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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 배향(配享) 매림서원(梅林書院)

기사입력 2019.04.2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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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림서원(쌍림면 송림2길 54-7)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서원의 연혁(沿革)

    (1) 조선시대 서원은 사림(士林)의 교육(敎育)·교화(敎化)기구인 동시에 대표적인 향촌운영기구이다. 서원(書院)은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강학(講學)이 일차적 목적이었지만 학덕(學德)이 많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존현(尊賢) 또한 중요한 기능이었다.


    (2) 따라서 숙종 33년(1707년)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과 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고종 5년(1868년) 훼철(毁撤)되어 매림재(梅林齋)로 존속하였다. 그 뒤 본손(本孫)인 현풍곽씨(玄風郭氏)·고창오씨(高敞吳氏)와 세의후예(世誼後裔)가 정성을 모아 1984년 고령군 쌍림면 송림2길 54-7에 매림서원 복원(復院)하여 매년 봄 음력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2. 경내 건물 및 향사일

    서원내 건물은 입구 누각의 명칭인 풍방루(風樓), 본채 건물 입구인 구도문(求道門), 서재(西齋), 동재(東齋),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묘우(廟宇)로 통하는 여현문(如見門), 묘우(廟宇)인 숭경사(崇敬祠), 정자인 팔각정(八角亭) 등 8동(棟)이며 연면적(延面積) 237.73m2, 토지면적 6,565m2으로 지역내 현존하는 7개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서원이다.

    3. 곽수강(郭壽岡)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진옹(鎭翁)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홍점(鴻漸)과 서적(徐迪)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해군 11년(1619년) 7월 4일 외가인 합천 서틈촌(西闖村)에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나 ‘포산오현지일(苞山五賢之一)’로 일컬어지며 임진왜란 때 창의토적(倡義討賊)하여 경상도 강우지역(江右地域)을 온전히 보전케 한 예곡(禮谷) 곽율(郭)의 증손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8세에『사략(史略)』을 읽고 서계(書契) 이전의 인황씨(人皇氏) 등의 세대(世代)와 년수(年數) 및 그 때의 국도(國都)들은 도저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고 인식하여 선생에게 질문하였고, 12세에『소학(小學)』을 읽고는 사람을 만드는 양서(良書)라고 감탄하였다. 15세 때에 성리(性理)와 천리(天理) 및 오행(五行) 등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대한「천인감응(天人感應)」이란 설(說)을 지었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였다. 인조 26년(1648년) 부친인 장사랑공(將仕郞公)의 임종(臨終)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리우니 조금 갱생(更生)하였고 부상(父喪) 대상전(大祥前)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하는 등 효성이 극진하였다. 효종 5년(1654년) 식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후 백패(白牌)를 가묘(家廟)와 묘전(墓前)에 올리고 통곡하였다. 사위 월촌(月村) 이익량(李翊亮)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고 토론하면서 교유하였으며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계헌(戒軒) 배일장(裵一長) 등 당대의 명사(名士)와 사귀면서 자신을 낮추어 같은 무리로 대하며 존경하는 예를 표하고 반평생을 경의(敬義)의 진리를 실천하였다. 효종 9년(165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경의(經義)의 연구에 몰두(沒頭)하니 동료들이 모두 스승으로 대접하였다. 하루는 대사성(大司成)이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으고 성균관에 와서『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하게 되자, 그 질문에 잘 응답하여 ‘진유(眞儒)’라고 하며 여러 유생(儒生)들이 참다운 스승을 얻었다고 하였다. 1659년 효종(孝宗) 승하(昇遐)로 군신일여(君臣一如)의 의리(義理)로 5개월간 소식(蔬食)하였다. 대과(大科)의 응시(應試)에 앞서 객지에서 병을 얻어 현종 1년(1660년) 5월 11일 향년 42세로 요절(夭折)하였다. 양천인(陽川人) 월계(月溪) 최형망(崔衡望)을 제자로 두었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전(菊田) 뒤 금점곡(金店谷) 신좌(辛坐)에 있다. 저서로는『매헌문집』이 있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행장(行狀)을 짓고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만사(輓詞)를 지었다. 배위는 충의위(忠義衛)를 지낸 육(毓)의 따님인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4. 오선기(吳善基)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경부(慶夫)이고 호는 한계(寒溪)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익전(益)과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익(翊)의 따님인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인조 8년(1630년) 영천(榮川) 초곡리(草谷里) 즉 현재 영주시 조암동 옛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릴 때부터 단계(丹溪) 장용우(張龍遇)와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선생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학업을 닦았다. 공은 성품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즐겁게 지내고 외모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며 안으로 스스로 몸을 정하게 하고 스스로 삼가하며 종일토록 방 안에 단정히 앉아서 게으른 기운을 언동(言動)에 나타내지 않으며 부모를 섬김에 효행(孝行)으로 봉양(奉養)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였다. 부모님이 병환(病患)에 계실 때 꿩고기를 원함에 꿩이 날아서 스스로 부엌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효성(孝誠)에 감응(感應)한 것이라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는데 죽을 마시고 4년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였다. 젊었을 때 과거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였으며 필법(筆法) 역시 훌륭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를 여읜 후에는 일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구담지상(龜潭之上) 즉 현재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재동 서재골에 ‘한계정사(寒溪精舍)’를 축조(築造)하고 은거독서(隱居讀書) 하면서 규달(閨 : 안채의 방)에서 행의(行義)를 닦았다. 후진양성에도 매진(邁進)하여 공부를 배우러 오는 선비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모두 나아가 예를 올리며 ‘오공자(吳孔子)로 지칭하였다. 한계선생문집(寒溪先生文集)에 만사(輓詞)를 지은 문인은 매암(梅庵) 김시사(金是泗), 상위당(相違堂) 김세명(金世鳴), 정익호(鄭翼鎬), 정종호(鄭宗鎬)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제자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의 명성(名聲)을 듣고 고령현감 남궁 억(南宮 億)과 구문유(具文遊)가 찾아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자리에 누워 식자(識者 : 학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개탄(慨嘆)하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항시 성리서(性理書),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이 놓여 있었고, 근독잠(謹獨箴)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 깨우침을 삼았다. 당대의 석학(碩學)들이었던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금강(錦江) 장신(張), 농암(聾巖) 이광언(李光彦)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숙종 29년(1703년) 1월 16일 고령의 우사(寓舍)에서 졸(卒)하였다. 역책(易 : 임종)하는 날인 야로(冶爐) 장날에 모인 사람들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놀라며 오공자(吳孔子)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미친 감화(感化)가 깊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뒤편 술좌(戌座)이다. 배위는 직장(直長)을 지낸 대적(大適)의 따님인 진주강씨(晋州姜氏)이다. 저서로는『소학(小學)』의 어려운 문구를 한글로 풀어서 해석한 글인 소학석의(小學釋義), 한계문집(寒溪文集) 등이 있다.  

    5. 매림서원(梅林書院) 상량문(上樑文)

    영남의 70개 고을은 본래부터 전적(典籍 : 책)과 명현(名賢)이 많은 곳이라. 신라, 고려 수천 년 전부터 예악(禮樂)의 본 고장이 되었다. 이 오교(五敎)는 팔조목(八條目)의 교화(敎化)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대현(大賢)과 석학(碩學)들이 도학(道學)으로서 향기를 남기니 명공거경(名公巨卿)이 공업(功業)으로 말미암아 제향(祭享)을 하고 효자, 충신, 청사(淸士)들도 거의 영성의열(英聲義烈)로 백성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는 성화(聖化)의 작흥(作興)이라. 현풍과 고령 이군(二郡)의 아름다운 전통은 양현(兩賢)의 유풍(遺風)이 있음이로다. 매헌(梅軒) 곽선생(郭先生)은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오는 정충(精忠)을 이어받아 온갖 행실을 순직하고 참되게 실천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숙(私淑)하여 어릴 때부터 사소한 예절을 알았고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와 사귀어 반평생을 경의(敬義)의 진리를 실천하였다. 일찍 천인(天人)의 도(道)를 15세에 정밀하게 그 이치(理致)를 거의 밝히니 사유(師儒)들이 재삼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이는 효제(孝悌) 중에서 나온 순실(醇實)함이요 호화찬란함이 아니었도다. 독실한 학문은 연구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도덕을 숭상하는 선배들의 기적(記蹟)과 추모(追慕)하는 후생(後生)들이 제향(祭享)의 예절을 외치었도다. 한계(寒溪) 오선생(吳先生)은 이름난 조상과 어진 아버지의 유업(遺業)을 이어 받고 엄한 스승과 유익한 벗이 서로 도움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니 장중(張仲)의 효우(孝友)를 갈고 닦았으며 집안을 바로잡는 것에 법도(法道)가 있었다. 임곡(林谷) 임진부(林眞)의 감화(感化)로 모범이 되었으며 위태롭고 은미한 이치의 말을 외워서 스스로 밝게 분변(分辨)하는 것을 증험(證驗)하였고 구용구사(九容九思)의 제목을 써서 걸어 학문을 처음으로 배울때 공부에 도움을 주고 만년에 임천(林泉) 수석(水石) 아름다운 곳에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하고 학문을 익히고 닦으면서 쉬는 곳으로 삼으니 노봉(蘆峯)과 여산(廬山)에는 주회옹(朱晦翁) 즉 주희(朱熹)와 주무숙(周茂叔) 즉 주돈이(周敦)가 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고, 모령(茅嶺)과 동강(桐江)에서 도정백(陶貞白)과 엄자릉(嚴子陵)같은 신선(神仙)의 자취를 사모하였다. 이 두 선생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기상(氣像)도 또한 유사(類似)하여 함께 제사를 올린다. 옛 터가 쓸쓸하니 길손이 몇 번이나 손으로 가르쳤던고. 남긴 향기가 더욱 나타나니 향리(鄕里)에서도 애석하게 여겼다. 다만 세상일이 복잡다단하고 미처 여가를 얻지 못하여 향사(享祀)를 못하였다가 이제사 공평한 의론이 백년도 못되어 정하여지니 어찌 때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가 온 힘을 합하여 따라 행하니 대개 기다림이 있음이라. 터를 찾아 닦아서 처음 삼간(三間) 규모로 집을 지으니 한적하고 그윽하며 바라보는 먼 산봉우리들이 아름답도다. 일행(一行)을 좌우에 두고 양실(兩室)을 동서에 끼워 두어 선생의 충(忠)과 효(孝)를 높이 받들어 모시고 시(詩)와 예(禮)로서 가르침을 드러내니 읍양(揖讓 : 읍하여 겸손한 뜻을 표시함)한다. 마음에 경영하여 남향으로 터를 잡으니 안전(眼前)에 높이 솟아 준공(竣工)도 멀지 않고 감독도 쉬워서 한 달 안에 완공(完工)하면 흠모(欽慕)하고 공경함에 빛이 나리라. 스스로 풍문(風聞)을 듣고 일어나는 이가 많으나 이제 비로소 창설(創設)의 거사(擧事)를 하니 자랑스럽고 공경스러운 일이로다. 물은 길게 흐르고 산은 높이 솟았으니 길이 꽃다움이 흘러 발길이 닫고 해가 가고 달이 가니 향사(享祀)를 드린다. 검은 장막을 헤치니 봄 바람에  기침소리를 듣는 듯 하고 빛나는 문턱을 우러러보니 거룩한 의용(儀容)을 받드는 듯하다. 동문제자(同門弟子)들이 당(堂)에서 같이 배우고 모두 눈으로 보고 느끼니 어찌 향선생(鄕先生)을 향사(鄕社)에서 제사를 받드는 것 뿐이겠는가? 족히 종사(宗師)를 천추(千秋)에 모시는 것이니 어찌 먼데서 구하리오? 오늘 아랑위(兒郞偉)의 노래를 부른다네. 즉 상량식(上梁式)을 올린다.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올리니 산세(山勢)는 해룡(海龍)이 설렁설렁 가는 듯하고 높이 솟은 누각(樓閣)에서 발을 걷어서 올리니 거울 속 같이 맑고 참다운 신선(神仙)이 수정궁(水晶宮)에 있는 듯 하구나. 어영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올리고 저 멀리 벽송정(碧松亭)을 바라보니 들(野)밖이 아득하네. 나무 우거진 높은 정자(亭子)에는 빼어난 경치만 남았고 저녁 노을 멀리 비낀 곳에 시냇물이 겹쳤구나. 어영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올리니 높이 솟은 읍선대(揖仙臺)는 푸르게 보이는 깊은 못에 굽혀 떠있네. 온 종일 난간에 기대어 보아도 싫증나지 않고 하늘빛 구름 그림자 거울 속에서 보는 듯하네. 어영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산은 높고 물은 깊은데 뉘 건너서 헤아리리. 이락(二樂)은 본래부터 군자(君子)의 마음이라. 흐르는 곳에 마주 서니 얼굴도 기쁜 빛을 띠네. 어영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올리니 우러러 하늘가를 쳐다보니 솔개가 떠있네. 밝은 달과 비 갠 뒤의 맑은 바람을 어디서 구할꼬. 가슴 가운데 스스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내야지. 어영차 대들보를 아래로 드니 사방(四方)의 들이 넓고 평평하구나. 달빛은 높은 다락집에 차고 물은 못에 가득하니 그 중에 좋은 경치 누가 그릴꼬. 엎드려 비노니 상량(上樑)한 후에는 각자가 성경(誠敬)의 도리를 다하고 힘써 존양(存養)으로 공부하여 시서(詩書)에 힘을 써서 근본을 찾고 실당(室堂)에 오르면 아마도 만나주실 것이다. 우러러 장차 나아가면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빛을 나타내며 도리(道理)의 말을 도와 감싸주고 천지귀신이 밝게 넓이 흩어져서 사특(邪慝)한 마귀를 나무래고 꾸짖어 원(院)에 향기가 아름답게 퍼지고 선비가 알묘(苗)하는 병폐가 없도록 하여 주소서. 

    이 협(李 浹) 동애(東厓)

    (註釋1) 오교(五敎)
    유교에서 말하는 5가지 기본적 실천덕목(實踐德目) 즉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이른다.
    (註釋2) 팔조목(八條目)
    ≪대학(大學)≫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여덟 조목.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註釋3) 명공거경(名公巨卿)
    이름난 재상과 높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註釋4) 청사(淸士)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를 말한다.
    (註釋5) 영성의열(英聲義烈)
    영웅스러운 명성과 의로운 기운을 말한다.
    (註釋6) 성화(聖化)
    성인이 덕행으로 교화함
    (註釋7) 작흥(作興)
    기운이나 정신을 일으킴
    (註釋8)  유풍(遺風)
    후세에까지 남겨진 교화(敎化)를 말한다.
    (註釋9) 정충(精忠)
    자기를 돌보지 않는 순수한 충성과 절의를 말한다.
    (註釋10) 사유(師儒)
    사람에게 도를 가르치는 유생(儒生)을 말한다.
    (註釋11)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註釋12) 장중(張仲)의 효우(孝友)
    주 선왕(周宣王) 때의 현신(賢臣)으로 성품이 효성스러워 ‘장중효우(張仲孝友)’로 칭한다.
    (註釋13) 구용구사(九容九思)
    군자가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자세’를 구용(九容)이라 하며  군자가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생각’을 구사(九思)라 한다.
    (註釋14) 의용(儀容)
    예의(禮儀)에 맞는 차림새를 말한다.
    (註釋15)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을 가르치는 선생을 뜻한다.
    (註釋16) 종사(宗師)
    모든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보는 스승을 말한다.
    (註釋17) 아랑위(兒郞偉)
    상량문은 아랑위(兒郞偉)라는 어구로 시작하며 아랑위(兒郞偉)는 도목수(都木手)가 장인(匠人)들을 싸잡아 부를 때 사용하는 상투적 표현이다
    (註釋18) 이락(二樂)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군자(君子)의 2가지 기쁨을 말한다.
    (註釋19) 호연지기(浩然之氣)
    도의(道義)에 근거(根據)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을 말한다.
    (註釋20) 존양(存養)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름.
    (註釋21) 알묘(苗) 
    곡식의 싹을 뽑아 올린다는 뜻으로, 성공을 서두르다가 도리어 해를 봄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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