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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도씨(星州都氏) 청송당공파(靑松堂公派)

기사입력 2019.05.0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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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회재(쌍림면 매촌리 226-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수성시조(受姓始祖) 도계(都稽)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수성시조(受姓始祖)는 휘 계(稽)이다. 남월(南越)의 재상(宰相) 여가(呂嘉)와 남월의 왕 건덕(建德)이 함께 한나라 황제를 거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휘 계(稽)가 이를 토평(討平)하고 여가(呂嘉)를 잡은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도씨(都氏) 성(姓)이므로 도계(都稽)를 수성시조(受姓始祖)로 삼았다.


    (2) 도계(都稽)의 후손 중 기세전(起世前) 상세(上世 : 윗대)
    ① 휘 조(祖)는 기원전 20년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을 도와 나라를 바르게 다스렸다.
    ② 휘 미(彌)는 서기 160년 전후 개루왕(蓋婁王)을 보좌하였다. 그 처가 아름답고 정절이 굳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동침을 강요했다가 실패하자 남편의 눈알을 빼고 작은 배에 띄워보냈다. 궁을 탈출한 공의 처가 남편을 만나 고구려로 들어가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동방열녀(東邦烈女)의 최초 표상(表象)이 된 부인의 정절(貞節)을 기리고 후세에 본받게 하기위해 보령시 오천에 도미(都彌) 부인의 사당(祠堂)인 정절사(貞節祠)를 세웠다.
    ③ 휘 유(儒)는 서기 650년 전후로 진덕왕(眞德王)부터 문무왕(文武王)까지 좌장(左將)으로서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
    ④ 휘 진(陳)은 고려 태조를 보좌한 공으로 칠곡부원군(七谷府院君 또는 星山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식채(食埰) 800경(頃 : 약 37만평)을 내렸다.


    (3) 기세시조(起世始祖)
    ① 휘 순(順)은 고려 중엽 문관(文官)의 선발과 훈로(勳勞 : 공훈)가 있는 사람의 표창(表彰)과 책봉(冊封) 등 인사(人事)에 관한 어부를 보는 전리사(典理司)의 정3품 벼슬인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
    ② 도씨(都氏)의 웟대가 몹시 오래되고 세계(世系 :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가 연속되지 않아 휘 순(順)으로부터 세대를 시작(起世)한다. 즉 휘 순(順)을 기세조(起世祖), 즉 1세조로 삼는다.
    ③ 따라서 도씨(都氏) 성(姓)을 하사받은 수성시조(受姓始祖)는 휘 계(稽)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세계(世系)가 명확한 휘 순(順)을 시조(始祖)로 한다.
    (4) 성주도씨(星州都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주도씨 28가구 85명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주도씨 청송당공파(靑松堂公派) 중 일회헌공(一悔軒公) 도우룡(都右龍) 후손은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 합가2리에 세거하였으며 1856년 대구 서촌(西村)으로부터 이거한 낙음공파(洛陰公派) 도수덕(都修德)의 후손은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 예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도충박(都忠朴)
    일명(一名) 생주(生柱)이고 자는 순인(純仁)이다.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낸 순(順)의 아들로 희종 1년(1205년) 태어났다.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으며 왕조사직(王朝社稷)을 굳건히 도우시고 백성에게는 넓고 깊게 베풀었다고 한다. 원종 9년(1268년) 졸(卒)하였다. 묘는 연일군 송라면 지경리 다라산 신좌(辛坐 )에 있다.
    ② 도길부(都吉敷)
    문하시중(門下侍中) 홍정(洪正)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왕 6년(1380년) 8월 남원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성계(李成桂)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 都巡察使)로 삼고 변안열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으며,왕복명(王福命)·우인열(禹仁烈)·도길부(都吉敷)·박임종(朴林宗)·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및 태조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 등을 8원수(元帥)로 삼아 남원 운봉(雲峰) 황산하(荒山下)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치니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하였다. 공은 왜구 토벌의 전공으로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하여 졌다. 조선 선조 10년(1577년) 남원시(南原市) 운봉면(雲峰面) 화수리(花修里)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파비(破碑)되었다. 1991년 검은 대리석으로 원형과 똑같은 비를 다시 만들어 세웠다. 공은 우왕 9년(1383년) 정방제조(政房提調)에 올랐고 우왕 10년(1384년)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임명되었다. 우왕 14년(1388년)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로 재임 중 무진피화(戊辰被禍)로 졸(卒)하였다.
    (주석) 무진피화(戊辰被禍)
    우왕 14년(1388년) 무진년 정월 우왕(禑王)의 명을 받은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이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을 숙청한 사건이다.

    (2) 조선시대
    ① 도응(都鷹)
    초명(初名)은 유(兪)이고 자는 자예(子藝)이며 호는 노은(魯隱)이고 태조의 사호(賜號) 청송당(靑松堂)이다.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낸 길부(吉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죽마지우(竹馬之友)로서 고려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무진피화(戊辰被禍) 이후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충북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은거(隱居)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가 옛 정을 생각하여 벼슬길에 나와달라고 왕지(王旨 : 교지)로써 초빙(招聘)하였으나 다섯 차례 소명(召命)을 모두 거절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태조는 공(公)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를 아름답다고 여겨 비단에 청송당(靑松堂)이라 써서 사호(賜號) : 임금이 호를 내림)하고 절구시(絶句詩)를 하사하였다. 태조가 공에게 내린 왕지(王旨) 4점과 녹패(祿牌 : 녹봉을 받는 벼슬아치에게 증표로 주는 패) 1점이 남아 있는데,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 공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遺臣) 72인 즉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으로 그들과 함께 망복(罔僕)의 절개를 굳게 지켰다.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不朝峴)의 유래를 듣고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절의를 기려서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고 어필(御筆)로 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워주었고 그 자손을 벼슬아치로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성주의 운천서원(雲川書院), 장성의 경현사(景賢祠), 개성의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충남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쌍유형(双乳形) 좌혈(左穴) 유좌(酉坐)이다.
    (註釋1) 부조현(不朝峴)
    조선이 창업된 뒤, 태조가 개성에서 과거를 베풀었을 때에, 고려에 충성하는 많은 사족(士族)들이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고 모두 개성시 경덕궁(敬德宮) 앞의 북쪽 고개에 갓을 걸어 놓고 이 고개를 넘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註釋2) 망복(罔僕)
    전왕조(前王朝)에 대한 충성의 이념으로 신왕조(新王朝)에 나가 그 신하가 되지 않는 절조(節操 : 지조와 절개)를 말한다.
    ② 도덕택(都德澤)
    자는 여급(汝及)이고 호는 여남(旅南)이다. 선교량(宣敎郞)·밀양교수(密陽敎授)를 지낸 응룡(應龍)의 아들로 선조 34년(1601년) 태어났다. 문학과 행실로 당세에 추중(推重)되었으며, 인조 14년(1636년) 3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 되었다. 홍주(洪州)에서 인동(仁同) 장곡(長谷)으로 이거하여 칠곡군 석적읍의 성주도씨 입향조가 되었다. 현종 8년(1667년) 졸(卒)하였다. 묘는 인동 장곡에 있다. 공의 문행(文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칠곡군 석적읍 남율리에 여남재(旅南齋)를 건립하였다.
    ③ 도명정(都命鼎)
    자는 창백(昌伯)이고 호는 사희와(四噫窩)이다. 처사(處士) 성중(聖中)의 아들로영조 12년(1736년) 태어났다. 문장이 탁월하여 그 명성(名聲)과 칭예(稱譽)가 일찍이 두드러졌으며 향시(鄕試)와 경시(京試)에서 여러 번 장원(壯元)을 하였다. 당시에 논(論)하기를 시(詩)에 있어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진수(眞髓)를 터득하였고 필(筆)에 있어서는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신기(神奇)를 본받았다. 일찍이 초야(草野)에 묻혀 덕(德)을 숨겨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은거(隱居)하였으나 문하(門下)에 공을 추앙(推仰)하는 재사(才士)가 많았다. 순조 15년(1815년) 졸(卒)하였다. 묘는 군위군 고로면 괴산2동 구명돌골짝 정답평 유좌(酉坐)이다.
    ④ 도대주(都大籌)
    초휘(初諱)는 유락(維洛)이고 자는 경완(景完)이며 호는 겸와(慊窩)이다. 송죽헌(松竹軒) 석후(錫垕)의 아들로 영조 51년(1775년) 태어났다. 공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다른 이름(異稱)이 많았다. 동서(東西)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을 널리 읽고 그 내용(內容)을 잘 기억(記憶)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비범한 재질(才質)이 있었다. 장성하여서는 문장에 나타난 말이 날로 크게 진보하여 향시(鄕試)에 여러번 입격(入格)하였으며 당세(當世)에 명망(名望)이 높았으니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널리 퍼져 오르내린다. 순조 29년(1829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상합가동 삼학산 우록 묘좌(卯坐)에 있다.
    ⑤ 도우룡(都右龍)
    자는 운오(雲五)이고 호는 일회헌(一悔軒)이다. 학생(學生) 진귀(鎭龜)의 아들로 헌종 4년(1838년) 군위군 의흥면 파전리에서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재기(才氣)가 영리하니 동학선배(同學先輩)가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10살이 되기 전에 문사(文辭)를 크게 이루었고 군(郡)에서 치르는 시험(郡試)인 군시(郡試)와 부(府)에서 선비를 선발하는 부선(府選)에서 번번이 장원(壯元)하였다. 철종 12년(1861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 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및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외세의 침입으로 정국(政局)이 혼미(昏迷)하자 성균관의 생활을 거두고 환향(還鄕)하였다. 53세가 되던 고종 27년(1890년)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장과 덕행이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고종 31년(1894년) 동학(東學)의 소요(騷擾)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자 합천군 가야면 숭산(崇山)에 우거(寓居)하며 강도(講道)에 힘써 문하에 어진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소학당(小學堂)에서 향약(鄕約)을 마련하고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에 의거 덕업(德業)을 권장하고 과실(過失)을 규제하며 예속(禮俗)을 상교(相交)하고 환난(患難)을 구휼(救恤)하는 등 각종 조문(條文)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사농계(士農契)’의 결사(結社)를 주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생업을 평안하게 하니 산골짝 사람이 옛날과 같이 순화(順化)되어 안심하였다. 1906년 졸(卒)하였다. 1910년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서문을 찬(撰)하고 회산(晦山) 박태영(朴泰瑩)이 발문을 찬한 일회헌문집(一悔軒文集)을 아들 도상주(都相湊)가 발간하였다. 1963년 공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 226-2번지에 경회재(景悔齋)를 건립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고종 31년(1894년)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 일명 동학난)이 일어나자 군위군 의흥면에서 살던 도우룡(都右龍)이 난을 피하여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大田里) 노른재(黃嶺)으로 이거한 후 숭산(崇山)으로 이사하였다.
    (2) 공이 1906년 졸(卒)하자 장남인 도상주(都相湊)가 합천군 가야면 숭산(崇山)에서 고령군 쌍림면 상합가동(上合伽洞)으로 이거(移居)하여 고령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도상주(都相湊)
    자는 수경(水卿)이며 호는 서암(棲岩)이다. 진사(進士) 우룡(右龍)의 장남으로 철종 9년(1858년) 태어났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이어받고 만년(晩年)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문하에 유학(遊學)하여 학문의 대가(大家)로 성장하였다. 부모의 병환(病患)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고(斷指注血) 단을 쌓고 북두칠성에 부모의 병환이 완쾌되기를 빌었으며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날마다 묘에 나아가 애례(哀禮)를 다하였다. 후진양성을 위하여 강업(講業)을 더욱 돈독히 하니 고을에서 존경하는 사표(師表)가 되었다. 문집인 서암유고(棲岩遺稿)가 전하며 성주도씨 일회헌공파(一悔軒公派)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이다. 1917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 율림곡(栗林谷) 내등(內嶝) 경좌(庚坐)이다.
    ② 도상윤(都相尹)
    자는 형보(衡甫)이며 호는 서산(棲山)이다. 진사(進士) 우룡(右龍)의 차남으로 철종 10년(1859년)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굳세며 용의(容儀)가 삼가 훌륭하였으며 학문에 전심(專心)하였다. 백형 서암(棲岩) 상주(相湊)와 함께 부친의 명에 따라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문하에 수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국권(國權)이 상실됨에 따라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고 노태산(魯泰山) 깊은 곳에 소연(小椽 : 작은 서까래)을 세워 ‘노동(魯東)’이라 편액(扁額)하였으니 이는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를 밟고 건너갔다는 뜻에서 취(取)한 바이다. 유집(遺集)이 있다. 1940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상가곡촌 합가2리 산 137의1번지 후학당산 중등(中嶝) 임좌(壬坐)에 있다.
    ③ 도한열(都漢烈)
    자는 성무(聖武)이고 호는 묵암(菴)이다. 서산(棲山) 상윤(相尹)의 장남으로 고종 28년(1891년) 태어났다. 백부(伯父) 서암공(棲岩公) 상주(相湊)에게 수업하고 회산(晦山) 박태영(朴泰瑩)과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선생의 문하에서 사사(師事)를 받아 문망(文望)이 사림에서 빼어났다. 묵암문집(菴文集)이 있으며 1959년 졸(卒)하였다. 묘는 선고(先考) 조하(兆下) 임좌(壬坐)에 있다.

    5. 근·현대인물
    ① 도영섭(都永燮 : 1894년) 고령향교 전교
    ② 도주열(都周烈 : 1896년) 성주도씨 청송당공파 문중 대표
    ③ 도재영(都載英 : 1912년) 대구 동부극장·중앙극장 창건 대표
    ④ 도재일(都載一 : 1931년) 국제전선, 신양상선, 신진전자 대표이사
    ⑤ 도재철(都載喆 : 1934년) 영남대학교 약학대학장, 성주도씨 대종회 회장, 고령군지 집필 및 편찬위원
    ⑥ 도재범(都載範 : 1942년) 이학박사,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구실장
    ⑦ 도재욱(都載旭: 1946년) 계명대 의대 교수, 경영학박사, 하나종합 내과원장, 국제로타리 3700지구총재  
    ⑧ 도기탁(都璣鐸 : 1941년) 매일약국 대표약사
    ⑨ 도남탁(都南鐸 : 1952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대외협력실장
    ⑩ 도성탁(都聖鐸 : 1956년) 이학박사, 대구보건대학교 교수, 대한의생명과학회 자문의원
    ⑪ 도기문(都淇文 : 1960년) 남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⑫ 도희경(都熙卿 : 1963년) 미금치과 원장
    ⑬ 도영록(都泳錄 : 1968년) 의학박사,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⑭ 도홍직(都泓直 : 1971년) 신경외과 전문의, 참조은병원원장
    ⑮ 도소희(都昭希 : 1974년) 미국 워싱톤대학교 박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⑯ 도형록(都炯錄 : 1976년) 공학박사, 미국 노틀담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기계항공학부 교수
    ⑰ 도연정(都姸廷 : 1976년) 건축학박사, 세종대 겸임 교수
    ⑱ 도현규(都賢奎 : 1978년) 경영학박사, 경희대 경영대학원 및 성균관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스타트업 엑설러레이트 프라이온(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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