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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星山李氏) 인주공파(仁州公派) 의재(義齋)

기사입력 2019.04.0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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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재(義齋) 유래(由來)

    (1) 선조 초에 유일(遺逸)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근재(謹齋) 이동례(李東禮)의 세 아들인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국포(菊圃) 이문용(李文龍), 매포(梅圃) 이택용(李澤龍) 등 삼포공(三圃公)이 “조상을 잘 섬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구휼사업(救恤事業)에 힘써야하며 친족이 화목해야 한다”라는 유지(遺志)를 남겼다. 따라서 후손들은 삼포공(三圃公)의 유업(遺業)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2년(1620년) 의창(義倉)을 건립하였으나 철종 13년(1862년) 1차 중건하면서 의재(義齋)로 개칭(改稱)하였다. 현재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리 산2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2) 창건 당시는 의창(義倉)이라 하여 곡식을 저장하여 선조의 묘사(墓祀) 제수용(祭需用)으로 사용하는 한편, 어려운 문족(門族)을 도와주는 구휼재물(救恤財物)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종친의 화목(和睦)을 도모하라는 유지(遺志)를 살리기 위해 지어졌다. 의창(義倉)을 의재(義齋)라 개칭(改稱)하면서 글을 배우는 학당(學堂)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3) 의재(義齋) 입구 왼쪽에는 2001년에 건립한 ‘홍와이선생사적비(弘窩李先生事蹟碑)’가 세워져 있고 정문인 진덕문(進門)을 들어서면 정면 돌계단 위에 의재가 높게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 재계실(齋戒室)이 있으며 왼쪽에 ‘성산이씨육현비(星山李氏六賢碑)’가 세워져 있다.

    (4) 의재(義齋) 경내 오른쪽에 세워진 ‘성산이씨육현비(星山李氏六賢碑)’는 숙종 30년(1704년)에 송오(松塢) 이사징(李士澄)을 비롯한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조선 선조 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근재(謹齋) 이동례(李東礼)와 그의 세 아들인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국포(菊圃) 이문용(李文龍), 매포(梅圃) 이택용(李澤龍) 등 육현(六賢)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5) 후손들은 1991년 사우(祠宇) ‘경덕사(景德祠)’를 창건(建)하여 지인주사(知仁州事) 이여충(李汝忠)과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지낸 아들 송오(松塢) 이사징(李士澄)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시조공(始祖公) 춘향일(春享日)인 4월 5일이 지난 4월 첫 번째 초정일(初丁日)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2. 의재(義齋) 연혁(沿革)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멸실(滅失)된 것을 후손들이 영조 39년(1763년) 중수(重修)하였고, 철종 13년(1862년) 1차 중건(重建)하면서 의창(義倉)을 의재(義齋)라 개칭(改稱)하였다. 2005년 2차 중건하면서 종전의 강당(講堂) 겸용 재실(齋室)과 과방간(果房間) 및 고직간(庫直間)을 헐어버리고 강당용 본체 및 재계실과 진덕문(進德門)을 건립했다.

    3. 건축형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좌측 1칸과 우측 2칸은 온돌방을 만들었고, 그 사이 2칸의 대청을 꾸몄다.

    4. 의재기(義齋記)

     

     

    일이 마땅하게 합하는 것을 의(義)라 하나니 의의운용(義義運用)은 친(親)할 사람을 친하는 것이 큼이 된다. 그러므로 의장(義庄)이라는 이름은 송(宋)의 범문정공(范文正公)에서 처음 나왔다. 후세에 많이 추모하고 본받아서 조묘(祧廟 : 대수가 먼 선조의 사당)로부터 묘제(墓祭)에 이르기까지 향화(香火)를 올리는 행사를 모든 족인(族人)에게 윤번(輪番)으로 시행하였다. 이에 종계(宗稧)라는 이름이 있어 종족(宗族)과 의리(義理)가 합하여 한 몸이 되어서 그 근본이 어진 것을 잊지 아니하고 그 친함을 잃지 아니 하였으니 일이 마땅하게 합하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관동(館洞)의 일족(一族)은 나와 더불어 분파(分派)된지가 10여세가 되었지만 신의(信義)를 강론(講論)하고 화목(和睦)을 닦는 것이 단문(袒免)과 다름이 없다. 바로 살고 있는 마을의 동쪽에 옛날의 의창(義倉)이 있었는데 창고의 이름을 의창(義倉)이라 한 것은 곡식을 저장하여 의롭게 이용한데서 뜻을 취한 것이다. 옛날의 사창(社倉)과 같아서 묘위(墓位)에 해마다 지내는 제사에 수용하고 문족(門族)에 곤궁한 사람을 구휼(救恤)하는데 쓰는 비용이 다 이 가운데서 나왔다. 그 창설(創設)한 것은 이미 지난 경신년(1620년)이다. 그 때에 완의(完議 : 충분히 의논하고 전원이 일치한 결정)한 절목(節目 : 조목)이 있으니 성과 이름을 책에다 열서(列書 : 죽 벌여서 기록함)하고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부쳤다. 이제에 이르러 옛 종이가 새것과 같으니 선부노(先父老)의 위선(爲先)하는 정성과 목족(睦族) 하는 정의(情誼)가 아름답도다. 옛집이 해가 오래되어 무너졌음으로 임술년(1862년)에 마을 뒤에 터를 잡아 고쳐 지었으니 신좌인향(申坐寅向)으로 지대(地帶)가 밝고 높은 곳이다. 제종(諸宗)이 합력(合力)하여 짧은 시일에 낙성(落成)을 고유(告由)하니 고사(庫舍 : 곳집)가 옛 것에 비하여 더욱 치밀하다. 내가 일찍 이곳을 지나다가 두루 살펴보고 제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창(倉 : 곳집)을 고쳐 재(齋)라 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내가 생각건대 재사(齋舍)가 이에 합당함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였으며 작은 것을 개척하여 크게 하고 낮은 데서부터 높게한 것은 다만 조선(祖先 : 조상)의 뜻을 이어 집을 잘 지었을 뿐 아니라 후생(後生 : 후예) 소배(小輩 : 하찮은 인물)의 이 재사(齋舍)에 기거(寄居)하는 사람은 시서(詩書)의 훈계(訓戒)에 유영(遊泳 : 젖어 듬)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을 복습(復習)하여 고가(古家)의 규모를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더욱 힘쓴다면 전인(前人 : 선조)에게 빛이 날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는가? 첨종(僉宗)이 말하기를 “공경히 명(命)을 받겠다”하고 그 말을 기록하여 벽에 걸도록 청하였다.


    갑자(1864년) 중춘 족인(族人) 전 참판(參判) 원조(源祚) 짓고 후손 중훈(中勳)쓰다

    (註釋1) 사창(社倉)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을 말한다.
    (註釋2) 단문(袒免)
    본문에서는 유복지친(有服之親 : 상복을 같이 입는 가까운 친족)을 뜻한다.
    5. 의재 중수기(義齋 重修記)

    대저(大抵 : 대체로) 존친(尊親 : 어버이를 높여 드리는 것)하는 의(義)는 계술(繼述 : 조상의 뜻과 사업을 이음)함보다 더 큼이 없고 계술(繼述)하는 도(道)는 수신(修身)하는 것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는데 수신하는 근본은 글을 읽고 이치를 깨달음이 이것이다. 우리 삼포부군(三圃府君)은 어릴쩍에 용사(龍蛇)의 난(亂)을 겪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종사하여 도학(道學)이 있는 선생 문하(門下)에서 취정(就正 : 가르침을 청하다)하여 덕업문망(德業文望)이 자자히(藉藉이 :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떠들썩함) 일세(一世 : 한 시대)에 무성하였으며 보본(報本 : 생겨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갚음) 유후(裕後 : 후손들에게 넉넉히 남겨주었음)하는 계책(計策)에 정성이 지극하여 자제에 명하여 종계(宗稧)를 구성하여 해마다 금곡(金穀 : 돈과 곡식)을 적립하여 힘을 넓히고 규모를 확장하여 제사를 지내고 책과 글을 쌓아서 후진이 할 업무를 주었다. 창고를 세워 곡식을 쌓아 선조의 묘사(墓祀)를 받들고 가난하고 어려운 일족(一族)을 구휼(救恤 : 구제)할 자본(資本)과 손님을 접대(接待)하는 모든 예절(禮節)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이 사업에 의지하였으니 이것이 의재(義齋)를 일으킨 연유(緣由)이다. 경신년(1620년)에 창건(建)하고 계미년(1763년)에 중수(重修)하여 이제 백여 년에 이르렀다. 또 무너지는 걱정이 있으므로 모든 일가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사물이 성립하고 훼손(毁損)함은 수(數)가 있고 중수하는 일은 사람에 있으니 지금 우리의 재사(齋舍)의 관계를 하는 바가 어찌하여 중수함을 새롭게 하는 길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에 힘에 따라 돈을 내고 정성을 다하여 재목을 모아서 기지(基地)를 택하여 옮겨지으니 몇 달을 지나 준공을 하였다. 아! 이것으로서 어찌 족히 소술(紹述 : 앞사람의 일을 이어받아 행함)하는 책임을 다 하였다고 하겠는가? 우리들이 이 재사(齋舍)에 출입함이 삼포공(三圃公)의 뜻을 뜻으로 삼고 삼포공(三圃公)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아 시(詩)와 예(禮)를 옷 입히듯이 하고 소리는 귀에 넘치고 차 마시듯이 현송(絃誦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하는 의(義)와 리(理)를 밥 먹고 효우(孝友)하는 정사(政事)는 집에 행할 것이며 충후(忠厚)한 정신이 마음에 자리잡고 단정(端正)한 법이 몸을 구휼하여 후생의 가르침에 차례가 있어 우리 삼포공(三圃公)으로 하여금 풍운(風韻 : 풍류와 운치)이 백세(百世 : 오랜 세대)의 아래에 끊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소술(紹述)하는 의의가 아니겠는가? 이미 이로서 힘쓰고 또 벽에 게시하여 자손에게 알리고자 한다.

    임술(1862년) 10월 상한 후손 인우(寅佑) 짓고 도검(都檢) 종발(鍾發) 감간(監幹) 호(灝), 인한(寅漢)

    (註釋1) 삼포부군(三圃府君)
    죽포(竹圃) 현룡(見龍), 국포(菊圃) 문룡(文龍), 매포(梅圃) 택룡(澤龍) 삼형제를 말한다. 본문에서 ‘삼포공(三圃公)’으로도 기록하였다.
    (註釋2) 용사(龍蛇)의 난(亂)
    십이지(十二支)의 진년(辰年 : 용띠의 해)과 사년(巳年 : 뱀띠의 해)으로 사람이 죽는 액운(厄運)이 든 해를 용사(龍蛇)의 해라고 하는데, 용사(龍蛇)의 난은 용사(龍蛇)의 해에 일어난 변란(變亂)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6. 의재(義齋) 관련 인물소개

    (1) 이여충(李汝忠)


    평양소윤(平壤少尹)을 지낸 이문광(李文廣)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지인주사(知仁州事 : 인천지방을 통치했던 지방장관)가 되어 인주공파(仁州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정명당(正明堂) 정복주(鄭復周) 선생이 찬(撰)한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효우(孝友)로서 가정을 다스리고 교화(敎化)로 백성의 표준이 되니 대경공(大卿公) 당시의 경사(慶事)를 금일(今日)에 다시 본다”라고 하였다. 배위는 증(贈) 판서(判書) 지예(之銳)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註釋) 대경공(大卿公) 당시의 경사(慶事)
    대경공(大卿公) 견수(堅守)는 부자(父子) 5인(人)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관(高官)을 역임하였던 사실을 말한다.

    (2) 이사징(李士澄)


    호는 송오(松塢)이며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여충(汝忠)과 증(贈) 판서(判書)를 지낸 예(銳)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종 18년(1418년) 태어났다.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의 문인(門人)이었고 정명당(正明堂) 정복주(鄭復周)와 도의(道義)로서 사귀었다. 조선 세종 1445년경(추정) 종전 세거지(世居地)인 성주(星州) 서쪽 명암(明岩) 정곡촌(鼎谷村) 즉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에서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館洞) 마을에 복거(卜居)하여 관동방(館洞坊)을 세워 ‘성산이씨(星山李氏)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세종조(世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향중(鄕中)의 사림(士林)들이 종장(宗匠)으로 추대하였다. 단종 2년(1454년) 졸(卒)하였다. 배위는 숙인(淑人) 고령이씨(高靈李氏)로 목사(牧使) 인실(仁實)의 따님이다.

    (3) 이현룡(李見龍)


    자는 성백(誠伯)이며 호는 죽포(竹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13년(1580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려(義旅 : 의병)를 이끌고 충주(忠州)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斥和)하는 소장(疏章)을 지어 상경(上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고령의 의장(義將) 이현룡(李見龍)은 소모(召募)하는 일에 진심으로 하였고 또 그 사람됨이 백집사(百執事)의 임무를 갖추었으니 청컨대 관리를 선발하는 부서인 전조(銓曹)로 하여금 드러나게 기록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또 격문(檄文)을 도내에 띄우고 창의(倡義)하여 험요(險要)를 지키고 장령(將領)을 차출하여 간략한 시설이 있었더니 도리어 ‘성하(城下)의 맹세(盟誓)’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후 사정별제(司正別提) 주부(主簿)로 역임하였는데 인조 15년(1637년) 6월 22일 승정원 일기에 상국(相國) 이경석(李景奭)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어 교도(敎導)하였다. 인조 17년(1639년)에는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출재(出宰)하여 대흥(大興)·유화(儒化)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효종 5년(1654년) 졸(卒)하였다. 배위는 충의교위(忠義校尉) 섭(涉)의 따님인 숙인(淑人) 철성이씨(鐵城李氏)이다.

    (註釋1) 험요(險要)
    지세(地勢)가 험하여 방어하는 데에 중요함. 또는 그런 곳.
    (註釋2) 성하(城下)의 맹세(盟誓)
    병자호란 중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였던 것을 말한다.

    (4) 이문룡(李文龍)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선조 17년(1584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씨 이현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아래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處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동호(東湖) 이서(李)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효종 6년(1655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기산동 뒤쪽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참봉(參奉) 취해(就海)의 따님인 진양하씨(晋陽河氏)이다.

    (5) 이택룡(李澤龍)

    <사진설명>​
    자는 계확(季確)이고 호는 매포(梅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선조 21년(1588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이 일찍이 “이 사람은 후일 반드시 대유(大儒) 즉 학식(學識)이 높은 선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12년(1620년) 졸(卒)하였다. 유문(遺文)은 세고(世稿)에 있다. 배위는 판관(判官) 홍기(洪基)의 따님인 분성허씨(盆城許氏)이다.


    자료제공 : 인주공파 유사 이종태(李鍾台)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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