옥하고 경지면적이 넓은 운수면 대평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시치황(施致璜)
    자는 경문(景文)이고 호는 괴헌(槐軒)이다. 남익(南翼)과 연택(延宅)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순조 10년(1810년) 태어났다. 문학과 재예가 뛰어났다. 고종 23년(1886년) 졸(卒)하였다.


    ② 시정석(施珽錫)
    자는 성함(聖涵)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치박(致博)과 응중(應中)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순조 13년(1813년) 태어났다. 고종 4년(1867년) 정묘(丁卯)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문학이 우러러 볼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었으며 제행(制行 : 도덕에 맞는 행위)이 탁월하였다. 가난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도(道)를 즐겼으며 유고(遺稿) 1권이 전한다. 고종 14년(1877년) 졸(卒)하였다.


    ③ 시영석(施暎錫)
    자는 성연(聖然)이고 호는 야산(野山)이며 초휘(初諱)는 영석(昤錫)이다. 치박(致博)와 응중(應中)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순조 20년(1820년) 태어나 숙부인 치호(致昊)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아릴 때부터 문장(文章)‧재예(才藝)‧선속(善屬 : 좋은 풍속)‧사부(詞賦)가 향천(鄕薦)에서 으뜸이었다. 고종 22년(1885년) 졸(卒)하였다.
    (註釋1) 사부(詞賦)
    운자(韻字)를 달아 지은 한시(漢詩)의 총칭(總稱)
    (註釋2) 향천(鄕薦)
    지방 수령 등이 그 고을의 유능하고 평판 좋은 유생(儒生) 등을 중앙에 천거하는 일을 말한다.


    ④ 시두석(施斗錫)
    자는 원평(元平)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며 초휘(初諱)는 두일(斗鎰)이다. 처사(處士) 치황(致璜)과 양욱(陽郁)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순조 28년(1828년) 태어났다. 여덟 문장을 잘하였고 자기 몸을 바르게 닦아 수양(修養)함에 있어 단정(端正)하고 아담(雅淡)하여 사우(士友 : 선비들)들이 칭송하였다. 고종 19년(1882년) 졸(卒)하였다.


    ⑤ 시윤용(施潤龍)
    자는 재현(在顯)이고 호는 회당(晦堂)이다. 처사(處士) 정석(珽錫)과 준운(俊運)의 따님인 의인(宜人)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헌종 9년(1843년) 태어났다. 타고난 기품(氣稟)이 고매(高邁)하고 능히 가학(家學)을 잘 이었으며 조상을 받드는 도리(道理)가 있어 종중에서 마음속 깊이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1913년 졸(卒)하였다.


    ⑥ 시민식(施敏植)
    자는 상군(嘗君)이고 호는 포산(葡山)이다. 처사(處士) 윤용(潤龍)과 광효(光孝)의 따님인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고종 1년(1864년) 태어났다. 고종 29년(1892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고종 32년(1895년) 관제개혁(官制改革) 때 종래의 통례원(通禮院)이 담당하던 궁중의식(宮中儀式)·조회의례(朝會儀禮)뿐만 아니라 예조(禮曹)에서 장악하고 있던 제사와 모든 능·종실·귀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인 장예원(掌禮院)의 주사(主事)를 지냈다. 1915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인물
    ① 시명선(施明善 1937년) : (주) 강림중공업 회장
    ② 시병호(施炳鎬 1939년) : 대구, 부산 소년원 원장, 보호 서기관
    ③ 시병석(施炳奭 1941년) : 대구광역시 북구의회 구의원
    ④ 시재기(施在基 1942년) : 절강시씨 대종회 회장
    ⑤ 시희준(施禧埈 1950년) : 대구광역시 달서구의회 구의원
    ⑥ 시경준(施慶埈 1952년) : 임상의학박사
    ⑦ 시  현(施  賢 1954년) : 종손, 국세청 공무원, 위선 및 숭모정신 투철
    ⑧ 시대복(施大福 1959년) : 포스코건설 전무
    ⑨ 시진철(施鎭哲 1967년) : 1990년 북경 아시아올림픽 레스링 금메달리스트
    ⑩ 시문한(施文漢 1984년) : 54회 사법고시 합격, 법무법인 시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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