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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배씨(星州裵氏) 찰방공파(察訪公派)

기사입력 2019.08.3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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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계정(합천군 야로면 명덕길145)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성주배씨(星州裵氏) 찰방공파(察訪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지타(祗沱)로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촌 중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으로 다른 5부 촌장(村長)들과 함께 기원전 57년 갑자년(甲子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 초대(初代) 왕(王)으로 추대(推戴)한 공(功)으로 신라개국좌명원훈공신(新羅開國佐命元勳功臣)이 되었으며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올랐다. 유리왕 9년(32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이 한지부(漢祗部)로 개칭(改稱)되었고 배씨(裵氏)를 사성(賜姓)받게 되면서 모든 배씨(裵氏)의 시원(始原)이 되어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배지타(裵祗沱)에 연원을 두며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세거지(世居地)와 선조(先祖)의 작호(爵號)를 따라 경주배씨(慶州裵氏)에서 분성(盆城), 성주(星州),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등으로 분관(分貫)하였다.


    (2)경주배씨(慶州裵氏)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


    초명은 백옥삼(白玉衫)이며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다.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膽力)이 있어 벼슬이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弓裔)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조(太祖) 즉위 후 1등공신이 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고려가 도읍을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길 때 개주도체찰사(開州都體察使)가 되어 새 서울 건설에 큰 업적을 세웠고 벼슬은 대상행이조상서겸(大相行吏曹尙書兼) 순군부령도통병마대장(徇軍部令都統兵馬大將)에 이르렀다. 태조 19년(936년) 졸(卒)하였다. 성종 13년(994년)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어 태조묘(太祖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다. 그 뒤 마전(麻田 : 지금의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崇義殿), 평산(平山)의 태사사(太師祠),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신라 6부 촌장 중 하나인 배지타(裵祗沱) 이후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건국공신(建國功臣)인 배현경(裵玄慶)을 모든 배씨의 중시조(中始祖)로 삼아서 세계를 잇고 있다


    (3)성주배씨(星州裵氏) 시조(始祖) 배위준(裵位俊)


    태사(太師)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이후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중엽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을 지낸 배위준(裵位俊)을 성주배씨(星州裵氏)의 시조(始祖)로 모신다.


    (4)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


    ①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서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② 성주배씨(星州裵氏)는 신라 개국(開國) 원훈(元勳 : 나라를 위한 가장 큰공 ) 시조(始祖) 배지타(裵祗沱)와 고려 개국 원훈(元勳) 중시조(中始祖) 배현경(裵玄慶)의 뒤를 이어 조선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으로 인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칭(稱)을 받게 되었다.


    (5) 성주배씨(星州裵氏) 분파(分派)


    5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아들 6세 배문적(裵文迪), 배무적(裵武迪) 형제로 갈리어져 크게 번창하였으며, 6세 배문적(裵文迪)의 후손인 9세 배규(裵規)의 화당공파(花堂公派), 배구(裵矩)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배현(裵俔)의 진사공파(進士公派), 배유(裵裕)의 녹야당공파(綠野堂公派), 12세 배신(裵紳)의 낙천공파(洛川公派), 6세 배무적(裵武迪)의 후손인 11세 배극렴(裵克廉)의 정절공파(貞節公派), 배극명(裵克明)의 미은공파(薇隱公派)로 크게 분파(分派) 되었다.
    (6) 성주배씨(星州裵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주배씨는 123가구 31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낸 배선보(裵善輔)의 후손은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배번(裵藩)의 후손은 덕곡면 본리리 승암(承巖)마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던 배즙(裵楫)의 후손은 덕곡면 노2리 서유재마을에, 진사(進士) 낙천(洛川) 배신(裵紳)의 후손은 개진면 인안2리에 세거하고 있다. 그밖에 배윤조(裵胤遭)의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배문회(裵文繪)의 후손은 운수면 화암리에, 배환극(裵煥克)의 후손은 운수면 월산리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배인경(裵仁慶)
    좌복야(左僕寺) 배원서(裵元舒)의 아들이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선임되었는데, 숭문전(崇文殿)에서 임금을 모시고 숭문전 첨지(僉知) 신맹섭(申孟攝), 승선(承宣) 김구락(金九洛), 기거주(起居注) 이당진(李唐珍), 사업(司業) 박규두(朴奎斗) 등과 더불어 홍범(洪範)과 예기(禮記), 월령(月令)과 중용(中庸)을 강의(講義)하였는데 공의 해석이 매우 정밀하다하여 임금이 금 이십냥과 비단 열필을 하사하니 그때 공의 나이가 28세였다.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충렬왕(忠烈王) 어전에서 왕명(王命)으로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충선왕(忠宣王)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러 공이 연로하므로 사직(辭職)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충선왕이 이르기를 “경은 누대에 걸친 공신(功臣)의 자손(子孫)이고, 또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은 노신으로서 지금 어찌하여 짐을 멀리하려 하는가.” 하고 궤장(几杖 :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공이 다시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마지못해 이를 윤허(允許)하고 공(公)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 흥안은 성주의 옛 지명)에 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緣由)로 성주(성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던 수관조(受貫祖 : 관향을 받은 조상)이다. 후손들은 재실인 흥덕재(興德齋)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유업(遺業)을 추모하고 있다.
    ② 배문적(裵文迪)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려 후기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軍事機密)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인 추밀원(樞密院)의 종2품 관직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③ 배진손(裵晉孫)
    추밀원사(樞密院事) 배용성(裵用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려(士麗)이고 호는 아당(我堂)이다. 중현대부(中顯大夫) 지평해군사(知平海郡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④ 배규(裵規)
    자는 중원(仲員)이며 공조판서(工曹判書) 진손(晉孫)과 현감(縣監) 중화(中和)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고 사림(士林)들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우왕 3년(137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후 우왕 8년(1382년) 문과에 합격하여 지군사(知郡事)·독서당(讀書堂) 한림(翰林)·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세종 때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승진되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註釋) 관서부자(關西夫子)
    원래 중국 후한(後漢) 때의 양진(楊震)을 가리킨다. 양진은 성품이 몹시 청렴결백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 특히 밝아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칭하였다. 배규(裵規)를 양진(楊震)에 빗대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2) 조선시대


    ① 배한(裵閑)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규(規)와 우대언(右代言) 승득(承得)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4년(141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한 후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 1년(1419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세종 16년(1434년)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이 되어 시를 지으니 한 때에 전송(傳誦 : 입으로 전하여 욈)되었다고 한다.

    院吏來傳頂玉淸(원리내전정옥청)
    사간원(司諫院) 서리(胥吏)는 관리들 청렴하다 하고
    鷄塒牛巷便生命(계시우항편생명)
    닭장과 소 다니는 거리 밝아 오는구나
    家君舍弟曾經此(가군사제증경차)
    아버님과 동생도 이곳에서 벼슬하여
    壁上題三父子名(벽상제삼부자명)
    삼부자 이름이 벽 위에 나란하네

    ② 배윤(裵閏)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규(規)와 우대언(右代言) 승득(承得)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1년(1411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경승부(敬承府)의 승(承)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태종 14년(141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전형(銓衡)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업무을 관장할 때 김숭(金崇)를 추천한 일로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탄핵(彈劾)을 받았다. 그 뒤 태종 17년(1417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세종 4년(142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세종 4년(1422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985년 발간된 성주배씨(星州裵氏) 세보(世譜) 기록 중 배선보(裵善輔)의 방주(傍註)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지낸 배선보(裵善輔)가 당쟁으로 인한 화를 피하여 선향지(先鄕地)인 성주 금원(琴院)에서 학동(鶴洞)으로 이거(移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自星州琴院移居鶴洞).”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면 선고(先考) 직강공(直講公) 윤겸(允謙)이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와 내외종지간(內外從之間)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단종 1년(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자 인척(姻戚)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외가(外家)인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 학동으로 입향(入鄕)하여 성주배씨(星州裵氏) 찰방공파(察訪公派)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참고적으로 배선보(裵善輔)의 어머니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내고 세조 2년(1456년)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 시입(始入)하여 양천최씨(陽川崔氏)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가 되신 최적(崔績)의 따님이다. 따라서 성주배씨(星州裵氏) 찰방공파(察訪公派)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 배선보(裵善輔)의 고령 입향시기는 1490년경 이후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배선보(裵善輔)
    자는 성원(聖元)이고 호는 회은(晦隱)이다.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윤겸(允謙)과 선략장군(宣略將軍) 적(績)의 따님 양천최씨(陽川崔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우(孝友)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을 거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지냈으며 당쟁으로 인한 화(禍)가 그치지 않아 벼슬길에 다시 나아갈 뜻을 접고 전원(田園)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었다.
    ② 배은(裵垠)
    자는 자호(子浩)이며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선보(善輔)와 직장(直長) 소(紹)의 따님인 야성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성종 14년(1483년) 태어났다.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고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와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냈다.
    ③ 배진경(裵振經)
    자는 박옥(璞玉)이고 호는 막재(幕齋)이다.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 은(垠)과 숙인(淑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5년(1510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인효(仁孝)의 지성(至誠)이 있었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슬퍼함)함이 예의에 지나쳤으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을 지냈다.
    ④ 배진서(裵振緖)
    자는 성옥(聲玉)·경승(景承)이고 호는 송강(松岡)이다.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 은(垠)과 숙인(淑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효행(孝行)과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로 벼슬길에 나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황주목사(黃洲牧使)를 지냈다. 고을을 다스림에 청간(淸簡 : 성품이 깨끗하고 곧음)과 애민(愛民)을 우선하였다. 흉년에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 : 도와줌)하니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가난과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를 입었다.
    ⑤ 배준(裵埈)
    자는 백고(伯高)·여첨(汝瞻)이고 호는 묵암(默庵)이다. 참봉(參奉) 진경(振經)과 참봉(參奉) 당(瑭)의 따님인 의인(宜人) 포산곽씨(苞山郭氏) 사이에서 중종 37년(1542년) 태어났다. 유일(遺逸)로 장사랑(將仕郞) 훈도(訓導)를 지내고 여러 관직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당대의 명사(名士)인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예곡(禮谷) 곽율(郭),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⑥ 배병한(裵炳翰)
    초휘(初諱)는 욱(煜)이며 자는 여란(汝鸞)이고, 호는 의암(宜庵)이다.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를 지낸 영근(榮根)과 학문(翯文)의 따님인 양천최씨(陽川崔氏)와의 사이에서 고종 19년(1882년) 3월 3일 고령군 쌍림면 학동(鶴洞)에서 태어났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더 널리 배우고자 하여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와 회당(張晦堂) 장석영(張錫英) 두 선생에게서 사사(師事) 받았다. 또 동향(同鄕) 출신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만송(晩松) 한남교(韓南敎) 등과 교유하였다. 사서(四書)를 곁에 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에 전념하면서, 학문은 마음과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장(詞章)에 힘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3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자료제공 : 후손 배동수(裵東洙)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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