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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분성군파(盆城君派)

기사입력 2019.03.1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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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시조의 휘(諱)는 시흥(時興)이고 호는 송악(松嶽) 또는 둔촌(鈍村)이며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며 경순왕(敬順王)의 8세손이고 동정(同正) 벼슬을 한 봉기(鳳麒)의 아들로 고려 고종 때 태어났다. 몽고(蒙古)의 침입, 삼별초(三別抄)의 난 등 국난(國難)을 당해서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삼한중대광정승(三韓重大匡政丞)을 추증(追贈)받고 상락군(上洛君)을 봉군(封君)받았으며 김녕군(金寧君)으로 이봉(移封)을 받았다. 배위는 부부인(府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이다.
    (註釋) 출장입상(出將入相)
    난시(亂時)에는 싸움터에 나가서 장군(將軍)이 되고, 평시(平時)에는 재상(宰相)이 되어 정치(政治)를 함을 이르는 말이다.
    (註釋) 이봉(移封)
    종전에 공신이 받았던 식읍지(食邑地)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2) 수원김씨(水原金氏)에서 분적(分籍)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토평(討平)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이후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역임하고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져 수원김씨(水原金氏) 시조(始祖)가 된 김품언(金稟言)의 현손(玄孫)이 김녕김씨(金寧金氏) 시조 김시흥(金時興)이다. 따라서 김녕김씨(金寧金氏)는 수원김씨(水原金氏)에서 분적(分籍)되었다.
    (註釋) 분적(分籍)
    원래의 본관(本貫)에서 분리하여 새롭게 본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3) 본관(本貫) 이관(移貫) 사실


    ① 시조가 봉군(封君)을 받았던 금주(金州)가 김녕(金寧), 분성(盆城)으로 지명(地名) 변천을 하여 충선왕 2년(1310년)부터 김해(金海)로만 본관(本貫)을 써 왔기 때문에 김해(金海) 또는 분성(盆城)으로 써왔다.
    ②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후예도 김해(金海)로 본관(本貫)을 써 왔기 때문에 ‘선김(先金)’이라 하였고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는 ‘후김(後金)’으로 불러 각각 구별하였으나
    ③ 조상이 다르지만 ‘선김(先金)’과 ‘후김(後金)’ 모두 같은 김해(金海)라는 본관을 사용하여(異祖同貫) 혼란(混亂)으로 인하여 복잡다단(複雜多端)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④ 따라서 헌종 15년(1849년) 보첩(譜牒 : 족보로 된 책)을 수정(修正)할 때 예조(禮曹)에 상소(上疏)하여 고종 21년(1884년) 김녕군(金寧君) 후손은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수보(修譜)할 것을 허락받았다.

    (4)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을 배출한 집안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泳三)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분성군(盆城君), 충정공(忠貞公)을 지낸 김준영(金俊榮)을 파조(派祖)로 하는 충정공파(忠貞公派)에 속하며 시조의 28대손이다.

    (5) 김녕김씨(金寧金氏) 파별 분포 현황
    ①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후손들은 쌍림면 신곡2리(박실), 우곡면 답곡1리(희정동), 성산면 삼대1리, 개진면 직리 등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② 분성군(盆城君) 김응수(金應壽)의 후손들은 다산면 벌지리에 세거하고 있다. ③ 최근 산업화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으로 약 100여가구 미만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중원(金重源)
    호는 미곡(楣谷)이며 대광첨의찬성사(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한 김극세(金克世)의 아들로 고려 충선왕 때 태어났다. 형부시랑(刑部侍郞)과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단식순절(斷食殉節)하였다. 배위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조부인 추존(追尊) 도조대왕(度祖大王) 이춘(李椿)의 둘째 딸인 문숙공주(文淑公主)이므로 이성계의 고모(姑母)가 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추존(追尊)
    살아생전에는 임금으로 등극하지는 못했거나 폐위(廢位)되었던 임금들 중에서 사후(死後)에 다시 왕으로 모시는 것을 추존(追尊)이라고 한다.
    ② 김광저(金光儲)
    자는 화중(華中)이고 호는 농암(聾岩)이다. 고려 때 밀직사(密直司) 좌승선(左承宣),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김순(金順)
    자는 창여(昌汝)이고 호는 퇴휴당(退休堂)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퇴휴당(退休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고려 우왕 2년(1376년) 병진방(丙辰榜)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한 후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봉익대부(奉翊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 정자를 짓고 망국(亡國)의 한을 달렸다. 묘는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서령촌 남쪽 기슭 건좌(乾坐)이다.

    (2) 조선시대
    ① 김문기(金文起)
    초명(初名)은 효기(孝起)이고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이다. 조선 태종 때 호분시위사좌령사직(虎賁侍衛司左領司直)을 지낸 순(順)의 아들로 정종 1년(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白池里)에서 태어났다. 세종 8년(1426년)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1436년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문종 1년(1451년)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임명되자 임지(任地)에 가서 안변(安邊)·정평(定平)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단종 1년(1453년)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나갔다. 세조 1년(1455년)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諭詩)에 따라 온성(穩城)의 읍성(邑城)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세조 2년(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사전에 발각되었을 때 공(公)만이 공초(供招 :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불복(不服)하였으며 6월 8일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었다. 영조 7년(1731년) 복관(復官)하고 정조 2년(1778년)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 15년(1791년)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워 단종(端宗)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 : 편집하여 정함)할 때,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과 함께 공은 판서급(判書級)의 중신(重臣)이라는 이유로 ‘삼중신(三重臣)’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생육신(生六臣)인 남효온(南孝溫)이 그의 저서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대로 ‘사육신(死六臣)’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虛葬)을 봉안(奉安)할 것을 허락하여 가묘(假墓)를 추봉(追封)하였다. 공의 사실을 기록한『백촌유사(白村遺事)』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註釋) 유시(諭詩)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유수 등이 임지로 부임할 때 장병 또는 발병(군사를 일으킴)할 수 있는 밀부(密符)를 내린다는 명령서이다.
    (註釋) 차사원(差使員)
    조선시대 각종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임시로 차출, 임명되는 관원(官員)을 말한다.
    (註釋)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
    정조가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배향(配享)할 사람의 명단을 결정한 것을 말한다. 정단(正壇)에 32명, 별단(別壇)에 100명이 배향되어 있는데 김문기(金文起)는 정단(正壇)에 배향되었다.
    (註釋) 배식단(配食壇)
    영월 장릉(莊陵)에 단종에게 충절(忠節)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祭壇)을 말한다.
    ② 김응수(金應壽)
    자는 남로(南老)이다. 분릉군(盆陵君) 복룡(福龍)과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명종 2년(1547년) 태어났다. 사복시(司僕寺) 잡직(雜職)인 이마(理馬)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판관(判官)을 거쳐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김)하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가(扈駕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르던 일)하여 선조 37년(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策錄)되었고 분성군(盆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선조 38년(1605년)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받았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고 묘는 고양 청담리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현감(縣監) 권(權)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③ 김현석(金玄錫)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여병재(如甁齋)이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김문기(金文起)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효정(孝貞)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김봉비(金奉非) 사이에서 태어났다. 거창현감(居昌縣監)·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하였다. 공의 아버지가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으면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더불어 세조 2년(1456년) 단종(端宗)을 복위(復位)시키려다 탄로되어 그 해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자 아버지를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거창에 사적비(事蹟碑)가 있고 영월에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려 세운 청덕비(淸德碑)가 있다. 아들 김충주(金忠柱)와 손자 김현남(金玄南), 고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을 빛내어 1763년(영조 39)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조 15년(1791년)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의 별단(別壇)에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연좌(緣坐)되어 죽은 1백 90인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충의공파(忠毅公派)
    ① 선조 25년(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낸 성(星)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김천 지례에서 고령군 성산면 삼대1리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② 인조 5년(1627년) 교수(敎授)를 지낸 고량(顧量)이 경주 양남 나산에서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희정동(希亭洞)으로 입향(入鄕)하여 우곡면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③ 현종 11년(1670년) 경 처사(處士) 광준(光峻)이 울산 언양에서 고령군 쌍림면 신곡2리 박곡(璞谷)에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④ 영조 26년(1750년) 경 처사(處士) 망운(望雲)이 청도 풍각에서 고령군 개진면 직리(直里)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2) 분성공파(盆城君派)
    숙종 26년(1700년) 경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지낸 득례(得禮)가 충북 옥천에서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득례(金得禮)
    자는 예숙(禮叔)이며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낸 승현(承賢)과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인조 22년(1644년) 5월 8일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지냈다. 영조 2년(1726)년 3월 16일 향년 83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동 망태산 9번지 간좌(艮坐)이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이다.
    ② 김광준(金光峻)
    자는 준팔(俊八)이며 호는 언곡(彦谷)이다. 처사(處士) 창선(昌善)과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서 효종 1년(1650년)에 태어났다. 충신(忠臣)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으로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돈후한 성품과 예양(禮讓)의 덕을 지녔고 경서(經書)를 가까이 하면서 세상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산림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니 고을사람들이 ‘임하처사(林下處士)’라고 불렀다. 숙종 11년(1685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 장송골 유좌(酉坐)에 있다. 배위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이다. 후손들이 1991년 경언재(景彦齋)를 세워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제향(祭享)하고 있다.
    ③ 김덕채(金德采)
    자는 선경(善卿)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증직(贈職) 받은 성태(聖泰)와 단문(端文)의 딸인 숙인(淑人)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이에서 영조 29년(1753년) 태어났다. 학행(學行)과 효행(孝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받았다. 졸년(卒年) 미상이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삼대동 후룡 주령 유좌(酉坐)이다. 초취(初娶)는 익(益)의 따님인 증숙부인(贈淑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이고 재취(再娶)는 호권(浩權)의 따님인 증숙부인(贈淑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④ 김성욱(金成郁)
    자는 경진(敬震)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처사(處士) 태화(泰和)와 수채(秀菜)의 따님인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서 순조 5년(1805년)에 태어났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沙月里) 초포촌(草浦村)에 살고 있는 남고(南皐) 이지용(李志容) 선생을 찾아가 속수지례(束脩之禮)를 올리고 제자가 되어 수학(受學)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는 것을 단념하고 오직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고 전념하였으며 집안의 자제들에게 성현의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권면(勸勉)하다가 1899년 고종명(考終命)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 박곡 가전 양지 임좌(壬坐)이다.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註釋) 속수지례(束脩之禮)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肉脯 : 말린 고기)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원규(金源圭 1907년) : 고령향교 전교(典校)
    ② 김진태(金鎭泰 1935년) : 고령군 도시과장, 재무과장, 성산면장, 제4대 고령군의회 회장
    ③ 김연조(金淵祚 1946년) : 담수회(淡水會) 고령지부장
    ④ 김성수(金聖洙 1947년) : 대한관광개발 상무이사, 김녕김씨 중앙 종친회 사무총장, 재경 성산면 향우회 회장
    ⑤ 김판돌(金判乭 1947년) : 삼성전자 연구원
    ⑥ 김상봉(金常俸 1948년) : 경북지방경찰청장, 경기지방경찰청장
    ⑦ 김경조(金敬祚 1952년) : 고령경찰서 수사과장
    ⑧ 김봉규(金鳳圭 1956년) : 육군 중령
    ⑨ 김상열(金相烈 1957년) : 영창피아노 대구 총판 대표
    ⑩ 김재환(金在煥 1960년) : 지산푸드 대표
    ⑪ 김석연(金錫淵 1961년) : 경북도청 사무관, 의성군 농업기술센터 과장
    ⑫ 김재영(金在英 1970년) : 육군 중령

     

     

    자료제공 : 김녕김씨 박곡문중 김연조(金淵祚)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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