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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도연재(道淵齋)

기사입력 2019.03.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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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연재(道淵齋) 유래

    고령군 쌍림면 개실1길 34(합가리)에 소재한 이 건물은 종택(宗宅)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14대 주손(冑孫) 창현(昌鉉)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공의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계(稧)를 조직하여 조선 고종(高宗) 3년(1866년) 병인년 3월에 창건(創建)하여 유생을 가르치는 강학지소(講學之所)이자 제사를 모시는 재실(齋室)로 사용한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도연재(道淵齋)라 이름함은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 되신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을 기리는 재실(齋室)이라는 의미에서 도연재(道淵齋)로 편액(扁額)하였다. 

    2. 건축형태
    (1) 도연재(道淵齋)의 입구는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외곽은 방형(方形)으로 토석(土石) 담장을 둘렀다.

     
    (2)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으로 상부가구(上部架構 : 상부의 목재구조)는 5량가(五樑架 : 종단면상에 도리가 다섯 줄로 걸리는 가구형식)이며, 소로수장집(小櫨修粧집)이다. 건물의 좌측 전면에는 높은 누마루를 두었으며, 그 하부에는 광을 설치하였다. 우측에는 전면이 개방된 대청을 두었는데 우측면과 배면의 각 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되었고, 대청 좌측에는 전면에 툇마루를 둔 2통칸 온돌방이 설치되었으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2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좌측에는 측간, 가운데 대문칸, 우측에는 방을 두었다
    (註釋1)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말한다.
    (註釋2) 소로수장집(小櫨修粧집)
    기둥상부에 횡으로 창방(昌防)을 걸고 이와 장혀사이에 ‘소로(小櫨)’라는 부재를 일정 간격으로 끼워 넣은 집을 ‘소로수장집(小櫨修粧집)’이라고 부른다.

    3. 김종직(金宗直)


    본관은 일선(一善)이고 자는 계온(季溫), 효관(孝盥)이고 호는 점필재(畢齋)이다.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지낸 강호(江湖) 숙자(叔滋)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홍신(弘信)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세종 13년(1431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서 태어났다. 점필재(畢齋)란 호(號)는 쉽게 풀어서 ‘책 읽는 집’이라는 뜻이다. 16세 때인 세종 28년(1446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어 제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때 태학사(太學士)로 있던 김수온(金守溫)이 낙방(落榜)한 시험지를 읽어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장차 문형(文衡) 즉 대제학(大提學)될 인물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단종 1년(1453년)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進士)로 입격(入格)하였다. 세조 3년(1457년) 27세 때 항우(項羽)에게 죽은 중국 초(楚)나라 회왕(懷王) 의제(義帝)를 조상(弔喪 : 조문)하는 글인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義帝)에 비유하여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비난하였는데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시 사초(史草)에 실었던 것으로 후일 연산군 4년(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이 되었다. 세조 5년(145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조 6년(1460년)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세조 7년(1462년)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 세조 9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세조 11년(1465년) 영남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 세조 13년(1467년)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성종 1년(1470년) 어머니가 71세로 연로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봉양하기를 청하여 성종 2년(1471년)부터 성종 7년(1476년)까지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재직하였다. 성종 2년(1471년) 경상도 관찰사였던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이 학사루(學士樓)에 새긴 시판(詩板)을 소인배(小人輩)의 글이라 하여 떼어 내고 소각하여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었다. 성종 3년(1472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등이 문하에서 배웠다. 성종 5년(1474년) 함양에 다원(茶園 : 차밭)을 조성하여 백성의 세(稅)부담을 경감시켰다. 성종 7년(1476년)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에 임명되어 ‘일선지도지(一善地圖誌)’를 만들었다. 성종 10년(147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상례(喪禮)에 따랐다. 성종 13년(1482년) 금릉의 옛 거처로 돌아가서 경렴당(景濂堂)을 짓고 후학양성에 열중하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정경부인(貞敬夫人) 하산조씨(夏山曺氏)가 운명(殞命)하였다. 성종 14년(1483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左副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병조참판(兵曹參判)·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공조참판(工曹參判)·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16년(1485년) 사복시정(司僕寺正) 문극정(文克貞)의 따님인 남평문씨(南平文氏 : 18세)를 재취(再娶)로 맞이하였다. 성종 17년(1486년) 성현(成俔), 채수(蔡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정(修正)하였다. 성종 20년(1489년) 가을에 병이 들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자리를 옮겼다. 성종 23년(1492년) 중풍으로 밀양 명발와(明發窩)에서 졸(卒)하였다. 묘는 처음 밀양의 무량원(無量院)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장사하였으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구택(舊宅) 뒷산 경좌(庚坐)로 개장(改葬)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學統)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였으며 유학(儒學)을 실천적 학문으로 보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의 가르침을 행하여 유교적 예속(禮俗)을 널리 진작(振作)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후일 ‘사림(士林)의 조종(祖宗)’이 되었으며 문장(文章)·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節義)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正脈)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공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金宏弼)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유두유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이존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이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공의 제자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나 중종 2년(1507년)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 :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버림)되었으며 중종 9년(1514년) 청백리(淸白吏)로 추대되고 숙종 15년(1689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 도연재기(道淵齋記)


    강학소(講學所)는 곧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의미하는 곳이다. 후인(後人)이 선현(先賢)을 존모(尊慕)한다면 반드시 강학소를 세운다. 때문에 옥산(玉山)의 계정서숙(溪亭書塾)과 도산(陶山)의 부산서당(涪山書堂)은 모두 연원을 취하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옛날 문충공(文忠公) 점필재(畢齋) 선생은 동방(東方)에서 일어나신 우뚝한 선각자(先覺者)로 문명(文明)한 세상에 태어나 가정의 훈도(薰陶 : 덕으로써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함)를 익혀 위로는 수사(洙泗)와 염락(濂洛)의 도통(道統)을 이으시고 아래로는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의 의발(衣鉢)을 전수(傳受)받아 일찍이 사도(師道)를 천양(闡揚 :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하니 수 많은 선비들이 운집(雲集)했었다.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백세(百世)의 스승이 되어 안으로는 생용(笙鏞)과 보불(黼黻)의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는 전각(殿閣)과 지리(地理)에 관한 글을 모았다. 이러한 사적(史蹟)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응천(凝川 : 밀양)의 대동(大洞)에 있던 명발와(明發窩)는 뒷날 예림서원(禮林書院)이 되었고, 금릉(金陵 : 김천)의 자양동(紫陽洞)에 있던 종연실(種蓮室)은 경렴서원(景濂書院)이 되었다. 이에서 선생의 도학 연원이 유래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슬프다! 세도(世道)가 날로 변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겪은 뒤부터는 외로운 가문이 의지할 바 없더니 천리(天理)가 크게 밝아져 합천(陜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고을 행정리(杏亭里)에 거처하여 어렵게 3대를 지내다가 영천(靈川 : 고령)의 용담(龍潭) 아래 마을에서 졸지(猝地)에 임진난(壬辰亂)을 만나 유적을 송림(松林) 지동(池洞)에서 유실해버렸다. 화왕산(火旺山)에서 의병을 일으킴으로 겨우 쇠잔(衰殘)한 가문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리(天理)가 멸하지 않음인가. 신묘년(1651년)에 비로소 가곡리(佳谷里)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미 여섯 해를 지냈으나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만 있고 강학소(講學所)가 없으니 비단 자손들만의 유감이 아니라, 실상은 사림(士林)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함이 있었다. 다행히도 계묘년 문연재(文淵齋) 유회(儒會) 자리에서 공론(公論)이 크게 일어나 자금을 모으고 재실을 지어 ‘도연재(道淵齋)’라는 편액을 걸게 되었으니, 이는 이미 말한 바의 도학 연원을 뜻하는 것이다. 기문(記文)을 나에게 부탁하거늘 나 또한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을 사모한지 이미 오래였다. 예컨데 경사(京師 : 서울)의 금오부(金吾府)․영가(永嘉 : 안동)의 영호루(暎湖樓)․청송(靑松)의 백학관(白鶴觀)․보은(報恩)의 속리사(俗離寺) 등에 공경심을 일으켜 올라가 선생의 유묵(遺墨)을 둘러 본지라, 나의 못남을 잊고서 참람(僭濫 : 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치다)히도 기록하니 또한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도연재의 기문을 짓는 일에 늙음을 구실삼아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일을 시종 주관한 이는 종손인 침랑(寢郞 : 참봉) 창현(昌鉉)이다.

    후학(後學) 숭정대부 전공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崇政大夫 前工曹判書 兼 知經筵春秋館事)·의금부사(義禁府事)·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궁내부특선관(宮內府特選官) 인동(仁同) 장석룡(張錫龍)은 삼가 짓다.
    (註釋1) 수사(洙泗)
    공자가 제자들과 강학(講學)하던 강 이름인데 후대에서는 공맹(孔孟)의 도(道)를 지칭하는 말이다.
    (註釋2) 염락(濂洛)
    염계(濂溪)와 낙수(洛水)를 합칭한 말로서 주돈이(周敦)와 정자(程自) 형제가 강학하던 곳이며 후대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註釋3) 의발(衣鉢)
    가사와 바리때를 말하나 도(道)를 전수받는 것을 뜻한다.
    (註釋4) 생용(笙鏞)
    악기(樂器)를 지칭하는 말로 동쪽에는 생황을 두고 서쪽에는 큰 종을 둔다. 여기서는 음악의 전체를 상징한다.
    (註釋5) 보불(黼黻)
    임금이 대례(大禮)·제복(祭服)으로 착용하던 곤복(袞服)에 놓은 문양(文樣). 도끼와 아(亞)의 형상을 문양을 보불이라 한다. 여기서는 예법(禮法)을 지칭한다.
    (註釋6) 화왕산(火旺山)에서 의병을 일으킴
    점필재(畢齋) 현손(玄孫) 김성진(金聲振)이 정유재란 당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입성(入城)하여 방어에 공을 세웠던 사실을 말한다.
    5.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고령(高靈)과 인연, 관련 시(詩)
    (1) 고령(高靈)과 인연(因緣)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가 54세인 세종 24년(1442년)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세종 29년(1447년) 주부(主簿) 겸 남학교수(南學敎授)가 되어 서울로 복직(復職)하였다. 따라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은 12세부터 17세까지 5년동안 고령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었다.


    (2) 관련 시(詩)
    27세 때 고령을 지나면서 감회에 젖은 ‘과고령감회(過高靈感懷)’를 소개한다.

    嚴父有半白 牽絲大耶城(엄부유반백 견사대야성) 
    엄친(嚴親)께서 대야성(고령)을 다스릴 적에
    吾方峩丱角 日趨詩禮庭(오방아관각 일추시예정)
    나는 마침 총각머리 하고서 시문(詩文)과 예의(禮義)의 가르침 받았지
    六載桐鄕民 比屋絃誦聲(육재동향민 비옥현송성)
    여섯 해 동안 고을 주민은 집 마다 글 읽는 소리 이어졌지
    于今歲月遐 遺愛誰當銘(우금세월하 유애수당명)
    이제는 세월이 멀어졌으니 끼친 혜택은 누가 새겨 두겠는가?
    我來歷玆土 魂斷涕飄零(아래역자토 혼단체표영)
    내가 이 땅(고령)을 지나가자니 맥없이 눈물이 훌쩍 떨어지는 구나
    林間露公廨 彷佛聆敲(임간노공해 방불영고방)
    숲 사이 나타나는 관청 건물에는 매치는 소리 어렴풋이 들리는 듯
    當時所釣遊 宛然足重經(당시소조유 완연족중경)
    어릴적 낚시질하며 노닐던 곳 완연히 발걸음 다시 옮겨 보는데
    故舊已垂白 驚呼幾死生(고구이수백 경호기사생)
    예전에 알던 분들 이미 머리 희어져 몇이나 살았는지 놀라 불러 보노라
    落日苦徘徊 山水有餘情(낙일고배회 산수유여정)
    해 질 녘 괴로워 배회하노니 산과 냇물에는 남은 정이 있구나.

    6. 도연재(道淵齋) 계안(契案) 서문(序文)
    우리 문충공(文忠公) 김 선생은 문장과 도덕이 전고(前古)에 크게 드러나서 우뚝 사문(斯文)의 종서(宗緖 : 가장 뛰어난 사람)가 되었으니,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연원(淵源)이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에게 파급되었다가 선생에게서 발휘되었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두 분 선정(先正 : 선대의 어진 이)은 또 그 적류(嫡流)였다. 이로 부터 천 갈래 만 갈래로 우리 동국(東國)에 그득하여 지금까지 유자(儒者)의 의관(衣冠)을 입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배워서 예의를 강론하는 자는 모두 선생의 문도(門徒)이다. 선생이 계왕개래(繼往開來)한 공은 실로 동방백세(東方百世)의 사표(師表)로다. 선왕의 성대한 시대에 조정에서 존현(尊賢)의 법도(法度)를 높여 선생을 제사하는 곳이 고을마다 이어져서 사람이 의지할 곳이 있었고 후학들이 존경할 곳도 있었으나, 천하가 혼란함에 우리의 도가 점차 사그라져 제사지내는 곳이 폐기되고 선비들은 흩어져서 절하고 읍(揖)하던 마당에 풀이 무성하고 구름만 날아다니며, 여름에 시를 외고 봄에 예를 익히던 모습은 모두가 사라졌다. 오호라, 이는 세상의 도를 위하여 마음 아파할 일이로다. 선생의 사당(祠堂)이 이곳에 있게 된 지 거의 수백 년이나 오래되고 그 자손이 대대로 살고 있어서 이 고장에서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것은 더욱이 다른 지역 사람보다 차별함이 있으나 아직도 선생을 위하여 지은 몇 칸의 집이 없으니 고을 인사들이 모두들 탄식하며 답답해하는 마음 어찌 그지 있겠는가? 지난해 고을 인사들이 선생의 주손(冑孫)인 참봉공(參奉公) 창현(昌鉉)과 의논하여 계를 모으자는 논의를 발의하니 온 도내의 선비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1916년 병진(丙辰)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근찬(謹撰)
    (註釋1) 적류(嫡流) 적가(嫡家)의 계통(系統), 정통(正統)의 유파(流派)
    (註釋2) 계왕개래(繼往開來)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의 준말로서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후세의 학자들에게 가르쳐 전함

    자료제공 : 문충공파 전 사무국장 김년수(金年秀)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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