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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 부장공파, 참봉공파, 기암공파

기사입력 2019.03.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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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수성나씨(壽城羅氏) 시조(始祖) 나위(羅緯)
    초휘(初諱)는 위(緯)이고 선공령(繕工令)을 지내고 순(純)으로 개명(改名)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郎) 때 홍찬(洪纘)으로 개명하였다.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지낸 문규(文奎)와 판서(判書) 음(蔭)의 딸인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태어났다. 우왕 10년(1384년) 명(明)나라가 5년간의 세공(歲貢)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명나라와의 국교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성절사(聖節使)인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명과의 관계회복에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1388년) 지수성군사(知壽城郡事)를 거쳐 공양왕 4년(1392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신왕조를 창업한 후 태조 2년(1393년)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불렀으나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지조(志操)를 지키기 위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자정(自靖)하다가 정종 1년(1399년) 졸(卒)하였다.

    (註釋) 자정(自靖)
    망한 나라의 신하가 새 왕족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숨어서 정절(靖節)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한다. 자견(自遣)이란 유사어(類似語)가 있다.


    (2) 금성나씨(錦城羅氏)에서 분관(分貫)
    ① 고려 초 등과해 한림(翰林)이 됐으며 정종 때 공신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져 금성나씨(錦城羅氏)의 시조가 된 나총례(羅聰禮)의 13세손인 나위(羅緯)가 지수성군사(知壽城郡事)를 재임(在任)하였고 공의 차남인 광우공(光佑公)이 수성(壽城)에 살았던 연유(緣由)로 금성나씨(錦城羅氏)에서 수성나씨(壽城羅氏)로 분관(分貫)하게 되었다.
    ② 수성나씨(壽城羅氏)로 분관(分貫)한 기록은 세종 17년(1435년)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한 나홍서(羅弘緖)의 문과방목(文科榜目)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분파(分派) 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고령 입향조 나순손(羅順孫)의 후손들은 10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부장공파(部將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기암공파(畸菴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밀양공파(密陽公派), 봉사공파(奉事公派) 등 8개파로 나누어진다.
    ② 부장공파(部將公派)는 다산면 곽촌리(못골, 지동), 참봉공파(參奉公派)는 곽촌리(못골, 지동), 월성리(고방), 송곡리(삼동), 기암공파(畸菴公派)는 노곡리(논실), 월성리(장척), 첨추공파(僉樞公派)는 성산면 득성리와 상용리에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③『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58가구 124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나광우(羅光佑)
    시조 나위(羅緯)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중현대부(中顯大夫)와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다.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사(政事)를 다스려 백성들이 서로 송사(訟事)로 다투는 일이 없었다. 배위는 고려 충숙왕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이성간(李成幹)의 따님인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② 나 만(羅 蔓)
    초휘(初諱)는 기(夔)이었으나 후에 만(蔓)으로 고쳤다.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낸 광우(光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봉선대부(奉善大夫)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인 서운관(書雲觀)의 도정(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위위시(衛尉寺) 소윤(少尹)을 지낸 현보(玄甫)의 따님인 숙인(淑人) 성산배씨(星山裵氏)이며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배극렴(裵克廉)의 여동생이다.


    (2) 조선시대
    ① 나유겸(羅有謙)
    서운관(書雲觀) 도정(都正)을 지낸 나만(羅蔓)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봉상대부(奉常大夫)와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다.
    ② 나상지(羅尙之)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유겸(有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배위는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예(芮)의 따님인 숙인(淑人) 하빈이씨(河濱李氏)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목적으로 고명대신(顧命大臣 : 국왕의 임종시 임금의 유언을 받드는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척살(刺殺)한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2) 김종서(金宗瑞)의 어머니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배규(裵規)의 따님이며 배규(裵規)의 장남은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우정언(右正言)을 지낸 배한(裵閑)이고 차남은 직집현전(直集賢殿)을 지낸 배윤(裵閏)이다. 따라서 김종서(金宗瑞)와 배규(裵規)의 아들은 내외종간(內外從間)이다.


    (3) 나상지(羅尙之)의 아들 나순손(羅順孫)의 배위가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우정언(右正言)을 지낸 배한(裵閑)의 따님이고 나상지(羅尙之)의 따님이 직집현전(直集賢殿)을 지낸 배윤(裵閏)이므로 성주배씨(星州裵氏)와 수성나씨(壽城羅氏)가문은 김종서(金宗瑞)와 인척(姻戚)이 되었다.


    (4) 따라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참화(慘禍)를 피하기 위하여 나순손(羅順孫)이 세조 1년(1456년) 선향지(先鄕地)인 성주 오도방(吾道坊) 즉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吾道里)에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지동(池洞)으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주요인물
    (1) 나순손(羅順孫)
    호는 취원정(聚遠亭)이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상지(尙之)와 형조판서(刑曹判書) 예(芮)의 따님인 하빈이씨(河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하동부사(河東府使)가 되어 학교를 세워 유풍(儒風)을 진작(振作)시키고 민폐(民弊)를 일소(一掃)하여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으로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조 원년(1455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棄官歸鄕里) 정자를 지어 취원정(聚遠亭)이라 하고 선비들과 시서예락(詩書禮樂)을 즐겼다. 또한 뒷산을 파서 농사짓기에 편리하도록 잿길을 내었고 가뭄을 막기 위하여 못을 파서 경작수리(耕作水利)를 편리하게 하였다. 길손들이 그 잿길을 하동로(河東路)라 일컬었고 몽리민(蒙利民)들은 그 못을 하동못이라 일컬었다. 하동로(河東路)는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선생이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의 영벽정(映碧亭)에서 읊은 시에 “盤如蛇屈河東路(반여사굴하동로) 즉 뱀같이 구불구불한 하동로”라 노래했고 경산지(京山誌)에도 이 사적(史蹟)이 실려 있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성주이씨 대동보(2011년 : 신묘보) 이필(李泌)의 방주(傍註)에 의하면 “공이 취원정(聚遠亭) 나공(羅公) 순손(順孫)에 수업하여 득문의리지학(得聞義理之學) 즉 성리학(性理學)을 배울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여 공의 학문이 높고 심원(深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배위는 좌사간(左司諫) 한(閑)의 따님인 숙인(淑人) 성주배씨(星州裵氏)이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지동(池洞) 현재 곽촌리(藿村里) 남중강(南中岡 : 남쪽 가운데 산등성이) 유좌(酉坐)에 있다.


    (2) 나이동(羅異童)
    담재(澹齋) 수경(守經)과 귀부(貴敷)의 딸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성종 4년(1473년)에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사인(舍人)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명종 20년(1565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월성동 장척(莊尺)에 있다. 배위는 교리(校理) 중휘(仲輝)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양주조씨(楊州趙氏)이다.


    (3) 나경문(羅景文)
    자는 문숙(文叔)이며 호는 서하옹(捿霞翁) 또는 휴휴당(休休堂)이라 한다. 음사(蔭仕)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이동(異童)과 교리(校理) 중휘(仲輝)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양주조씨(楊州趙氏) 사이에서 성종 23년(1492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지동(池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다.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 지극한 효성으로 여묘(廬墓)살이를 독실하게 하였으며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세상에 드러나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를 받았다. 중종 때 유일(遺逸)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야천(冶川) 박소(朴紹),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사귀었다. 경전의 의미를 연구하고 은거하면서 도를 구하였으며 정절(靖節)을 지켰다. 명종 7년(1552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 북치동 중록(中麓) 유좌에 있다. 배위는 군수(郡守)의 따님인 공인(恭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문집은 2권인데 상권(上卷)은 임진병란(壬辰兵亂)에 소실되었고 하권(下卷)만 1869년 목판본으로 서하일고(捿霞逸稿)가 전한다.


    (4) 나경(羅璟)
    자는 인세(仁世)이며 호는 죽리헌(竹裏軒) 또는 죽림재(竹林齋)이다.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지낸 계선(繼善)과 응지(應祉)의 따님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인조 3년(1625년)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남보다 뛰어나게 영리하며 슬기로웠고 겸하여 효제(孝悌)를 다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송암(松菴) 김면(金沔) 양선생의 문하에서 감화를 받아 품성을 고치고 덕성(德性)을 함양(涵養)하였다. 문무(文武)에 재주와 기량이 있어 선무랑(宣務郞)과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지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6년간 여묘(廬墓)를 하였고 숙종 13년(1687년) 졸(卒)하였다.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이 행장(行狀)을 짓고 행은(杏隱) 정석유(鄭錫儒)가 묘갈명을 지었다.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원록(李元祿), 진사(進士) 박천장(朴天章), 정언(正言) 권진한(權震翰) 등 제현(諸賢)이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공의 후손들이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죽림재(竹林齋)를 세웠는데 앙산(仰山) 송홍구(宋鴻求)가 죽림재기(竹林齋記)를 지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기동 모정산 선영하 자좌(子坐)에 있다. 초취(初娶)는 충순위(忠順衛) 식(湜)의 따님인 의인(宜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재취(再娶)는 귀성(貴誠)의 따님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이다.


    (5) 나학순(羅學洵)
    초휘(初諱)는 학순(學淳)이었으나 학순(學洵)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자는 희백(希伯)이고 호는 송오(松塢) 또는 인백당(忍百堂)이다. 진회(振繪)의 아들로 현종 15년(1674년) 태어났으나 백부(伯父)인 진소(振素)에게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공은 천품(天稟)이 훌륭하고 두드러지게 뛰어나 청간당(聽澗堂) 이지완(李志完) 등 여러 석유(碩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강마(講磨)에 힘쓰는 한편 현재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낙동강이 내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및 노론(老論) 핵심세력을 제향(祭香)한 노강서원(老江書院)의 건립에 청간당(聽澗堂) 이지완(李志完)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대표적인 지역의 노론계(老論系) 인사(人士)이었다. 노강서원(老江書院) 시첩(試帖)에 남아 있는 공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 斯世晩來事已非(사세만래사이비)
     이 세상 늙어갈수록 일은 그릇되고
     獨存院宇像依稀(독존원우상의희)
     홀로 남은 원우(院宇)에는 유상(遺像 : 죽은 사람의 초상화)만 희미하네
     春秋直筆人知懼(춘추직필인지구)
     춘추의 직필(直筆 : 구애됨이 없이 사실 그대로 씀) 사람들 두려워할 줄 알고
     理氣論明道不微(이기논명도불미)
     이기(理氣)의 밝은 논의 도는 작지 않다네
     吾嶺如今尋正路(오영여금심정로)
     영남은 지금처럼 바른 길을 찾고
     生徒於此襲餘徽(생도어차습여휘)
     생도들이 이곳에서 남긴 아름다움 잇네
     年年享祀齋修日(년년향사재수일)
     해마다 향사하고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高揖遺風覺有歸(고읍유풍각유귀)
     유풍(遺風)에 높이 읍(揖)하며 귀결(歸結)이 있음을 깨닫네”

    그리고 공이 중심이 되어 김창집(金昌集)과 민진원(閔鎭遠)을 배향(配享)하는 수덕서원(粹德書院)을 성주에 세웠다. 노론에서 경종을 끌어내고 연잉군(延礽君 : 영조)을 추대하려는 시나리오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발각되어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이 사약(賜藥)을 받고 사사(賜死)되자 호상(護喪)하였다고 한다. 영조 30년(1754년) 수(壽) 81세로 졸(卒)하였다. 유고(遺稿) 1권(松塢遺稿)이 전해져 온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방(伐知坊) 새동(塞洞) 동화등(桐花嶝)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익형(益亨)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2) 근·현대 인물
    ① 나진구(羅鎭九, 1952년) : 제23회 행정고시, 서울시 제1행정부시장, 중랑구청장(민선 6기)
    ② 나종택(羅鍾澤, 1937년) : 전) 6~7대 경북도의원(2선), 현)경북재향경우회장(19~20대), 현) 47대고령향교 전교
    ③ 나규택(羅奎澤, 1941년) : 전) 8대 경북도의원
    ④ 나병택(羅秉澤, 1936년) : 전) 다산 농협장(2선)
    ⑤ 나원식(羅元植, 1942년) : 전) 개진 농협장(3선), 고령군농지개량조합장
    ⑥ 나성택(羅聖澤, 1933년) : 전) 다산 농협장
    ⑦ 나명기(羅明基, 1932년) : 전) 대구지법 민원과장(서기관)
    ⑧ 나대기(羅大基, 1936년) : 전) 경북대학교 사무국장(부이사관)
    ⑨ 나경기(羅敬基, 1929년) : 전) 안기부 대구지부 대공분실장
    ⑩ 나남기(羅南基, 1924년) : 전) 안기부 부산지부 대공분실장
    ⑪ 나원식(羅源植, 1983년) : 제48회 사법고시, 현) 대구고등법원 판사
    ⑫ 나채목(羅采穆, 1979년) : 제49회 행정고시, 현) 행정안전부(서기관)
    ⑬ 나영강(羅永康, 1958년) : 전) 경상북도 유통특작과장(서기관)
    ⑭ 나영일(羅永一, 1961년) : 현 고령군청(사무관)
    ⑮ 나채일(羅采日, 1957년) : 현) 세무사
    ⑯ 나현엽(羅玄燁, 1953년) : 현) 세무사
    ⑰ 나인엽(羅仁燁, 1930년) : 전) 대구대학교 공과대학장
    ⑱ 나영일(羅永日, 1948년) : 전)  대구관광고등학교 교장
    ⑲ 나영악(羅永岳, 1954년) : 현)대구보건대학교 교수
    ⑳ 나현철(羅賢撤, 1957년) : 현) 서울대 공대교수(공학박사)
     나현욱(羅鉉煜, 1958년) : 현) 동아대 의대교수(의학박사)
     나건연(羅建淵, 1936년) : 전) 대구 파티마병원 과장
     나우연(羅雨淵, 1942년) : 현)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제일방사선과병원장)
     나주영(羅朱永, 1956년) : 현) 제일테크노스 대표(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나창엽(羅昌燁, 1953년) : 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장
     나인엽(羅仁燁, 1962년) : 현) 고령군의회 의원
     나채인(羅采仁, 1982년) : 현) 경상대학교 교수
     나채근(羅采根. 1962년) : 현) 경상북도청 사무관

     

     

    자료제공 : 수성나씨 종친회 총무 나종근(羅宗根)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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